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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 _ 역사 이야기
얼마 전 통합진보당 청년비례대표 후보경선에 나선 27세 한 여자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공사 중단 발언으로 제주 해군기지를 “ 해적(海賊)기지”라고 자기 트위터에 올렸던 일이 있다. 그로인해 일파만파 확대되어 해군본부 검찰부장아 해군장병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검찰에 고소장을 내놓기까지에 이르렀다.
요즘 젊은이들은 해 이토록 극단적인 행동으로 국가를 그리고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 내가 읽었던 역사에서 한 여인의 비참하고 억울했던 운명적이 역사 현장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어 과거 역사를 한번 뒤돌아보면서 현실을 직시해 보고자 한다.
의순공주 _ 족두리 묘의 전설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있는 한 야산, 이곳에는 볼품없는 초라한 무덤이 360년 전 조선 제17대 효종 때 만들어진 유서 깊은 무덤 하나가 있다.
그런데 이 무덤은 시신이 묻혀 있어야할 무덤에 시신은 없고 대신 족두리가 묻혀있다.
그래서 “족두리 무덤”이라 부른다. 그 사연은 금오동 마을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효종 때 금오동 마을에는 임금의 친족인 금림군 이개운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딸이 시집가던 날 금림군의 집안은 물론 금오동 마를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금림군의 딸이 오랑케인 청나라 구왕에게 시집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햔 사명감을 갖고 구왕과 혼인하기 위해 이 억 만 리 청나라로 행하게 되었다.
국경인 정주에 이르렀을 때 금림군의 딸은 가마에서 내려 마지막 고국산천을 돌아보며 부모형제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수행들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갑자기 벼랑으로 내달려 원수인 오랑캐 나라의 왕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벼랑 아래 강물에 몸을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수행원들이 황급히 벼랑 아래로 달려갔지만 그녀의 시신은 급류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고 강가에 쓰고 있던 족두리만 강물에 둥둥 떠 있었다. 족두리를 겨우 건진 수행원들은 족두리를 그녀의 가족에게 전해주자, 족두리가 딸의 시신인양 얼싸안고 오열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정주 땅 이 바라다 보이는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시신 대신 족두리를 묻고 장사 지냈다.
그런데 이 족두리의 주인공 금림군의 딸은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인 의순공주 이였다.
효종 1년(1650년) 3월 청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있던 내관 나업이 돌아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청나라 구왕이 아내를 잃고 병자호란 때 맺은 혼인조약에 따라 조선 왕의 딸을 후처로 요구한 것이다.
나업은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 왕의 딸이 몇 살이냐 물었는데 임시응변으로 두 살 밖에 안됐다고 말했더니, 그렇다면 종친과 대신들의 딸 중에서 신붓감을 보내 달라 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틀 뒤 청나라 사신단이 구왕의 신붓감을 뽑아 모내라는 국서가 공개되자 종친들과 대신들은 기겁을 했다. 그래서 대신들은 자기에게 지목될까 불안 떨며 저마다 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에 바빴다.
효종은 청나라 구왕과 국혼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것을 빌미로 청나라가 다시 침략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구왕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겠다고 자신해서 나선 사람이 바로
금림군 이개운 이였다. 금림군 이개운은 성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익양군 이봉의 증손자였다. 효종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먼 종친이었다.
금림군은 이 혼사문제가 빌미가 되 다시 나라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려운 결심을 한 것이다.
효종은 이에 안심하고 금림군의 딸을 청나라 구왕의 신붓감으로 낙점하여 그 명단을 청나라 사신에 보냈다. 신부 후보감 명단을 받은 청나라 사신단이 한양을 떠나려고 하던 날 청나라에서 또 다른 사신단이 들어오면서 구왕의 신붓감을 간택하여 함께 오라는 것 이였다.
사신단의 요구에 따라 효종은 예조에 명하여 간택날짜를 잡게 하고 구왕의 신붓감을 사신단에 보이게 했다.
금림군의 딸이 청나라 구왕의 신붓감으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조정대신들은 숨겨둔 딸 시집 보내느랴 정신이 없었다.
효종은 국혼을 앞두고 조정대신들이 앞 다투어 딸 시집보낸다고 질책하던 그날 세자의 혼사와 두 딸의 혼사를 한꺼번에 추진하는 그야말로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이 청니리 구왕의 신부로 간택되자 그녀를 자신의 “양녀(養女)”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나라를 구하는 의로운 일에 순순히 따랐다” 는 뜻으로 “의순(義順)”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공주직위를 내렸다. 또한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 이개운의 품계를 높여 주었고 그녀의 오빠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오랑캐 나라로 시집가는 의순공주는 병자호란이 일어 난지 13년 후 불거진 혼인조약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의순공주는 어떤 인물인가?.
청나라 관리는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사신단보다 먼저 청나라로 들어가 그 사실을 구왕에게 알리자 구왕은 흡족하면서 사신단이 들어올 때 의순공주 신붓감과 함께 오도록 명령했다.
의순공주는 용모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였고 기개 또한 남달라 후대도 회자될 정도였다. 의순공주 개인적으로는 어찌 오랑캐나라 왕하고 혼인하고 싶었겠는가 만은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친다는 충절과 또 아버지가 이미 결정한 문제를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임을 간파고 부녀간의 의를 지켰다는 인물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고 병자호란은 끝났지만 조선인들의 굴욕과 고통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한 60여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당시 한양인구가 30여만 명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끌려간 포로들은 수모와 학대, 추위와 베고픔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부지기 수였고 도망치다 잡히는 날엔 발뒤꿈치가 잘리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또 포로들은 심양 노예시장에서 짐승처럼 사고 팔리는 참담한 수고를 겪었고 특히 여성들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능욕당하고 저항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끌려간 포로를 귀환시키기 위하여 포로속환(贖還; 돈이나 물건주고 도로찾음)조약을 이끌어 냈지만 협상 때 정한 속환가까지 치솟아 속환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어렵게 조국으로 돌아온 포로들은 크게 환영받았으나 여자포로들은 환향녀(還鄕女)라 불렀고 환향녀란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고 더렵혀진 여자의미로 쓰여젔다.
환향녀로 돌아온 그들은 가문을 더렵혔다며 집안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쫓겨났으며 남편이 있는 환향녀는 이혼도 요구 당했다.
그러나 인조는 절개를 되돌려 주는 강이라는 뜻의 회절강(回節江)을 지정하고 그 강에서 몸과 마음을 씻은 환향녀는 과거를 묻지 말고 예전과 같이 대하라는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은 환향녀와의 이혼을 합볍화 해 달라고 요구도 했었으나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에 따라 환향녀의 이혼을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가 자제들은 환향녀의 부인을 두고 다시 장가들었기에 환향녀들은 평생 지고 가는 고통의 낙인 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손가락질 하고 멸시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의순공주는 나라를 위해 아무도 원치 않는 청나라 구왕과 혼인을 선택하고 패전국의 여인이 짊어져야할 고통을 혼자서 지고 이억 만리 눈물의 혼인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족두리 무덤의 전설대로 의순공주는 국경인 정주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던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청나라 구왕이 6만 명의 무리를 데리고 요동접경까지 의순공주를 마중 나와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족두리무덤 전설은 나라를 짓밟은 오랑캐 왕과 의순공주가 혼인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였다.
당시 39세였던 청나라 구왕은 16세 꽃다운 신부 의순공주의 미모에 첫눈에 반했다 한다.
의순공주의 남편 구왕은 청 태종의 이복동생으로 청 태종을 보좌하여 병자호란 때 조선에 왔으며 그 후 청나라 통치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구왕은 청 태종이 죽자 태종의 아홉째 아들 순치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왕의 섭정자리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다.
청나라에서 의순공주는 의지할 사람이 오직 구왕뿐 처음에는 구왕을 증오했으나 점점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부 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혼인한지 7개월 만에 구왕이 사냥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는 변을 당한다. 불행은 거기에 끝이 아니였다. 구왕이 죽고 나자 그의 정적들이 구왕이 섭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자리를 찬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여 황제 순치제로 하여금 부관삼시 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또 구왕의 재산을 몰수하고 의순공주를 비롯한 구왕의 여인들을 제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순공주는 백양왕의 아들인 “보로” 란 자에게 넘겨졌다. 보로와 인연 맺은 1년 만에 그 또한 세상 떠나고 말았다.
의공주는 혼자서 이국땅에 살았는데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이 딸의 고통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청나라 산신을 자청하여 청나라 황제 순치제에게 의순공주를 고국으로 되돌려 보내달라는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순치제는 의순공주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그녀는 고국 떠난지 6년만에 되돌아 왔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의순공주 역시 오랑캐에게 절개를 잃은 환향녀일 뿐 이였다. 사람들은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이 물욕 때문에 딸을 청나라 에 판 파렴차한으로 취급했다.
만약 의순공주가 청나라 구왕과 혼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또 어떤 변고를 차렸을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라위기 앞에 딸들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조정대신들은 의순공주를 청나라에서 다시 데려온 금림군을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효종은 조정대신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어쩔 수 없이 금림군과 그와 함께 간 일행들을 삭탈관직 했다.
의순공주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와 그 일행들이 삭탈관직 당하자 고통과 나락으로 떨어져 세상하는 의욕마져 없어졌다.
그래도 자신을 유일하게 아껴주었던 구왕을 사무치도록 그리워 하다가 그녀는 28세 한참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았던 병자호란 이후 슬픈 비사를 읽고 나서 무적이나 마음이 씁쓸했다.
이토록 전쟁에서 지거나 나라가 망하면 우선 남자들 보다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여인네들 일진데 지난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 자신의 트위터에 올려 만방에 고하는 27세 “막말녀”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다시 이 나라가 병자호란 같은 변란으로 막말녀가 오랑캐들에 잡혀가 온갖 수모 다 당하고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다면 그녀는 또 어떤 말로 나라와 국민들을 원망할까?.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공사 도중에 진보 좌파들과 실랑이를 벌리고 있는 지금 이 때 중국에서는 제주도 남쪽 이어도 해역이 자기들 배타적 경제수역에 들어간다며 이곳을 해양감시선 정기 순찰지역에 공식 포함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핵항공모함까지 띄우며 자기네들 경제수역을 지키겠다고 나서면 우리는 과연 남쪽향군기지 조처 없이 어떻게 이어도를 포함한 영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 모두가 한심하고 한탄스러운 작태일 뿐아더,
역사에서 보건데 힘이 약해지면 반드시 외적이 침입했고 오늘날에도 국가가 국력이 약해지면 경제적 지배는 물론이며 영토까지도 침범을 당하는 일은 지난 역사를 통해서 답습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어찌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겉으로는 생각하는 척 하면서 자신들이 당리당론에 따라 국가를 자꾸 위기로만 몰아가는지 모르겠다.
과거 조선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 조정의 대신들은 나라의 국익은 뒷전이고 자기 몫이나 챙기는데 급급하던 역사적 기록을 보면서 오늘날 본인은 물론 자식들까지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 다 부리는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국회의원 이며 정부고위 관리들이의 처사를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다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게 되었다.
국가통치를 위임받은 대통령은 하루 빨리 국민적 갈등을 빚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사건들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다스러 주길 바랄 뿐이다.
나는 지금 젊은 막말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지가 인생을 얼마나 살아봤다고? ‘
2012. 3. 11. 금 치
첫댓글 오랫만에 글 올려준 금치, 반갑습네다.
의순공주이야기와 환향녀 이야기 재밋게 읽었어요...
금치님 해박한 역사지식의 뒤안길 맛나게 동행 했읍니다.
서울가면 감사한 맘으로 식사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슴니다.
계속하여 좋은글 부탁 합니다.//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