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식 날이면,
경기도 덕소 양지바른 자리에 모신 어머님 묘소에,
가족일가가 모여 앉아 정성 드려 차례 올리고,
제수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 받으며,
또 한번의 봄을 느껴 보는 것이,
벌써 17년째 이어온 우리가족의 봄철 연례행사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한식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다른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실은 묘를 쓰고 17년간 지내오다 보니,
조금은 벗겨지고 갈라진 묘소를 지난 3월에 인부 써서,
정리하고 잔디도 새로이 입히는 행사가 있었고...
그때 약식으로 차례도 모시다 보니,
이번 한식에는 성묘 생략하고,
입하 때나 와서,
잔디도 보고 차례도 올리자는 것이 가족들의 중론이었습니다.
그 덕에,
모처럼의 사흘 연휴를 말 그대로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빼내올수있었습니다.
어디로 한번 가볼까?
나의 제안에 세 아이들 응석과,
남편 뒷바라지에 지쳐 있던,
아내가 불쑥 내놓은 제안이 부산이었습니다.
부산...
젊은 시절의,
염세와 실존...
그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객기와 일탈과 방황...
그리고 아련한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이 엉켜져,
하나로 형상화시키기 어려운 추억으로,
나의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곳...
자갈치의 비린 생선갯내음과,
광복동의 포스트모던함의 환락이 뒤엉켜,
어색한 부조화의 조화를 강요하는,
우리시대 한국의 혼돈을 고스란히 싸 안고 있는 곳,
편안함과 어지러움이 공존하는 곳......
그래 그리 가보자.
고속철도는 매진이었습니다.
며칠만 서둘러 예매했더라도,
자리를 구할 수는 있었을 터인데...
워낙 늦장부리다가,
허겁지겁 서두르다 보니,
개통초기의 고속철도 표를 구하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해서...
사는 곳이 경기 남부,
수지지역이다 보니,
에라 조금만 서둘러,
내차 끌고 가보자,
막히면 얼마나 막힐 테냐...
이런 심산으로,
토요일 오후 큰놈 학교 마치자마자,
무작정 핸들 잡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수원 인터체인지 나서자마자,
아니나다를까,
경부고속도로는,
이미 경부공용주차장이 된지 오래인 상황이었습니다.
급기야,
세상살기에 나보다는 훨씬 모험적이고 겁 없는,
제 아내가 중대한 제안을 저에게 던졌습니다.
-그냥 버스 전용차선으로 튑시다.
-안돼...
-아니 왜 안 되요.
-글세 안 된다니까...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인내심 약한 저도,
아내의 제안을 따르고 말았답니다.
그대신 이것만은,
이해해 주십시오.
차로 위반 범칙금 안 내려고 곡예운전하며,
차로를 넘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내리 버스차로로 달려 버렸습니다.
국가기간도로의 대중교통망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정체를 가중시킨 죄로,
내 벌금은 의당 감수하겠다.
그러나 국가재정에 폐해를 끼치는,
파렴치한은 최소한,
되지 말자는 것이,
저와 제 아내가,
합리화한 버스전용차로진입죄의
그나마 얄팍한 명분이었습니다.
그날 밤...
해운대는 여전히 불야성이었습니다.
어릴 적,
벌써 30여년전에,
코흘리개 시절,
부모님의 손을 처음잡고 왔던,
그 시절에도 해운대는,
불야성이었습니다.
그리고 20대,
불면의 아픔으로 자존을 찾겠다며,
의식의 번민을,
방황으로 달래며,
헤매던 그 시절의 해운대도,
마찬가지로 불야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제,
세 아이의 아비가 되어,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세 아이의 내일을 염려해야 하는,
볼품없는,
40대 중반의 이 나이에 다시 찾은,
이 시대의 해운대도 불야성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회 한 접시,
쓴 소주 한잔에,
취기 오른 아비의 소회를 알기나 할지...
아니면,
지금은 고인이 된,
지들의 할머니와의,
첫 번째 해운대에서의 어렴풋한 추억을 되새기는,
아비의 마음을 또 알기나 할지...
이것이,
40여 년 살아온 한국에서의,
정을 정리하고,
또 정을 떼어내는 통과의례 중 하나라는 것은,
또 알기라도 하는지...
앞으로 30여년후에도 저놈들은 지 아비가,
이곳에서,
지 아비의 부모와의 추억을 회상하듯,
지 아비를 회상할까?
아니면,
저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앞으로,
이 바다,
이 땅,
이 땅의 사람들은,
아예 잊혀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두렵기도 하고,
착잡하기도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내가 저 아이들에게...
과연 이 땅에서의 면면한 연고와,
끈질긴 뿌리와,
정체성을 빼앗을 자격이 있는가...
단지 아비라는 이유만으로...
또 생존경쟁이 치열해서,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는,
너희를 키우고 싶지 않다는,
변명만으로...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정말 심란해지는 해운대의 밤...
그 심란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내의 성가신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통음하기 위한 많은 술이 필요했습니다.
원래 C 아무개 국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광고대행사출신이고,
한때 장래가 촉망되던 광고인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잘 나가기 위한 광고인은,
몇 가지의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예리한 판단력과,
죽어도 타협할 줄 모르는 소신과 추진력...
여기까지는 말 그대로 광고 교과서에 나오는 교과서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말,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는,
소신과 추진력은,
집안 장롱 속에 꼭꼭 숨겨두고,
능수버들 같은 융통성과,
간교한 야합이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최소한 1년에 한두 번은 말입니다.
외람된 표현이나,
이 C국장과,
저에게는 이런 적응력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런 점이,
아직도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5년이나,
되신 C국장이 간혹 가다,
저에게 그 힘든 발음으로,
멀리 부산에서 전화를 하시고,
저는 몸둘바를 몰라,
죄송해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동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부산나들이를,
생각하기 며칠 전에도,
그분 전화가 있었습니다.
-잘 지내십니까?
_아 예 국장님 죄송합니다.
-뭐가 잘 있으면 되지......
오 년 이상 직장선배인 이 양반은,
아직도 제게,
여느 다른 경상도사나이들처럼,
하대를 하지 않고,
존대를 50퍼센트 이상으로 유지하며,
그 점이 제가 그분 앞에서 더욱,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산 방문 전날에 전화를 드렸었습니다.
-제가 내일 부산에 가는데요, 국장님.
-아 그래 숙소는 어디십니까?
-해운대인데요, 어디서 뵐까요......
-무슨 소릴, 부산까지 오는데 내가 가야지.
해운대 P호텔에서 뵙시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한시였기에,
오전 시간,
우리 식구들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단란한 시간을 지냈습니다.
작년에 보고 온 멜버른의,
비치가의 밀리온짜리 저택 가를 연상하게 하는,
달맞이고개의 드라이브코스......
이런 곳이라면,
외견상 호주생활 부럽지 않겠다는,
잠깐의 혼돈도 겪어보며...
또......
기장근처 바닷가의 대찰에서,
앞날의 무운도 빌어보며...
약속시간에 넉넉히 앞서 기다리던,
우리 부부의 침묵을 깨고,
아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왜 늦으시죠......
-글세......
그런데......
그 이유를 아는 데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도 무심했던 놈이구나......
내가,
정말 형편도 없는 놈이었구나......
뇌졸중이 어떵 병인데......
사지 멀쩡하게,
거동하는 C국장을 기대하고 있었더냐......
호텔로비를 들어선,
C국장......
한 손은 마비를 이겨내기 힘들어 모든 손가락이 경직되어 접혀있고,
한 쪽다리는 마비되어,
절름거리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한사코 마다하는 선배를,
모시고,
광안대교를 건널 때...
-여기가 광안대교야,
부산에 왔으니,
새로 생긴 이 명물도 한번 타보고 가셔야지......
저는 식사 중에는 저의 아내 때문에 차마 여쭐 수 없었던,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따님이 이제......
-아 그 아이,
-지금 한국에 없어요...
-지에미하고 나하고 헤어지고 나서 지 에미가 유학 보냈다지...
-나도 나중에야 알았지......
정말 죄송합니다.
C선배......
어렴풋이는 짐작했지만......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몇년전에......
-정말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서울에 있는 친구 놈 하나한테,전화를 한번 했지...
-사람 죽어 촛불 두 개 켜고 최소한으로,
-장례 치러 화장하면,69만원이 든다데...
-나, 정말 버티기 힘들어,
-가려 하니,
-네가 좀 처리해 주라...
-그게 내일일지,
-좀 기간이 지난 후일지 모르나...
-그래도 네가 내 친구아이가...
- 내가 갈 때,
_베개 밑에 100만원,수표는 한 장 두고 갈 테니...
-나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운동도 좀하고,
-절에 가서 스님들도 만나,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
.
.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해운대에서 다대포는,
부산의 끝에서 끝이었습니다.
그 거리를 다리 절며 찾아오게 한 선배에게,
저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후배였을지 모르나,
저 자신에게,
저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나약함이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서둘러 돌아오는 경부고속도로상행선......
휴대폰 벨이 울렸습니다.
-김국장 나요......
-아예......
-저기 김국장은 일본어를 할줄아니까......
-부탁이 있는데......
-내가 요즘 일본문화에 대해서 좀 배우고 있는데...
-볼수록 재미 있거든......
-일본의 엔까말이요......
-그 정서를 보니까......
_우리하고 비슷한 게 많아......
-애절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정서적인 게......
-그래서 일본 자료 중에 김국장이 도와줄 수 있다면 그런 노래나 자료 좀......
-예 그리 하지요......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주로 이민 간다는 말에,
이제 3-4개월 후에,
떠날 거라는 말씀에...
-이제,
-내 평생에,
-김국장 얼굴 다시 보기,
-어렵겠구먼...
이렇게 되뇐 당신인데......
어찌,
당신 베개맡에,
소일거리 이야기책 몇 권과 테이프 몇 개 못 보내드리겠소.
.
.
.
이렇게 우리가족의,
봄나들이가,
끝났습니다.
계절이면 어김 없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벚꽃이지만,
해운대,
끝자락의 달맞이 고개에 만개한 벚나무의,
아름다움을,
곱씹어 알려주고,
이 땅에서의,
주인으로의 마지막 봄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 놈의 강아지들은,
뒷좌석 시트에서 난장판을 벌이다,
피곤에 지쳐 골아 떨어지고...
어느새 우리 가족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백일 남짓을 위해,
마지막 톨게이트를 지나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 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조건,
사회적인 조건들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정신적인 부분들을 정리해가는 것이 더욱 힘겨울 듯합니다.
그래도 헤쳐 나가야겠지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듭니다. 한창시절을 치열하게 사셨던 분들에 대해, 또 이렇게 세월에 밀려가는 저 자신을 보며 저도 요즘 한동안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상황은 틀리지만 이땅에서 해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놀이들을 다시금 하나씩 해보고 있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그냥 울었습니다. 왜 코가 져려오고 눈물이 나는지 머리 속에 휙휙 지나가는 그리운 이들이 생각납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지나간 과거들이 넘 그리워집니다. 형님...넘 슬퍼요..훌쩍
아...눈물이납니다. 한없이...
내 고향 부산이 어떤이들에겐 격동의 역사를 안고 있었군요. 해운대, 광안리, 자갈치, 다대포...저의 홈그라운드.... 그중에 해운대는 정신적인 고뇌를 채우기엔 좀 산만한 곳이지요. 부산의 명소는 그냥 바다입니다. 그것이 어딜 끼고 있던, 생선 썩은 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곳이던, 자갈치 상인들의 거친 입담이 눈살을 찌푸려도, 석양이 미칠듯이 아름다운 다대포의 풍경을 안은 바다, 계절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모두 안고 있는 태종대, 천국의 문을 지나는 거 같은 신비감을 주는 광안대교..^^ 묵은 일기장을 뒤지다보면 그땐 미처 몰랐던 감정들이 새록새록 하실거 같습니다. 지난 추억이 현재의 삶을 잘 지탱해주는 힘이 되시길..^^
잘 읽었습니다.
짠~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을 애리는 느낌..... 삶의 전장에서 살아가는 쓸쓸한 한가정의 가장과, 새로운 둥지를 찾아가려 기존둥지의 때묻은 기억을 못내 아쉬워 하는 그래도 행복한 가장과의 끈끈한 정,.......한편의 수채화 같은 깨끗함속에 깊이가 있는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달필이십니다..가슴에 글귀 한줄한줄 와닿는군요..
부부가 어쩜 그리 글을 잘 쓰시나요.., 광고인 답읍니다.., <- 철자법 맞나? ., 능수버들 같은 융통성과, 간교한 야합.., 이라.. 참으로 멋지게 함축된 말입니다. 그런걸 잘해야 출세하는데..
킬리만자로님은 너무 정이 많아 탈입니다. 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덕보고 있는 저야 좋지만 세찬풍파 이겨내시려면 좀 독해지셔야 되는데.. 정이 많은 사람은 왕왕 실속이 좀 없다는게 정설 이지요? 근데 문제는 아주머니께서도 똑같다면서요? 어쨌든 항상 변함없는 두분 모습 존경스럽고, 곧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