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을 다니다 들어간 소학교, 그나마 병으로 휴학도 했었기에 소년 정주영은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소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공부는 늘 상위권이었지만, 최대의 희망이었던 소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은 접어야만 했다. 사범학교를 들어가야 선생님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사범학교에 갈 돈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평생 농사밖에 모르던 아버지의 완강함 앞에서는 언감생심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맏아들이었던 정주영이, 동생들을 분가시킬 책임을 지려면 부지런한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분이셨던 것이다.
소학교 졸업과 동시에 고된 농사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주영은 평생 이렇게 땅만 파고 살아야 할 앞날이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늘 씨를 뿌리면 그 다음날 누렇게 익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하면서 잠들었다가, 다음날이면 싹조차 보이지 않아 실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농사 외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통천은 전국에서 눈이 제일 많이 오는 고장이었다. 눈이 한번 내리면 1.5미터쯤은 보통인데 눈이 쌓여도 녹기 전에 또 내리니 긴 겨울은 눈 속에 묻혀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게 된다.
흉년 뒤끝이면 이 눈오는 긴 겨울을 아침에는 밥을 해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먹고 지내야 했다. 문자 그대로 조반석죽이었다. 낮 동안 배고픈 것을 견뎌내야 하니까 아침에는 밥을 해먹었지만 저녁에는 배고파도 자면 그만이니까 죽을 쑤어 먹는 것이다. 밥이래야 흰 쌀밥이 아니고 조밥인데다가 죽은 대부분 콩죽을 쑤었다. 봄이 되면 양식도 다 떨어져서 그때부터는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농촌이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는 데도 총독부의 압제는 나날이 심해갔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만주로, 북간도로 떠나가는 것이다.
@ 첫번째 가출
정주영도 농촌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소년 정주영을 부추긴 것은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동네 구장 집에 배달되던 동아일보가 큰 역할을 했다. 신문도 귀하던 시절, 어른들이 돌려가면서 읽은 후 마지막에 얻어 읽는 동아일보에는 춘원 이광수의 『흙』이 연재되고 있었다. 순진하기만 한 시골 소년에게는 그것이 지어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매일매일 적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엉뚱하게도 그 주인공처럼 변호사가 되어 도시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년 정주영이 나중에 서울에 올라온 후엔 독학을 하면서 보통고시에 응시하기도 했었다. 비록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그때 공부한 법률지식은 오늘날까지, 외국에 나가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특별히 법률고문을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큰 도움이 되었다.
소년 정주영은 구체적인 가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청진, 나진 지방에 제철소와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철도 공사도 벌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다. 공장이든 공사판이든 찾아가 보자고 마음먹은 정주영은 같은 마을의 지주원이라는 친구와 함께 길을 떠났다. 학교를 정주영보다 먼저 졸업한 지주원은 정주영보다 서너 살이 위였고, 마을에서는 비교적 깬 사람이었다.
음력 7월, 늦여름이라 농사일도 좀 한가해진 때였다. 저녁을 먹고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집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각각 47전의 노자를 주머니 깊숙이 간직하고 무작정 산길을 내달렸다. 날이 밝으면 금방 발각이 날 터이니 밤에 떠나서 밤새껏 산길을 따라 되도록 멀리 달아나자는 심산이었다.
@ 철도 공사판 품팔이
47전의 노자 돈은 비상금으로 간직한 것이었으나 배로는 나흘 거리요, 걸어서는 보름이 걸리는 천리 길인 청진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간 기착지로 삼은 원산이나마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통천에서 원산까지는 1백50리 길, 원산에는 전우학이라는 소학교 동창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먼저 편지를 써두었기 때문에 원산에만 도착하면 그 다음에 청진까지는 길이 있겠지 하고 생각되었다. 전우학이란 친구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시계포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 가면 재워주고 먹여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산만 다리 위에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주인의 허락을 받고 나온 친구의 행색을 보고 정주영은 낙심하고 말았다.
그의 초라한 몰골로 보아 청진까지의 길에 도움을 얻기는 애당초 무리였던 것이다. 정주영은 이때 처음 도시에서 노숙을 하며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다. 그때 그는 반드시 성공해 보란 듯이 살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잠이 들어야 했다.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던 정주영은 중간에 철도 공사판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두 달 남짓 일을 했을까. 밥집에서 먹고 자면서 손수레로 흙을 나르는 일이었다. 성인들도 힘든 일이었기에, 어린 소년들에게는 더더욱 힘이 부쳤다. 그나마 품삯이 45전인데 밥값이 32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 오는 날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밥값이 더 많이 밀려 떠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추석 무렵, 수소문 끝에 찾아오신 아버지에게 이끌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이번엔 서울로
아버지에게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여전히 가출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다음해 봄이 되자 다시 동네 친구 두 명과 함께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간 기착지로 삼았던 친구의 집에서 한 녀석은 붙들려버리고, 둘만이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지친 다리를 쉬고 있던 어느 길가에서였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한 신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들 어딜 가느냐?”
“공부를 할 요량으로 서울에 가는 길이지요.”
대답을 들은 그 신사의 말인즉, 서울이 아무리 큰 도시지만 사람이 넘쳐나는 곳인데, 촌무지랭이들을 누가 취직을 시켜주겠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요리사인데 금강산에서 제일 큰 요릿집에 불려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면 그곳에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래서 정주영과 친구는 그 신사를 따라가기로 했다.
금화에서 단발령이라는 고개만 넘으면 금강산까지는 하룻 길이었다. 일행 셋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 신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때문에 숙박비 모두를 정주영 일행이 내게 되었다. 그 신사는 겉모습만 멀쩡한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서울을 향해 걷기 시작했지만 또다시 아버지에게 붙들려 오고야 말았다. 금화에 있던 둘째 할아버지 댁에 들른 것이 불찰이었다.
@ 소 판 돈을 훔치다
다시 잡혀 왔지만 농촌을 떠나서, 일한 만큼 벌 수 있는 곳을 찾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는 부기학원 속성과에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 더해졌을 뿐이다. 평양에 무슨 부기학원이 있는데 속성과 6개월을 졸업하면 취직을 보장한다는 선전문을 아랫동네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달걀을 팔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돼지를 키워서는 시집ㆍ장가보내고, 소를 키워서는 논밭을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주영의 집에서도 소를 키우고 있었다. 정주영의 아버지도 소를 키워 판 돈으로 동생들을 분가시켜왔다. 소는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것이다.
마침 집에서 기르던 소가 팔려나갈 때였다.
정주영은 아버지가 궤짝 속에 넣어둔 소 판 돈을 훔쳐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평양에 부기학원이 있는데 서울에는 없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와서 그 돈으로 덕수궁 옆에 있는 부기전수학원에 등록하고 분개(分介)하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한 정주영 앞에 20일쯤 지나자 다시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평양까지 갔다가 허탕을 친 후 ‘서울에 가면 이런 데가 있으니 거기로 가보라’는 평양 부기학원측의 말대로 서울에 와서 정주영을 찾아낸 것이다.
이번에는 죽어도 안 내려가겠다고 버텼지만, 엄하시기만 하던 아버지의 통사정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내려온 정주영은 이듬해까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부지런히 일해서 동생들 세간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흉년이 들고 말았다. 세끼 밥먹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 경일상회의 주인 정주영
정주영은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서울에 가서 성공하고 만다는 마음을 먹고 다시 고향을 떠났다. 19살 되던 해 늦은 봄, 오인보라는 친구와 함께 다시 한번 서울행 차를 탔다. 찻삯은 벌어서 갚는다는 조건으로 오인보가 빌려 주었다.
서울까지 온 다음, 객지에서 막일을 할 판인데 둘이 같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니 안보는 것이 낫겠다고 합의를 해서 오인보는 서울에 남고 정주영은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부두의 하역 일은 물론이고 막노동 일은 무엇이든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쪽 노동일도 불안해지자 얼마 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정주영은 여기저기 불안한 막일꾼 노릇을 하던 끝에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쌀 한가마니 값되는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는 그 집에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했다.
복흥상회에서 열심히 일을 한 지 3년쯤 된 어느 날, 가게문을 닫겠다고 마음먹은 주인 영감님이 정주영에게 말했다.
“자네는 배달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었으니 그대로 가게를 꾸려가면 어떻겠나?”
정주영의 나이 스물세 살,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싸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서울여상 기숙사와 배화여고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어나가던 정주영은 황해도 연백 등 쌀 산지에서 쌀을 수집해다가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했다. 이때 경일상회의 수익금으로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살 정도였으니 꽤나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쌀 배급제를 실시하게 되어 경일상회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