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7-1-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菩 提 薩 陀
보 리 살 타
보살은
여기서는 보살은 곧 구경각을 이루어 일체종지를 증득(성불)할 모든 이들을 일컬음으로 보아도 옳다.
[보리(菩提)는 범어를 한자로 음역하면 보(뎨)제이나 쉽게 모지 또는 보리라 발음하고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이다.
보리는 깨달음, 살타는 중생이란 뜻이다.
중생이 깨닫게 되면 부처님이요, 보살인 것으로 보살은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즐기지도 않는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원력으로 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물건도 취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소승의 근기요,
한 물건도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대승보살심인 것이다]
依 般 若 波 羅 密 多 故
의 반 야 바 라 밀 다 고
밝은 지혜로 인하여 깨닫게 되었으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재설명이니 생략한다.)
心 無 가 碍
심 무 가 애
반드시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고
[여기에서 마음(心)이라고 하는 것은 여여부동한 절대 당체인 마음(본성)이 아니라 작용하는 마음(성품)이다.
깨닫게 되면 본체의 마음(응무소주)인 공한 묘공을 체인하게 되므로 괴로움을 여의게 되어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므로 실은 걸리고 아니 걸리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는 것과 행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8만4천 법문을 모두 외우고 꿰뚫어 이해하며, 모든 조사 공안에 막힘이 없다 해도 걸림 없는 해탈 경계가 아닌 중생(범부)일 뿐인 것이다.
일체의 경계와 일체의 법과 일체 행동함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작용하는 마음이 일체 법과 일체 경계와 일체 행동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술 파는 집을 가르쳐 주는 과보로 5백생 동안 손가락 없는 과보가 두려워, 계를 지키려고 꼭 필요한 자에게 알고도 가르쳐 주지 않거나 또 술을 마시는 자를 욕하고 미워하고 비방한다면 오히려 금주병에 걸린 자가 되는 것이요,
그렇다고 술을 먹기 위한 구실로 곡차라고 하여 막행막식을 한다면 이것은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시고 안 마시는 데 걸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변견에 치우쳐 걸림이 있으면 그것은 불법이 아닌 것이다.
불법을 깨침은 대자유 대해탈이 구경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대대가 없으니 걸릴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어,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참공(진공)을 깨친 경계가 아니요 진아를 깨달음이 아닌 것이다]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게 되며,
잘못 뒤바뀐 꿈같은 망상을 멀리 여의게 되어
본래 공적한 가운데 나고 죽는 것이 없음을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체인하여 마음이 바로 허공계와 다르지 않고, 일체가 허상인 것을 깨닫고 마음(자성)이 영원 불멸하고, 내외가 명철한 것을 요달하여 알게 되면 자연 두렵고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없으매 나 아닌 것도 없어 두려움이 생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식인 자아를 참나(진여)로 착각하여 망상에 붙잡혀 업신을 애착하여 없는 죽음에 매여 끄달릴 때 두려운 생각이 생기고, 집착으로 탐진치가 생기는 것이다.
현상계의 덧없는 한정된(無常) 상대적인 물질현상인 자아(업신)를 참(진실함)으로, 실상을 혼동하여 알았고, 항상한(有常) 참나(자성)는 범부의 눈으로 가려 보지 못하여, 절대존재인 영원불멸의 참나의 존재와 업신의 거짓 나를 마치 꿈을 꾸듯 뒤바꿔 생각하여 믿지 않던 실상을 꿰뚫어 보아 공적영지한 것임을 깨달음으로써, 걸림이 없으니 두려움도 멀리 여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상을 확인하지 못한 범부들은 무상(無常)한 환과 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계는 믿으려 하거니와 불멸의 항상(恒常)하는 자성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해 업식의 사대육신과 오온이 영원한 참 나로 잘못 알아 참 나인 자성(불성)의 실상을 잘못 헛된 꿈과 같이 뒤바뀌어 아는 것이다.
그러나 無常을 허무하다거나 허망하다고만 잘못 생각하여 좌절하거나 비관적으로만 생각하게 되기 쉬우나, 무상(無相)하다고 하는 것을 없다는 것이나 허무하다는 소견에 떨어져 염세적인 생각으로 이 생을 잘못 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상(無常)이므로 또한 가능성도 내재한 도리도 알아야 하며, 무상하기에 변전하므로 발전할 수도 있고 또한 업신이나마 사람으로의 이 몸 받았을 때 남은 생을 가치있게 수행정진 함으로써 항상 중생으로 머물지 않고 무상(無上)의 대도를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고정불변으로 항상하기만 한다면 노력할 필요도 가치도 없으며 부처님은 영원한 부처님으로 중생은 영원한 중생의 苦를 지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체가 무상(常)하여, 잘못 안 업식의 나 또한 무상한 것(自我無常)이므로 원만한 열반을 증득하여 불지에 오를 수 있으므로 창조적인 실천이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또한 있는 것이다.
◎ 미인을 볼 때 항상함이 아닌 허상인 것이며, 끝내 죽고 썩어 시체나 해골이 됨을 보고(알고)도 痴心이 생길 것이며, 참 죽지 않는 줄 확실하게 믿는다면 죽음이 두려울 것이며, 새 옷을 분명히 줄 것을 확신하면서도 헌옷(업신) 벗기를 두려워하랴.
업(業: 업장이라고도 하며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선악의 행위로 因하여 제8식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지는 것)으로 현세에 결과로 받게 되는 것을 업보 또는 응보라 하며 이것을 과보라 하는 것으로 이것에 끄달려 뒤바뀐 생각에 집착해 살며, 허상인 현상을 실상으로 착각한 꿈을 깨어서 공적영지한 실상을 깨쳐 보아 일체법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무상한 허상임을 체인하여, 지금까지 고통을 즐거움으로 생각했고, 실상 가운데의 참낙(樂)을 알지 못하고 뒤바뀌어 스스로 속았던 꿈에서 깨어나듯 바로 깨달아야 한다.
중생이 깨치지 못하여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업신인 거짓 나에 애착하고, 그 업에 끄달려 다니며 탐진치로 인하여 생긴 업으로 받은 과보로 다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업은 몸으로 짓는 세가지 신업과 입으로 짓는 네가지 구업과 생각으로 짓는 세가지 의업이 있다.
◎ 전도몽상에 대한 설명을 더하고자 한다.
중생이 이 육신(업신)의 내가 살아 가는 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이, 진성(우주법계를 구족한 자성)의 깨끗하고 참됨에 의해 하고싶은 대로 바르게 행하고 뜻대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뒤바뀐 꿈같은 삶인지도 모르고 업보에 따라 신기루처럼 허상인 형상에 끄달려 살고 있으니 꿈을 깰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참나의 자유로움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이것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인 것이다.
이를테면 TV속의 드라마가 마치 실상인 것처럼 끄달려 안타까워하고 잠시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나, 그것은 거짓 나인 업신(극작가)의 그리는 꾸밈(업)에 따라 활동하고 있었으나 그 활동은 참나가 아니어서 영원하지 못하고, 드라마(업의 그림자)가 끝나면 잠시 있었던 것은 실상이 아니었으므로 화면의 그림자는(이 생) 사라지고 그 배우(업신)도 또한 그려지는 다른 드라마{업의 과보로 받은 내생(중생심)의 세계)}에 출연하여 극작가(업)의 그림에 따라 끄달리므로 그 틀을 벗어나 피안(불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차안(此岸)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과 같아, 꿈도 그러하고 나아가 중생 삶인 이 생도 그러하여 업신에 매여서는 영원히 그 윤회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나, 이 허상의 꿈을 깨게 되면(대오견성) 실상으로 보았던 것이 잘못 알았던 환이었음을 깨닫고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걸림없이 자유로워 윤회의 苦를 벗어나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여 행동하거나 고요한 삼매 가운데이거나 차별 없이 같아 항상 고루하게 되는 것)하게 되는 것이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