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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4. 원명정사 법문.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37. 남양 혜충국사
혜충국사가 어느날 시자를 부르니 시자가 응답을 했다.
이와 같이 세 번을 부름에 세 번 응답하자
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저버린다고 여겼더니 네가 나를 저버렸도다”
하였다.(장사를 헛했도다)
혜충국사는 6조의 법을 이은 분이다.
혜충국사가 어떤 僧이 “어떤 것이 이 본신인 노사나입니까?”하고 물으니, 혜충국사가 말씀하시기를“나에게 깨끗한 물병을 가지고 오너라.”하니 僧이 물병을 가지고 오자 혜충 국사가 이르기를“도로 전에 있던 곳에 가저다 두어라.”하니 僧이 물병을가져다 놓고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이 본신인 노사나입니까?”하자 혜충 국사가 이르기를“옛 부처님 지나가신지 오래 되었느니라.”하였다.
강설: 옛 부처 지나간 곳을 보았는가? “!”
이것을 이책강의를 한 스님이 “사께서 ‘고불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교리적인 답변은 아니다. 선의 차원에서 답변한 말이다” 했는데 - 선지로 답한 것이라는 뜻을 모르고 “고불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답했다 하니 오히려 법을 그르친 것입니다)
혜충 국사가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이 일념상응(계함-합해짐)입니까?”하고 물으니 이르기를“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리면 곧 상응이니라.”하니 僧이 말하기를 “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까?”하자 혜충국사가 이르기를“잊어버리면 곧 없고 없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僧이 말하기를 “없으면 곧 없다고 말함이니 어찌 부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혜충국사가 이르기를 “없는 것도 또한 공이고 부처님도 또한 공이다. 그러므로 ‘없는 것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하였다.
강설: (한생각 일으키면 멀어지니라)
“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까?”(보는 것이 부처니라)
(여기서 그 스님이“일념상응은 의식적인 기억과 또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두가지를 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곧 열반과 같은 자리이다”했으나 - 옳지 못한 것이니, 일념상응을 혜충국사는 평등진제의 답으로 한 것이나 일념은 일념 그 자체가 생각을 일으킴(用)이므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두가지를 다 잊어버린다는 것으로 잘못 알면 안되는 것이니, 반야지혜의 작용이 본성반야와 둘 아닌 것으로 계합한 그 본성처를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없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이 없는 진공 진여임을 알아야 한다)
(또 “반야심경에 없다는 無가 많이 나온다. 없는 것이 부처이고 부처가 없는 것이다. 조주스님은“개가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때 “없다”고 답했다. 그 화두가 ‘無’자 화두다” 했는데
조주스님의 “無”라 답한 불성을 없음으로 안다면 크게 모르는 소치요, 어림없는 소견이니 조주스님이 말씀하신 無자 화두의 뜻을 알려면 조주스님의 뱃속을 들어가야 하니라)
혜충국사가 숙종황제가 희극을 보기를 청하자
이르기를“어떠한 몸과 마음이 있어 희극을 보는 것입니까?”했으나 다시 청하자“무던히도 희극을 좋아하는 구려”했다
강설: 보는 것도(주)공하고 볼 것(객)도 공한데 상에 끄달려 희극(허망)을 하는 도다.
혜충 국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맞지 않다. 남방 지식들의 설법은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하며 반은 불생멸이구나.” 스님이 말하기를 “남장의 지식들은 곧 그와 같거니와 모르겠습니다만 화상께서는 여기서 어떤 법을 말씀하십니까?”
또 혜충국사가 어떤 僧에게 묻기를
“근자에 어느 곳을 떠나왔느냐?”하니
僧이 이르기를“ 남방에서 왔습니다”하자
“남방에 있는 지식들이 어떤 법으로써 보이느냐?”하니 僧이 이르기를“남방의 선지식들이 다만 말하기를‘하루아침에 풍화(팔풍)가 흩어진 후에 뱀이 허물을 벗는 것 같으며 용이 뼈를 바꾸는 것과 같아서 본래의 참 성품은 완연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더이다”하자
혜충국사가 이르기를“맞지 않다. 남방 지식들의 설법은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하며(색신) 반은 불생불멸(법신)이로다”(둘로 보는 상견)하니 僧이이르기를“남방의 지식들은 곧 그와 같거니와 모르겠으니 화상께서는 여기서 어떤 법을 설하시나이까?”하자
혜충국사가 이르기를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음이니 몸(진여법신)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하니 僧이 이르기를“화상은 어찌하여 거품과 같고 눈홀림 같은 몸을 가지고 법체와 같다고 하십니까?”하자 혜충국사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사도에 들어갔느냐?”僧이 이르기를“어느곳이 이 제가(某甲)이 사도에 들어간 곳입니까?”하니 혜충국사가 이르기를“보지 못했느냐? 교에서 말씀하시기를‘만일 빛깔(색)로써 나를 보며 소리로써 나를 구하려고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사람이라 능히 여래를 볼수 없다’고 했느니라”했다.
혜충국사가 어떤 僧이“교에서는 유정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만 보이고 무정물이 수기를 받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현겁천불 가운데 어느 누가 무정 부처입니까?”하니 혜충 국사가 이르기를“황태자가 왕위를 받지 못할 때(중생심)에는 오직 한 몸(개아:자아)이나 왕위를 받은 후(깨친후)에는 국토(일체)가 모두 왕에게 속하나니(원융) 어찌 국토가 따로 왕위를 받는 것이 있겠는가? (무정물-불성이 자체에 없어 부처를 이룰 수 없는 무기임)
지금 다만 유정물이 수기를 받아서 부처님이 될 때 시방국토가 모두 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법신)이니 어찌 다시 무정물이 수기를 받는 것이 있겠느냐?”하셨다.
강설: 여기서 경에 “무정물이 성불해서 수기를 받는다고 하는 말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말은 경전에 없다는 것이다“는 것에“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고 스쳐 가는 것이다”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삿된 소견이다.- 무정물은 무기성이라 수기를 받을 것이 없는 유정의 각 가운데 일체각인 부처안의 부처의 나툼이요 작용임을 모르는 소치이다.
또 “중생이 성불할 때 시방국토가 다 비로자나의 몸이라는 것이다”했는데 - 중생이 성불하기 이전에도 온 우주가 비로자나의 몸(법신)인 것이며 중생이 성불하면 그러함을 요달 한 것이다. 또 유정물이 수기를 받아 성불할 때 무정물도 성불이 동시에 따라서 된다 한 대목도 맞지 않음을 알지 못한 말이요, 석가모니가 성불하심과 동시에 그 땅이나 모든 만물이 다 성불하는 도리에 의해서 석가모니가 계시던 가야산이 붓다가야로 되었고(붓다가야로 명명해 성지화 한것임) 필발라수도 보리수로 되었다(같은도리). 그래서 “유정이 성불할 때 무정도 따라서 성불한다는 것이다. 유정물과 무정물이 둘인 것 같지만 둘이 아니고 무정물도 성불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물이 성불할 때 무정물도 성불하는 것을 여기서 밝히는 것이다” 했으니, 이렇게 법을 그르침이 심할 수 없도다
혜충국사가 영각이란 승이
“발심하여 출가한 것은 본래 부처를 구함이니 알지 못지하오니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증득(성불)하리까?”하고 묻자 국사께서 이르기를“마음을 쓰는 것 없는 것이 곧 성불함을 증득하는 것이니라.”하니 僧이 이르기를“마음을 쓰는 것 없다면 어느 누가 성불합니까?”하자 국사가 이르기를“마음이 없으면 스스로 이루나니(본래 이뤄진 것임) 부처도 또한 무심이니라.”하니 僧이 이르기를“부처님께서는 위대한 불가사의가 있어서 능히 중생을 제도하시나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느 누가 중생을 제도합니까?”하자 혜충 국사가 이르기를“무심한 것이 바로 참으로 중생을 제도한 것이니, 만약에 중생을 제도 할 것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곧 이 마음이 있는 것(상)이니 완연히 생멸(상견)이니라.”하였다.
강설:그스님은“혜충국사는 用心하는 것이 없게 되면 저절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했으나, 用心 이 없는 것이 스스로 부처를 이룬 것이며, 用心이 없음도 또한 분별, 상집의 작용을 이르는 말씀이니 용심이라도 반야작용이라면 이것은 부처의 작용이며 나툼이니 이런 경계에서 불성과 용심을 둘로 봐서는 않되는 것이니라)
혜충국사가 어떤 僧이“어떻게 하여야 상응해 갈수 있습니까?”물으니 이르시기를“선과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분별심이 없으면)면 저절로 불성을 보느니라(보는 것이 불성이니라). 또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을 일시에 다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가 해탈이니라.”하였다.
38. 하택 신회선사
한동자(신회)가 나이13세 때에 옥천으로부터 6조를 찾아와 참배하니 6조께서“선지식아, 멀리 오느라 고생이 많구나, 도대체 근본을 얻어 가지고 왔느냐? 만일 근본이 있다면 주인을 알 것이니 한번 말해 보아라”하니
동자가“머묾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며, 보는 것이 곧 주인이나이다”하자 육조께서“이 사미야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느냐?”하고 하시고 주장자로 세 번 내리치셨다.(중도,돼지도,사람도,부처님도 본다)
이에 신회가“화상께서 좌선 하시옵는데 보사옵니까? 보시지 않으옵니까?”하자
6조께서“내가 너를 때렸는데 아프냐? 아프지 않느냐?”되물으시니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나이다”하니
“나도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하자
동자가“어떤 것이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이옵니까?”하므로 “나의 보는 바는 항상 내 마음의 허물만 보고 다른 이의 시비와 좋고 나쁨을 보지 않나니 그러므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네가 말하는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한 것은 어떤 것인가? 네가 만일 아프지 않다고 하면 나무나 돌과 같은 것(무정물, 무기성)이고, 만일 아프다면 범부와 같아서 곧 성내고 원한을 일으킬 것이니(둘로봄) 네가 아까 말한 보고 않본다는 것은 곧 두갈래 극단이고(차별과 평등실상) 아프다(생) 안아프다(멸)는 것은 이것이 생멸이로다.(생각내고 안냄)
네가 아직 자성을 보지 못하고 감히 그런 희롱의 말(말장난:알음아리, 지식)을 하느냐?”하시니
신회가 예배하고 뉘우쳐 빌었다. 조사께서
“네가 만일 마음이 미하여 보지 못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을 것이요, 네가 만일 마음을 깨달았다면 스스로 성품을 보아서 법대로(무념,무상)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스스로 미혹하여 제 마음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게 와서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분별을 내는가)
나의 보는 것은 스스로 아는데(반야지혜) 어찌 너의 미함을(분별로 가려봄) 대신하며 네가 만일 스스로 본다면 또한 나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는데, 어찌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하시니
신회가 다시 백여번 절을 하며 허물을 사죄하고 부지런히 모시어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날 조사께서 대중에게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등도 없고 낯도 없거니 여러 사람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하시니
신회가 나와“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신회의 부처될 성품입니다”하자
조사께서“너에게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다고 했는데 네가 이제 돌연 본원이니 부처 될 성품이니 하니 네가 돌아가서 한 지방의 지도자가 되더라도 다만 하나의(그렇게 알음아리-지식으로 알면) 知解종도(무리)를 이룰 뿐이리라”하셨다.
강설: 영리하여 아는 것으로 말대답을 한 것을 경책하신 것이나 훗날 이분 하택 신회선사는 뒤에 조계의 돈교를 크게 넓히고 ‘현종기’를 지어 세상에 행하게한 큰 선지식이다.
이 현종기는 남쪽6조의 돈종과 북쪽 신수대사의 점종을 바로 잡으려한 것으로 무념으로 종을 삼고 지음 없음으로(무위) 근본을 삼으며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써 용을 삼으니, 무릇 진여는 곧 무념이니 능히 앎을 생각으로 하지 않고 실다운 상은 남이 없으니(진공) 어찌 육신의 5관으로 볼 것이며, 생각없는 생각(반야작용)은 곧 진여를 생각함이요, 남이 없는 남은(무생생)곧 실상이며 머묾 없는 머묾은 항상 열반에 머무는 것이며 행함없이 행함음(무위행) 곧 저 언덕에 오름이니 여여하여 부동이나 움직여 작용함이 무궁한 것이다....”
6조께서 입멸에 들기 전 유언을 마치자 법해등은 이 모두가 눈물을 흘려 우는데 오직 신회만이 신기와 감정을 움직이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이에 6조께서 “신회소사가 도리어 선과 불선(善)이 평등함을 얻었고 헐뜯고 칭찬하는데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얻었으며 슬프고 즐거움을 내지 않는 마음을 얻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얻지를 못했구나. 산중에 몇해씩 있으면서 마침내 무슨 도를 닦았는가? 너희가 이제 슬피우는 것은 누구를 근심하는 것인가?” 운운하였다.
하택 신회 선사가 대중에게 말해보이기를“한 물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곧 자기 마음이며, 아는 바로는 지혜가 아니니, 다시 다른 수행이 없노라. 여기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삼마제(정혜가 계합된 경계; 진여삼매)이니라. 법은 거래가 없고 전제와 후제가 끊어진 것(시공이 초월된 경계)이니 그러므로 알라. 무념이 최상승이니라. 모든 배우는 무리들에게 이르노니, 밖으로 달려 구하는 것이 없어야 되느니라. 만일 최상승선일진대는 응당 짓는 것(유위)이 없느니라.”하였다.
강설: 그 스님이“부처님의 경지가 최상승이다. 보살은 상승이고 연각은 중승, 성문은 하승(성문연각은 2승)이다 했고, 불조가 다 최상승이다. 조사들은 보살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교외별전의 법을 주로 닦는 것이다“했는데, 주로 닦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불조의 경지에 이른 조사는 최상승의 법을 체득한 이들임을 알아야 하니라.
또 사께서 이르시기를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착으로 근본을 삼는다. 대저 진여는 생각 없음이라, 생각으로 능히 알바가 아니요 실상은 나는 것이 없음(진공)이라. 어찌 몸과 마음으로 능히 볼 수 있겠는가? 무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곧 진여를 생각(념)하는 것이요 무생으로 내는 것은 곧 실상을 내는 것이요, 머물지 않는 것으로 머무는 것(무주상:응무소주)은 항상 열반에 머물고, 행하는 것이 없이 행(무위행:이생기심)하는 것은 곧 저 언덕에 뛰어남(용)이라. 생각생각에 구함이 없이 구하는 것은 본래 무념이니라”했다.
광보스님이“눈과 귀가 소리와 빛깔을 반연할때에 抗行(항행:비등하여 서로같음)이 됩니까? 廻互(회호:서로 얼켜 서로 어울림, 상호유대의 조직체)가 됩니까?”하고 물으니
사께서“항행과 회호는 차치하고(그만두고) 너는 어떤 법을 가리켜 소리와 빛깔의 체(바탕)라고 여기느냐?”하니
광보스님이 이르기를“화상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아서 곧 소리와 빛깔을 얻을 수 없나이다.”하자
사께서 이르기를“만약에 소리와 빛깔의 체가 공함을 요달하면 또한 눈과 귀와 모든 근(6근)과 범부와 성인이 평등(절대평등)하여 환화 같음을 믿을 것이며 항행과 회호인 그 이치도 분명해질 것이니라.”(공중무색)하자
이에 광보스님이 종지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