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예찬론
<프롤로그>
오늘 아침 일찍 강의하러가는 날 태워주는 와이프에게 물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내가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이 그래서이다. 즉 내 의지대로 보인다'를 가방끈 짧은 자기가 표현해봐바~"
"내 맘대로"
이렇게 답해놓고나서 꼭 덧붙이는 아내의 잔소리... "내가 늘 느끼지만... 배운 사람들은 쉽게 말하면 될걸 가지고 왜 그리 복잡하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참고로, 아내는 가방끈이 짧다.
아내는 중1 때 영어수업 시간에 단체로 체벌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하도 억울해서 책을 확 덮어버리고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뒤로 지금까지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아오는 중이란다. 공부하고 학문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인 추상적 사고, 추상적 논의와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내 예찬론 1탄>
우리 집사람은 평소에 나를 지겹게 관찰했으니...
추상의 허세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고...
내가 간혹 뭔가 깨달음이 와서 그걸 신나게 열심히 설명하고 나면...
"그거 그냥 이런말 아냐? 그 상황에 맞게 잘 판단하면 되는거지!"라며 나의 깨달음을 무색케 하는데...
솔직히 아내가 더 지혜롭다고 느낄 때가 많아서, 또 내가 결정하면 오판일 때가 많아서 아예 의사결정을 맡길 때가 많다.
이것이 추상 속에 살아가는 내가 구체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일 듯...!!!
<아내 예찬론 2탄>
"자기 왔어? 빨리 들어와서 봐바 뭐가 달라졌게?^^"
수고했다! 힘들었지! 하는 말 뒤에라도 물으면 기분좋게 반응을 해줄텐데, 다짜고짜 달라진 점을 찾으란다.
한달에 두세번은 장농이 안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아이들 방으로...
여자들은 다 이러나? 싶기도 했다. 일년에 한두번이면 모를까 ㅎㅎ
어제는 또 집이 넓어졌나? 싶더니만 자세히보니 그토록 무거운 7단 서랍장이 옮겨졌다.
"나 정말 생각 잘하지 않아? 참 똑똑한가봐~ 대단하단 말야!"
한 날은... 일찍 퇴근해서 오라고 하도 그래서 집에 갔더니...
베란다 한쪽 끝에 있던 드럼세탁기가 베란다 다른 한쪽 끝으로 와 있었는데, 밑에 받침대에 걸쳐서 기울어져 있었다.
'흠... 역시 내 몫이 있지! 나 없인 힘들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가방 내려놓고, 세탁기 쓰러진 쪽으로 기대어 앉아서 힘을 주었는데...
"으~이쌰~아~~아~~~" 이런...@.@;;;
단 1센치도 꿈쩍도 하지 않는데...
내 얼굴은 빨개지고 있는데...
옆에서 왕무시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으이구 남자 맞어???"
"ㅡ.ㅡ;;;"
"조금 비켜봐! 같이 해!"
아내의 '귀한' 도움을 받아 겨우 겨우 들어서 위치를 맞추어놓았다.
그순간 내 뒤통수를 때리듯 떠오르는 생각...
'아니, 이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저 끝에 있던 걸 여기까지 끌고 온 거지???' @.@
이 사건이 4년 쯤 전에 발생한 일인데 솔직히 챙피해서 아직도 못 물어봤다.
어떻게 옮겼는지를...
그것도 거실 한쪽 끝에서 거실을 통해서 방문을 통해서 다시 베란다 반대쪽 끝으로 말이다.
가방끈 짧은 집사람과 가방끈 긴 나와 둘 중에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인가?
이 사건이 구체와 추상 논의를 깊어지게 만든 한 사건이었다.
<아내 예찬론 3탄>
"자기야, 이렇게 복잡하고 잔뜩 어지러져있는데 내가 어떻게 정리하게~?^^"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두 녀석이 한바탕 놀고나면 집안 구석구석 엉망진창이다. 물감놀이, 블럭, 종이 오리기, 읽던 책, 쌓기놀이하던 책, 집놀이 하던 박스, 이불, 수건, 베개 등등...
여기다가 설겆이, 빨래감 쌓인 것까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엄두내기 힘든 상황...
컴퓨터로 일하고 있던 내게 느닺없이 웃으며 묻는다.
"자기야, 이렇게 잔뜩 어지러져있는데 내가 맨날 어떻게 정리하게~?"
"어, 음... 몰라"
"자기도 신기하지? 나도 내가 신기해. 도대체 언제 끝날까 싶기도 하구. 근데 그게 요령이 뭔지 알아? 그냥 아무생각없이 손에 닿는 것부터 정리해나가다보면 어느새 싹 끝나있더라~^^"
이런... 생각하고 파악하고 계획 세우고 나서 시작하는 나보다 낫네.
<아내 예찬론을 마치며...>
나보나 아내가 훨씬 지혜롭다!
내가 의지할 곳이 많다.
그런 아내가 드디어 오늘 ㅋㅋ 실수했다. 오전 중에 날아든 카톡 메시지
"나 ~ 청소하다 거실창밖 난간에 갇혀 201호에서 문열어줘 들어 왔어~~~ㅠㅠ"
실수는 나만의 것인줄 알았는데 ㅎㅎ
"바보~"
쌤통이었다.
<에필로그 1>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은 특정 현상들로부터 추상의 과정을 거쳐 이론화해내는 인간의 중요한 사고 활동의 하나이다.
그러나 범주적 사고는 구체적인 맥락을 제거한, 즉 추상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현실적 맥락으로부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학문을 하는 학자들이 현실 세계에서의 판단에 오류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왜 인간은 범주화하려고 하는가?
그래야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이 우리에게 알려준 중요한 지식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게 뭔가 하면...
첫째는, 바로 뇌의 한 부분인 working memory의 기억 용량 때문인데 G. A. Miler가 제시한 the magical mumber 7±2가 말하는 바대로 우리 사람은 한 번에 최대 7개에서 9개 단위까지 정보를 기억할 수 있다. 한 단위의 크기를 서서히 늘여가면서 기억 용량을 늘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은 3~5개 정도가 쉽게 기억하고 처리할 수 있는 단위인 것 같다. 따라서 수많은 구체적 사례들을 서너가지 범주로 묶어주는 것이 한 눈에 전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변별과 관련이 있다. 내가 "사람"을 안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 가능한 말이다. 남녀로 범주화하면 나는 남자도 알고 여자도 아는 것이다. 어떤 키를 기준으로 해서 그보다 큰 남자와 작은 남자로 구분하면 세상에는 그냥 남자들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남자와 작은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범주화는 매우 작의적이고 주관적인 작업이다. 범주화를 잘 하면 세상을 마치 내가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고나 할까...
물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범주를 생각해내는 창의적인 경우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진정한 창의력은 범주화로부터가 아니라 구체적 맥락 속으로 들어갈 때 발생한다.
<에필로그 2>
어느 선배 교수 왈 "공부만 하는 박사들은 현실감각이 참 떨어져~"
컨설팅 프로젝트를 할 때 후배들이 추상적 사고에 갇혀 탁상공론만 하는 모습 보일 때 답답하여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와이프도 내게 똑같은 말을 한다. 잔소리처럼... ㅎㅎ
그렇다.
학문세계 안에서는 제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이론적 감각은 뛰어날지라도 말이다.
보편적 설명체계를 찾는 습성은 매사에 구체적 맥락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추상화하고 이론화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론세계에는 밝지만 현실맥락적 감각은 많이 떨어지는 듯하다.
어쩌면... 그래서 생활세계의 부족한 부분을 이론세계가 채워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론세계에 더 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0.22 16:50
첫댓글 무슨 직업이든 긴 시간과 반복이 돼여 몸에 익숙하면 초인간적인 전문가가 돼가는 것을 스스로도 알게 된다는 것에 행복에 젖어 봅니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지식, 추상적 사고와연구 더 나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아주많이 경험에 의한 노하우와 복잡하지않고 심플함에 여유가 있고 창의적 사고도 더 잘 발휘될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선 사모님덕을 아주 많이 보고 계신것 같구요! 그런 두분의 조화와 사랑이 정겹게 느껴지는 아내 예찬론" 이라는 느낌입니다.(후에 책으로 펴 내시면 교수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 대박날꺼 같아요...ㅎㅎ 부디 대박나시길~~^^)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보다보면 참 아내분을 사랑하신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더불어 저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은 참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자신을 깎아내려가면서 다른 이를 칭찬하는 것도 드물고, 남의 장점을 찾으려 노력도 하지 않으니까요. 개인주의로 바뀌어 가면서 이런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받아야겠네요^^
교수님의 글은 읽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고, 이해도 참 쉬워요! 책으로 내셔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기대해도 될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