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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냐, 학원이냐
증언자 : 장준영(남)
생년월일 1961. 5. 5(당시 나이 19세)
직 업 : 재수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재수생으로 21일 시민들의 열기를 보고 21일 전남대 정문앞 투석전 및 시내의 시위에 동참. 계엄군의 도청 앞 발포를 목격한 이후 무장을 하였으며, 시민군으로 가장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았다. 또한 원광대병원 옥상에서 총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총격을 가함.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나는 1961년 5월 5월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까지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가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직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셨다.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성장하는 동안 별 어려움없이 자랐고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광주 남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부모님들의 교육열의는 남달랐다. 광주에서 혼자 자취를 할 때에도 부모님들은 나오지도 않은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여 주실 정도로 모든 면에서 불편을 주지 않을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나는 부모님들의 이러한 뒷바라지 덕분에 고등학교까지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학교에서는 일명 문제아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공부에의 흥미는 자꾸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교육의 희생양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다
1979년 10월 26일 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조선대에 다니는 형들과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밤에 라디오를 켜놓고 잠을 잤는데, 새벽 5시쯤 박정희 대통령이 유고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고3 때 나는 정치에 관심이 깊었기 때문에 주간조선 등과 같은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있었고,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조선대 다니는 형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7시 뉴스를 들으니까 박대통령 서거 소식이 공식보도로 흘러나왔다. 마침내 18년의 독재는 막을 내렸고, 우리에게 한국적 민주주의 운운하던 독재자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나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생활(당시 전일학원에 다니고 있었다)에 몰입하고 있?때 신문지상에서는 '서울의 봄'이니, 세 김씨가 어떠하다느니 참으로 복잡하고 많은 것이 보도되었다. 바로 그때가 모든 국민들이 희망에 가득 찬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공부와 투쟁의 갈등을 겪으며
금남로에서는 끊이지 않는 함성이 광주 하늘을 진동하던 그해 5월, 재수생들은 서야 할 자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금남로인가, 학원인가! 재수생에게는 무척이나 갈등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금남로에 나가 민중의 함성에 동참하자니 대학이란 관문이 길을 가로막고, 그렇다고 책과 씨름하자니 민중의 함성과 금남로 시위에 대한 호기심이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학원선생들도 방과 후에는 나와서 학생들이 도청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감정적으로 호소를 하곤 하였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여러분 앞에 가로놓여 있는 대학입시를 위해 자제하고 공부에 열중할 때이다. 데모 같은 것은 대학교에 가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이러한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두시위에 참여하는 재수생들이 많았다.그동안 갈등을 했던 문제가 학원의 휴강조치로 학원을 나가지 않게 되자 자연히 가두시위 동참으로 관심이 기울어졌다. 금남로 일대를 기웃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5월 16일경 전남지역 대학생들이 총집합하여 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주화를 외칠 때 나는 동참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날 집회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전남일보, 전남매일 신문기자들도 분수대에 나와 "그동안 사실보도에 게을리했던 점을 시민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는 민주발전의 초석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다. 교수들도 그날은 많은 분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각계각층의 호응 속에 민주화는 머지 않아서 곧 올 것 같았다.
18일은 집에 있었다. 큰방 아주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계림극장 부근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천주교 근방에서 가택수색을 하여 젊은 사람을 모두 잡아가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아들을 둔 집에서는 다락에 숨기고 야단이었다고 한다.
19일이 되어서 나는 집에서 내려오라는 연락도 있고 반찬이나 용돈도 가지러 가야 하기 때문에 시골에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큰방 아주머니께서 내게 당부하셨다.
"시내에 나가면 공수부대원들이 젊은 학생 같으면 무조건 진압봉을 휘둘러서 구타하고 트럭에 짐짝 싣듯이 싣고 어디론가 끌고가니까 시내로 경유해서 가지 말고 변두리로 돌아서 광주역까지 가시오."
나는 될 수 있으면 변두리로 돌아서 버스를 타고 광주역으로 갔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임산부와 처녀 유방을 도려냈다는 이야기도 큰방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다.
나는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고 시골에 갔다. 시골에 가서 보니까 친구들도 많이 내려와 있었다. 다음날 광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어머님께서 만류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데모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광주의 시위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 때문에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주로 왔다. 9시쯤 광주역에 도착하니 역대합실의 모든 유리창은 박살나 있었고, 시내교통은 완전 마비되어 있었다. 교통이 마비되어서 동명동 자취집으로는 못 가고 농성동 돌고개 형님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형님집까지는 걸어서 갔는데 광주역 앞과 도로에는 온통 돌맹이가 흩어져 있었다. KBS 방송국 앞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군용 차량(지프차) 1대가 지나갔다. 그때 광주역 앞과 도로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시민들 쪽에서 "저 놈 잡아라"하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그 군용 지프차가 시민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것인 줄 알고 돌을 던지면서 달려들었다. 그런 와중에 지프차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시민들의 거센 열기에 동참하다
5월 21일 형님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9시쯤 동명동 자취집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돌고개 쪽으로 나와보니 전날밤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두환, 신현확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돌고개 앞길을 가득 메우고 지나갔다. 시위차량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줄을 이었고(당시 평일 교통량과 비슷했다), 시위대 차량에 탑승한 시민들도 트럭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심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시위에 동참이냐, 공부냐! 였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공부를 해야겠고, 저 시위대의 함성을 듣고 느낄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생각하면 동참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데
시위는 확산되고 있었고, 광주민중항쟁은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무법천지 같지만 그 속에 질서가 있고 민주가 살아 숨쉬었다. 혼란한 듯하면서도 안정과 질서를 유지했다. 시민들은 분노에 차 있었지만 광주를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자발적인 협조 속에 시위는 더욱더 치열해졌다. 크게는 군사정권에, 작게는 군인들의 잔혹한 행위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돌려 위협하고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시민들은 자구책으로 생존권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일념으로 항쟁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시위차량과 거기에 탑승한 시위대들의 모습(각목 등으로 무장)을 보면서 나는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시위차량 중 군용 트럭을 한 대 세워서 올라탔다. 나는 운전석 위 지붕에 앉아서 각목을 들고 시위대들과 함께 행동을 같이 하였다. 내가 탄 시위차량에는 30명 정도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20대 중반). 나는 낮 12시경에 나는 차량에 탑승했고 점심 먹을 무렵까지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우리는 산수동, 전남대 입구 로터리, 금남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구호를 외치면서 다녔다. 구호는 주로 '전두환, 신현확이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이었고 이것을 훌라송에 맞추어 외쳤다. 그리고 노래는 애국가나 선구자 등을 불렀다. 그렇게 차량시위를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대단한 협조였다. 산수동 오거리를 통과할 즈음에는 날계란과 주먹밥, 김밥으로 배고픔을 달래 주면서 용기를 주었고, 여학생들은 모금운동에 여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시위차량의 기름값 모금과 부상자 치료비 모금이었으나, 나중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 속에서 다방면으로 절대적인 협조를 해 주었다.
전남대에서 투석전을 벌이다
당시의 각 지역상황은 지프차가 주로 연락업무를 담당하며 기동력을 발휘하면서 지휘를 했다. 우리는 전남대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전남대 정문으로 갔다. 그때 시각이 12시 30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전남대 로터리에 도착해서 보니까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로터리에서부터 전남대 정문 입구까지 발디딜 틈이 없이 꽉차 있었는데, 시민들은 시위대 차량(5대 정도)을 보자 길을 비켜주었다. 정문 바로 앞까지 진격했다. 그때 계엄군 1개 소대 정도가 전남대내 당산나무 조금 못 미친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시위군중은 전남대 법대 밑 쪽에까지 꽉차 있었다. 밀고 밀리는 투석전에서 시위군중이 던지는 한 개의 돌팔매질은 재미로 하는 것도 아니었고 계엄군을 맞혀 죽이자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로지 돌멩이 하나하나가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돌팔매질을 하였던 것이다.
굳게 닫힌 정문을 트럭으로 밀어붙이자는 주장, 옆의 담을 밀어붙이고 진격하자는 주장으로 시위대는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전남대내 종합운동장에는 군인들의 막사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을 만나다
나는 정문에 40여 분 투석전을 벌이고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지휘차량(지프차)이 와서 광산군 하남의 격전상황을 알려주었다.
"지금 하남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시민군이 밀리고 있기 때문에 지원군 요청이 시급하다." 우리는 전남대 정문을 빠져나와 하남 쪽으로 향했다. 6대 정도의 차량이 우리 와 행동을 같이하여 황룡강 다리를 막 건넜을 때 먼저 갔다온 차량으로부터 격전이 끝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청으로 방향을 바꾸어 시내로 진입을 했다. 현재의 광주은행 앞에서 우리는 하차했다. 시위군중은 금남로 일대를 꽉 메우고 있었고, 계엄군은 도청 앞 분수대 쪽에 있었다. 나는 시위군중 속을 헤치고 가톨릭센터 앞까지 갔다. 나는 배가 고파서 현재 상업은행 쪽 충장로 입구에 있는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 병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먹을 것을 찾았으나 이미 남은 것도 이미 먹어치운 상태였고 '매실'이라는 술 1병이 나왔다. 그곳에서 나는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학생을 만났다. 그 학생 말로는 20일 서울에서 특별버스로 내려왔다고 했고 당시 고려대에 재학중이라고 했다. 그 학생과 나는 술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금남로로 나왔다.
시위대원들은 도청 저지선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안 되니까 소방차를 끌고 와서 물탱크 안에 기름을 저장하여 기름을 뿌려 화공작전을 펼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한 시민들이 많아 중단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트럭 적재함에 기름통을 적재하여 저지선을 뚫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조금 후 장갑차 한 대가 서서히 도청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현재의 광주백화점 앞에 있었다. 장갑차에는 런닝낡쓰 차림의 한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만세! 만세!"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총성이 들렸고 장갑차에 탄 청년이 쓰러졌다. 청년이 쓰러지고 다른 청년이 장갑차에서 나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이 때는 더 이상 총격은 없었다. 장갑차가 뒤로 후진하는데 도로에 깔린 자갈더미 때문에 기우뚱 기우뚱하였다. 목에 총을 맞은 시신이 장갑차 위에서 목 윗부분과 아래의 몸체가 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페퍼포그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 차에서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 한하여 실탄과 함께 총기가 배급되고 있었다.
조금 후에 계엄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어느 쪽에서부터 먼저 총성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5분 정도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시위군중들은 다수가 흩어졌고,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들이 주로 총기를 지급받고 총격전에서도 이 사람들이 주로 응사를 하며 저항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부상자는 생기지 않은 것 같다. 총성이 멎고 조용해졌을 때 그 순간 온몸에 피가 묻은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시위군중에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기독교병원은 부상자로 가득 차 있고 치료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부상을 당한다고 해도 더 이상 치료도 받을 수 없다." 한마디로 몸조심하자는 간절한 호소였다. 시위가 광주시 전체로 확대되면서 그 동안 그만큼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나는 금남로를 빠져나와 미니버스를 타고 시위를 하며 다녔다.
머리띠로 시민 표시
오후 5시에서 6시경 일신방직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괴상망측한 루머가 많이 돌았다.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시위대로 변장하여 시위대들의 행동양식과는 다른 잔악함을 유발한다는 이야기, 거짓 정보를 유포시켜 시위대들간의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 등이었다. 심지어는 시위대에 잠입하여 테러를 행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래서 밤에는 항상 조를 편성해서 다니기로 했다. 이와 같은 당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신방직에서는 여공들과 회사원들이 시민군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위한 머리띠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 광목으로 만든 머리띠를 우리도 착용했다. 이미 만들어놓은 머리띠는 차량에 싣고 나왔다. 시내에 나와서 차량시위대들에게 머리띠를 나누어 주는 임무를 맡았다.
무장을 하다
날이 어두워갈 즈음 미니버스에 탄 우리 시위대는 신안동에 위치한 롯데칠성회사에 음료수를 가지러 갔다. 당시 2인 1개조로 편성이 되어서 각 변두리 지역에서 자체방어를 하고 있는 시위대들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임무를 끝내고 미니버스에 탄 시위대 중 일부는 광주일고 근처에서 시내버스에 옮겨탔다. 대략 20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총기를 소지하게 된 때가 이때이다.
같이 탔던 20대 후반의 남자가 밤이 되니 계엄군의 테러행위를 대처하기 위하여 총기를 소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카빈총과 실탄을 주면서 간단한 조작법을 가르쳐주었다. 총과 실탄은 위험하다 하여 모두가 분리상태로 휴대하였다. 그리고 시내 기아산업 건물 옥상에 계엄군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내 옆에 탄 사람은 남평에서 올라온 사람이었다. 스물세 살 정도 되는 사람이 었는데, "광주에서 큰일이 벌어졌는데 우리 같은 촌사람도 한몫 해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동네 어른들이 사준 막걸리를 마시고 동네 청년들과 함께 올라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는 말을 전해 들을 때는 총격에 공포심이 저절로 사라지곤 하였다. 한참 동안 광남로, 현대극장, 서방 쪽으로 다니다가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한기가 들고 총격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서 저녁 9시쯤 서방에서 페퍼포그차로 갈아탔다.
일단 다른 차량보다 벙어벽이 있기 때문에 안도감으로 다소간 불안감이 해소된 것 같았다. 밤이 되면 계엄군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위대를 가장하여 별별 일을 다 저지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더욱 행동에 조심하였고, 특히 차량을 만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해 보는 조심성을 보였다. 그런데 밤이 깊어 갈수록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적십자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가면 부상자들이 속속 오기 때문에 격전 지역이라든가 위험한 곳을 쉽게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동신고 앞, 공단입구, 숭실고 쪽, 무둥경기장 지역에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에는 계엄군으로부터 총격 등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시민들은 병원 주변으로 잘 모였다. 적십자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지프차 한 대를 만났다. 지프차 뒤에는 리어커를 달았는데 그 안에는 시체 2구가 있었다. 나와 같이 탄 시위대 중 한 명이 왜 시체를 싣고 다니냐고 묻자 "시체를 놔둘 자리가 없어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군으로 가장한 계엄군에게 총격을 받다
현대극장 쪽으로 순찰을 가는데 지휘 지프차 한 대를 만났다. 밤이 깊었으니 시위대를 가장한 계엄군들의 테러를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앞에서 말한 몇몇 지역의 시위대가 집결해 있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자면서 월산동 파출소를 거쳐 백운동 로터리 쪽으로 간 우리 차를 인도하였다. 우리는 그 지프차가 지휘차인 줄 알고 따라갔다. 그런데 백운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즈음에 난데없는 사격이 가해졌다.
앞에 가는 지프차는 백운동 로터리 철도를 막 넘어서고 있었고 우리는 로터리 광장으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다. 시위대로 가장한 계엄군은 계속 사격을 가해 왔다. 동시에 우리는 대응사격은커녕 대처할 겨를도 없이 외곽도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사격을 가해왔던 차는 다시 우리 차를 따라서 계속 추격해 왔고, 사격은 하지 않았다. 그때 공단입구 쪽에서 커다랗게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불기둥이 보이자마자 따라오던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시민군이 많이 있는 곳인 줄 알고 추격을 단념한 것 같았다. 우리는 사격으로 인한 피해는 없었다.
원광대병원에서도 총격전을 벌여
우리는 공단입구에 도착하여 시위대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다시 선회하여 전남대병원 쪽으로 왔다. 병원은 안전할 것 같았고 병원상황도 피악해 볼 겸해서였다.
병원입구에는 10명 이상의 시민군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이상할 정도로 철저하게 신분을 확인했다. 알고 보니 그곳에 있던 시위대들도 우리와 같은 장소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 대원들은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빠져나와 보니 버스 뒤쪽에 총탄 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고 했다.
위험하고 불안해서 다시 서방 쪽으로 갔다. 서방에 있는 시위대들에게도 앞에서 소식을 알리고 광남로 현 원광대 한방병원 앞에 도착하여 대기하던 중에 느닷 없는 총성이 울렸다. 모두들 원광대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사태를 관망하였다. 나는 페퍼포그차 안에 있었다. 광남로 로터리에는 부서진 장갑차 한 대가 있었다.
총소리에 우왕좌왕하여 우리는 모두 병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병원측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차로 밀어 부치겠다고 항의하자 문을 열었다.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서 총소리 나는 쪽을 바라 보았다. 백운동 방향에서 총소리가 난 것 같았다. 우리는 총소리 나는 쪽을 향해 대응사격을 하였다. 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총소리가 울리는 쪽을 향하여 마구 응사를 하였다. 잠시 후 총성이 멎고 나서 우리쪽 피해상황을 조사했다. 별 피해는 없었다. 아마도 계엄군 측에서 시민대원들을 교란 시키려는 작전이 아닌가 싶었다.
귀가하다
전날 원광대 입원실에서 15명 정도가 잠을 잤다. 각자 겪은 경험들을 얘기하고 소지한 총을 가슴에 안은 채 우리는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몇 명 안 남아 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따뜻한 보리차와 주먹밥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오전에 택시에 탑승했다가 택시에 함께 탄 시위대에게 총기를 인계하고 나는 귀가하였다.
항쟁이후
나는 1980년에 대학입시를 치뤘지만 또 한번 쓰라린 패배를 겪고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항쟁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난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무참하게도 계엄군의 총부리에 죽어갔고 나는 끝까지 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또 다시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의 소원이라면 나는 그렇게 해야 했다. 과거에 너무 부모 속을 상하게 해서 철이 들어가면서부터는 책임감이 그만큼 무거웠다. 방위생활을 마치고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부를 등한시했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후에도 투쟁의 현장에서 열심히 싸웠고 내일보다는 남의 일을 우선시 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고 참된 인간의 길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방황은 계속되었고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공부 이외에 다른 것에 열중함에 따라 나는 가치관이나 인생관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노가대판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1989년에는 직업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이다.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제는 떳떳이 나도 직업을 가지면서 생활하고 그 생활 속에서 민주를 위해 싸워 나가야 겠다고 생각한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군사 독재정권의 독버섯이 뿌리를 내리려는 싯점에서 그 뿌리를 제거하고자 전 시민이 일어난 항쟁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 큰 긍지를 갖고 있다.
시민, 학생, 근로자, 농민 등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아래로부터의 항쟁으로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작금의 국회청문회를 보면 국민의 행동 방향을 수렴하기는 커녕 임시 방편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작태가 공공연히 용인되고 있다. 다시 한번 국민의 무서운 힘을 결집시킬 때라고 본다. 나는 앞으로도 5·18 정신을 실천적으로 계승해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힘있게 살 것이다.
(조사정리 박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