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 사용 그 후
유로(Euro)가 사용되기 시작한지 이제 만 4개월이 되어갑니다. 지금쯤은 유로 시스템이 안정되었는지 궁금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번에는 유로가 도입되면서 변화된 세상 모습을 제가 보고 느낀 대로 정리합니다. 그렇다고 크게 변화된 것은 없음을 먼저 밝힙니다.
먼저, 올해 1월 1일에 집 근처에 시청앞 햄버그 집이 문을 열었길래 들어가 보았습니다. 조금 큰 액수의 벨기에 프랑을 주었는데, 잔돈은 정확히 유로 지폐와 동전으로 돌려 받았습니다. 모든 상점으로는 12월 말에 이미 유로가 배포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를 유통시키자고 몇 년 전에 약속을 했으며, 여러 해 동안 차분히 준비해 온 덕분에 조그만 햄버그 집에서도 문제없이 그 약속이 지켜 졌습니다.

(위) 시청 옆 햄버그집에서 벨기에 프랑을 주고, 잔돈은 유럽의 새 통합화폐인 유로(Euro)로 받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로가 통용되는 날 아침 우리 가족도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위) 2002년 1월 1일부로 사용되기 시작한 유럽의 새 통합 화폐... 유로(Euro) 지폐와 동전입니다.
그 이후에도 혹시 길거리 주차 티켓, 자판기, 공중전화 등에서 필요할 것 같아서 항상 호주머니 속에 벨기에 프랑 동전을 넣고 다녔는데, 너무나 신속하게 공공 시설들이 유로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바람에 첫날부터 오히려 옛 동전이 애물단지로 변해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1월 15일 경에는 집에 굴러 다니는 옛 동전을 기념으로 몇 개만 보관하고는 모두 은행에 입금시켰습니다. 일반 상점에서는 3월말까지 벨기에 프랑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4월부터는 상점에서는 더 이상 프랑을 받지 않고 은행에서만 벨기에 프랑을 유로로 바꿀 수 있습니다. 4개월이 채 안되었지만, 현재는 옛 화폐는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유로 시스템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제가 불편을 느낀 경우는 놀랍게도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유로가 도입된 후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루벵 시내에 있던 사설 환전소가 전부 폐업했다는 것입니다. 유로 사용 국가가 워낙 많아서 화폐를 교환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유로 지폐의 경우는 어느 나라에서나 앞면과 뒷면의 디자인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동전 (1, 2, 5, 10, 20, 50 Cent, 1, 2 Euro)의 경우는 숫자가 찍힌 면은 디자인이 동일하지만, 그 반대 면은 발행 국가가 어디인가에 따라 각 나라마다 고유하게 디자인을 했으며, 벨기에 유로 동전이 가장 밋밋하다고 이미 평가가 끝났습니다. 이제 약 4개월이 지나니까 유럽 각국의 동전이 서로 혼합되는 현상을 가만히 앉아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루벵의 상점에서 이웃나라 네델란드, 독일, 프랑스의 동전을 거슬러 받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 되었으며, 심지어 그리스의 동전도 거슬러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유럽 내에서 화폐의 혼합 속도가 엄청 빠름을 볼 수 있습니다.
1월에 유로가 도입되자 기존의 물건 가격이 300 BEF 였으면 40.3399 의 비율을 엄격히 적용하여 소수 둘째 자리까지 (Cent 까지) 계산해서 7.44 Euro 라는 가격표가 붙었습니다. 제 아파트 월세도 작년에 30,000 BEF로 계약을 했으니까 현재는 정확히 743 유로 “68 센트”를 집주인에게 송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40.3399 라는 환율을 단순히 적용하여 1 센트 단위까지 계산을 하니까 유로 도입 초기에는 물건만 사면 1, 2, 5 센트 짜리 동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1 센트가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원인데, 경제 수준이 높은 유럽에서 1, 2, 5 센트라는 액수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 서 이제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상점 물건 가격표에서 7.40 EUR 처럼 소수 둘째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프랑을 사용할 때는 299 BEF 같은 가격표가 주류를 이루었으니까 조만 간에 아마도 7.9 같은 가격표가 곧 등장할 것 같습니다. 제 동전 지갑에서 1, 2, 5 센트 짜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매달 느껴집니다.
2002년 오늘 현재, 1 유로는 1,150원, 1 달러는 1,300원 정도 되니까 1유로가 1달러보다 150원 정도 작은 액수입니다. 그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출장 오는 사람들이 유럽의 호텔에서 묵은 후 나올 때, 옛날에는 1 달러를 두고 나왔는데 요즘은 1 유로를 두고 나온다고 합니다. 반대로 미국으로 출장 간 유럽 사람들도 호텔에서 나올 때 1 달러 대신 1 유로를 놓고 나온다고 합니다. 어차피 예의상 “1” 을 팁으로 주는데 이왕이면 덜 주자는 사람 심리입니다.
현재 EU 15개 회원국 중 영국과 북유럽 몇 나라를 제외한 12개 국이 Euro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러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영국 뿐만 아니라 북유럽, 심지어 동유럽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Euro를 받아 준다고 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유로 사용 전에는 예를 들어 100 달러를 가지고 유럽 15개 국을 모두 돌면서 환전을 하면 환전 수수료만 해도 40~50 달러가 지출된다고 합니다. 수 많은 나라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복잡한 유럽 대륙에서 동일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환전 수수료 측면에서도 큰 이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국가의 화폐를 바꾸었을 때 얼마나 큰 사회적 혼란이 있을지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데, 12개 나라가 동시에 이렇게도 smooth하게 화폐를 바꾸었다는 것이 사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유럽의 일반 국민들도 이미 유로화 도입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자체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처음에 유로화 도입을 제창하고 결정적 기여를 했던 사람 (또는 유럽연합체)은 수년 내에 노벨 경제학 상을 받을 것 같습니다.
2002.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