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세련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니다. 당초에 이 글 자체가 수행과정에서 얻어지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내려 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고쳐 쓰고 싶은 생각이 나면서도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것 자체가 reality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나 자신의 견해가 많이 들어 있다. 지금 와서 읽어보면 관념적인 사고와 사마타 수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흔적들이 역력하지만 그것이 초보자로서의 자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의견은 사라지고 선생님의 말씀과 수행자들과의 대화가 비교적 많이 기록된다. 선생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만큼 귀도 열리고 또 필기 능력도 늘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군더더기처럼 붙어 다니던 잘못된 생각들이 많이 떨어져나갔음을 보게 된다. 의식의 전환 과정이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수행자의 수준을 맞추다보니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한 선생님 자신이 근본불교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 관한 공부도 끊임없이 하면서 수행과 수행지도 방법을 수정하는 사람인 까닭에 그 때마다 수행을 지도하는 방법이나 용어의 사용이 조금씩 달라진다. 예를 들어,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는 알아차림에 “명칭”을 붙이도록 하였는데 나중에는 명칭을 붙이지 않은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똑같은 질문이 반복되어도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적어내려 간다. 같은 질문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많이 일어나는 문제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되풀이해서 빨리어나 교리들을 익히다보면 수행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선생님처럼 수행을 통해 얻은 지혜가 아니라 들어서 얻는 지혜이기 때문에 한 번 들어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가 되풀이하여 들어도 싫증나지도 않고 매 번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대화의 내용을 그대로 적은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chapter를 갈라놓기는 하였지만 내용상 특징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 2000년, 11월 3일, ]
미얀마로 수행을 떠났던 묘원 선생님이 돌아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선생님 댁을 직접 방문하기로 하였다. 분당의 맨 끝자락인 미금역 부근의 한 아파트를 찾아 초인종을 누르니 머리를 깎은 스님 모습의 선생님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거(安居)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선생님은 건강해 보였고 할말도 많아 보였다.
선생님을 만난 첫 마디가 “그 동안 수행 잘 하셨습니까?” 이지만 내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간 미얀마에서 어떻게 수행하였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 내에서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여주었다. 이제까지는 사띠의 연속성 문제에 주력하였는데 앞으로는 사띠와 사마디와 위리야의 조화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사띠를 오래 지속할 것인가가 그간의 과제였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얼마나 내용이 있는 사띠에 들어갈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아차림의 지속과 더불어 알아차림의 정확성이 함께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삼매에도 그 깊이가 다른가?” 그렇다는 대답이다. " 예를 들어 20%의 삼매도 있고 50%, 90%의 삼매도 있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20% 정도의 삼매도 있고 50% - 90% 정도의 삼매도 있다. 100%의 삼매도 있을 수 있다. 이 말은 알아차림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삼매는 사마타 수행의 삼매와 위빠싸나 수행의 삼매가 다르지만 어떤 삼매가 되었거나 수행자의 상태에 따라 삼매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삼매는 빠라마타를 알아차려서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찰나삼매를 해야한다. 그리하여 대상에 정확히 밀착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될 때 이것을 좋은 삼매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삼매는 좋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순도와 삼매의 순도와 노력의 순도가 모두 합리적으로 모여서 하나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누구나 수행을 해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것들의 조화에 따라 수행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정도에서 말하는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 바른 노력이 있는 것이다. 바른 것이 있으면 안 바른 것이 있다는 말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치적으로 따지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구나! 삼매도 그 깊이와 종류가 다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어쨋든 선생님의 수행방법은 그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앞으로는 이 방법으로 수행지도를 받게 될 것 같다.
< 수행은 근기에 따라서 다르게 지도한다 >
수행하는 데에는 꼭 이래야 한다는 원칙이 없다. 물론 오랜 전통을 이어온 큰 스승의 지도를 받아 그 방법에 따라 수행을 하면 크게 벗어남이 없이 정도를 갈 수 있겠지만 꼭 그 방법이 아니면 안되다는 것은 없다. 선생님에 의하면 수행의 방법도 결국 자기에 맞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선생님은 후에 이렇게 말씀하여 주었다.
"수행자들에게 말해지는 수행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수행지도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으며 또한 수행정도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 처음 수행을 하는 사람과 경험이 있는 수행자는 방법을 다르게 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수행방법은 방편인 만큼 큰 틀 안에서는 일정한 원칙이 있지만 지엽적인 문제에서는 무수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야 한다. 수행방법이 천편일률적이라면 이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닌가. 뿐더러 어떤 수행자를 막론하고 자신이거나 남이거나 간에 수행방법도 계속 달라질 수 있다. 수행을 하다보면 전에 몰랐던 좋은 방법들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다양한 방편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한다.
수행방법이 나 자신도 바뀌지만 미얀마에 갈 때마다 우리 스승도 조금씩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수행의 발전이구나 하고 느꼈었다. 위빠싸나 수행은 의식이 고양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므로 계속 발전하는 과정이 있는 것이라면 방법에 있어서도 그만큼 다양함이 유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승이 말한 수행방법은 스승의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것이 그대로 자기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자기의 성향과 능력, 이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두 자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의 모습이다. 그래서 수행방법이란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얼마나 자기화 하는 가도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좋은 테그닉이 개발될 수 있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수행을 지도하는 입장에서나 수행 지도를 받는 입장에서나 다 같이 새겨둘 일이다.
첫댓글 정확한 자기화!!! 감사함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