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출 산 (月出山)
월출산 전경
월출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있는 산. 소백산계(小白山系)의 무등산 줄기에 속한다. 해발 809m로 높지는 않지만 산체(山體)가
매우 크고 수려하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
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러왔다.
천황봉(天皇峯)을 주봉으로 구정봉(九井峯), 사자봉(獅子峯), 도갑봉(道岬峯), 주지봉
(朱芝峯) 등이 동에서 서로 하나의 작은 산맥을 형성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영산(靈山)이라 불러왔다. 동쪽으로 장흥, 서쪽으로 해남, 남쪽으로는 강진만을 가로막고 있는 완도를 비롯한
다도해를 바라보고 있다.
도갑사(道岬寺)·무위사(無爲寺) 등의 사찰과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144) 등을
비롯해, 뾰족한 암봉(岩峰)과 골짜기를 따라 폭포와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곳곳에
얽힌 수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말기에는 9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북쪽의 용추폭포(龍湫瀑布), 동쪽의 구절
폭포(九折瀑布), 남쪽의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 등이 절경을 이룬다.
1978년에 천황봉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길이 51m, 너비 0.6m의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절벽 높이가 무려 120m나 된다. 예로부터 월출산 산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외감을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암에 관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動石)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인데, 이 동석 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 3월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도갑산(道岬山:376m) 지역을 합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6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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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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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극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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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城田面) 월출산(月出山) 남동쪽에 있는 고찰.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
(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
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
도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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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대웅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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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리(道岬里)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사찰.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전기 1456년(세조 2) 수미(守眉)가 중건하였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의
해탈문(解脫門)은 현존하고 있는 한국의 건물 중 보기드문 옛
건축물이며, 이 밖에 대웅보전
(大雄寶殿:지방유형문화재 42)·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89)·도선국사비(지방유형문화재 38)·명부전(冥府殿)·팔각석등대석(八角石燈臺石)·3층석탑·5층석탑·석제(石製) 구유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도선 및 수미대사의 영정
(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
왕인박사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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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동구림리(東鳩林里)에 있는 백제 때의 학자 왕인의
탄생지이다.
지정면적 185만 2400m2. 1987년 9월에 복원, 준공되었다.
왕인묘(사당) ·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왕인묘(약 82.5㎡)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月出山)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전시관에는 탄생도 ·수학도(修學圖) ·도일도(渡日圖) ·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이 밖에 일찍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전수하는 대외무역항구로서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고,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도 복원되었다.
또, 왕인이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도 남아 있는데,
이곳은 백제 때의 토기제조촌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유놀이 때,
왕인이 마셨다는 성천(聖泉)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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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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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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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예문관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가 은퇴한 뒤,
지금의 영보촌(永保村)에 거주하면서 통례원 좌통례를 지낸
사위 신후경(愼後庚)과 함께
건립하였다.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다.
선조 연간 이후 퇴락하였다가, 1630년경 최덕지의 7대손인
기정(棄井) 최정(崔珽)과 신천익(愼天翊)이 전주최씨·거창신씨(居昌愼氏)들과 함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는데, 이때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다. 그후 양 문족(門族)이 서로 협력하여 부분적으로 중수 또는
개수하여 한말까지 이어왔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이곳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시켰다.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활동으로 꼽히는 1931년의 형제봉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과 청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뜰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전면에 영보정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며, 네 귀에는 추녀를 찰주로 받치고 있다.
현판은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영보정과 관련된 유물·유적으로는 전주최씨·거창신씨 두 문족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영보정동계자료》 8책이 전해오는데,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영암지방 향토 사회의
생활사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영보정은 신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로서의 의미가 큰 유적으로,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이곳에서 마을축제 풍향제(豊鄕祭)가 열린다.
근처에는 전주최씨·거창신씨 문족이 함께 이룩한 연촌영당(烟村影堂)을 비롯해 목판각
(木板閣), 합경제(合敬齊:영암지방의 유일한 사액서원인 녹동서원 관련 문서 일절 보관),
최덕지 고택, 존양루, 신후경 고택 등이 있다. |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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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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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암 불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같은 돌에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조각하였다.
나발(螺髮)에 육계(肉
)가 크며 타원형 얼굴이다.
도톰한 눈두덩, 넓적한 코, 덤덤한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투박한 귀는 짧고, 목은 길지만
삼도(三道)는 형식화되었다.
어깨는 넓지만 부자연스러우며
몸의 굴곡도 단순하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팔도 생동감이 없고 조각기법도 둔하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옷주름 몇 가닥을 투박한 선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광배는 주형(舟形)이고 신라의
양식과 달리 곡선미를 찾아볼
수 없다.
두광(頭光)도 홑잎 연화(蓮華)무늬를 표현하였고, 꼭대기와 양옆에 각각 화불(化佛)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무늬가 표현되었다.
대좌는 연화대좌(蓮華臺座)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얼굴의 세부표현이 예리하지 못하고 전반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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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도선 ·수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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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도선 ·수미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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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 1974년 5월 22일 전라남도유형
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비는 귀부(龜跌)와 비신
(碑身), 이수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것으로, 도선국사와 수미선사를
추모하는 비이다.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속성은 김(金), 호는 옥룡자(玉龍子)이며 전라남도 영암 출생이다.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서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세웠다.
그후 전국 명산대찰을 두루 섭렵하고 나서 백계산 옥룡사에서 평생을 마쳤다.
그의 음양지리설·풍수사상은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미선사는 조선 전기의 승려로 속성은 최(崔), 본관은 고랑주(古朗州), 호는
묘각(妙覺)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에서 수행하고 20세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후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信眉)와 함께 수도에 정진하였으며, 선교(禪敎)를
부흥시키는 데 힘썼고, 1457년(세조 3)에 도갑사로 들어가 절을 중수하였으며,
1458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비신의 옆면에 새겨진 구룡문(龜龍文)이 정교한 조법을 보여준다.
17년이 걸려 1653년(효종 4)에 세운 것인데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새로 지은 것처럼
말끔하다.
전체 높이가 약 4.8m, 폭은 1.42m이며 표면에는 약 1,500자가 음각되어 있다.
비의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동·서를 향하여 머리를 쳐들고 있고 비신 측면의 조각 역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크고 미끈한 거북이가 비석을 지고
고개를 틀어 절 있는 쪽을 보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두툼한 등껍질 위에 가장자리가 말린 넓은 연잎이 조각되어
비신을 받치고 있다.
이처럼 구름이나 연꽃무늬가 아니고 연잎으로 비신을 받친 것은 조선시대의 비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몸통이나 머리에 비하면 발 부분은 빈약하다. |
등산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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