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로운 자
누가복음 6장 39-49절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듯이 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1. 비유 말씀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6:39-40)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39절).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일상생활에서 비롯된 네 가지 짧은 비유로 끝맺습니다.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을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든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온 군중들에게 설교하든지, 서기관 및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하든지 간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비유가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착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수수께끼조차 환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이 A.D. 20-30년대 팔레스틴 변방의 생활환경을 잘 밝혀준다는 사실입니다. 비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 중 일부는 청중이 그 비유 속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에 이미 익숙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에서 청중들은 모두 동전 하나를 잃는 일이(15:8-10) 어떻게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먼 나라로 자기의 행운을 찾아 떠난 방탕한 아들을(15:11-32) 머리속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리고 도로의 위험은(10:30) 그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라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팔레스틴의 지형을 염두에 두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그곳의 땅들은 바위들이 많고, 많이 패여서 맹인이 안전하게 보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길을 맹인이 또 다른 맹인을 인도한다면 어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소경이 영적 소경을 인도하고 지도한다면 인도한 자는 물론 인도함을 받은 자까지 영혼의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맹인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반대하였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으며, 보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본다고 말하였습니다(요 3:19; 9:40,41).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얻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결국에는 그 제자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마 23:15).
예수님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40절). 마태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 10:24)라는 구절을 추가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핍박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어,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이 예수님께 닥친 것보다 더 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급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절에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 맹인들이 바리새인들을 가르킨 것이라면 지금 이 구절에서도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맹인인 제자는 맹인인 선생보다 못할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그 거짓된 교훈의 틀에 속박당하고 말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 선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좇게 된다면 그 선생과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다른 의도, 즉 '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 사람보다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 나와 같이 되라'는 권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수준에 까지 이를 수는 없지만,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까지 범사에 자라가야 합니다(엡 4:15; 골 1:18).
2. 자신을 먼저 보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6:41-42)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41절). 이 두 구절은 39, 40절과 연결되어 잘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티'와 '들보'는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성의 모습을 나타낸 말입니다. '티'( 카르포스)는 원래 '조각'이란 뜻인데 조그마한 나무조각, 즉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지셨던 목수 일을 연상케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를 가리킵니다.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거짓 선생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예수님께서 작은 나무 부스러기와 커다란 들보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대개 다른 이의 잘못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쾌감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한 단체의 개선이나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냉철히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바리새인들의 심각성은 그들 속에 들보가 박혀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진정한 개선이나 회개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거니와 그들은 위선과 외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포스)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 즉 온갖 위선과 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형제의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3.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6:43-45)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43절). 가시적 결실, 곧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들의 인격 혹은 마음을 묘사하며 열매는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태도, 말,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는 (1) 사람의 영적상태는 자연스럽게 외적으로 나타남을 가르칩니다. 물론 당시 바리새인과 같이 위선으로써 철저히 은폐하는 자들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의 궁극적 관심사(예컨대, 재물욕, 명예욕 등)는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발합니다(고후 2:15). (2)구체적 결실을 맺는 신앙이 되어야함을 가르칩니다. 입으로만 온갖 경건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냉담하다면 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이런 나무는 찍혀 불붙은 아궁이에 던져지게 됩니다(마 7:19).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44절).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이는 나무의 가치나 중요성이 그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아나니'( 기노스케타이)란 본질적인 것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로 기록합니다. 각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들이 서로 바뀌어져 열릴 수 없듯이 사람의 경우도 그 심령의 상태대로 외적 행실이 드러나게 마련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한편 본 비유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있는 광경에서 취해진 것입니다. 즉 무화과나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대개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무화과나 포도 열매가 가시덤불과 섞여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45절).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음이 선이나 악이 쌓이는 창고인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잠 4:23은 특별히 마음을 지킬 것을 훈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성경에서 지(知), 의(意), 정(情)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적 생(生)의 근원으로 또 나아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원천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신 20:14; 시 27:8; 잠 6:18). 말과 행실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마 12:34,35). 속마음이 나쁜 사람은 악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여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4.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6:46-49)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46절) 본절로부터 49절까지는 평지 수훈 전체의 결론으로서, 참된 신자의 표는 번지르르 한 말이나 종교적인 의식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마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마 7:21). 본 구절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예수님의 신령한 교훈을 깨달아 실천에 옮기는 일에는 무관심하였던 많은 무리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넓게는 소위 외형상으로 종교 생활을 해나갈 뿐 실제적으로는 신앙의 결실을 맺지 않는 일부 맹목적 신자들 전체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수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맺어야 할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재림시에 '도무지 알지 못하는'자로서 제거되고 말 것입니다(마 7:21-23).
예수님은,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47절).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동사가 제시되는데 곧 '나아와', '듣고', '행하는'입니다. 이는 곧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원리를 순서대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1) '나아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곧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됩니다(요 1:12). (2) '듣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 10:17). (3)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약 2:17). 이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지키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곧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선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48절) 예수님의 이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와 건축 양식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으로서 일단 비가 왔다 하면 보통 사나운 폭풍을 동반하여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졌고 그로 인해 산에서 탁한 급류가 흘러내려 기초가 약한 건물들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는 폭우가 쏟아져 흘러내릴 때를 대비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기 때문에 깊이 파들어 가야 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기초를 세우기 전에 반석까지 깊이 파들어가 그곳에다 기초를 세웁니다. 이 말이 바로 전체적인 요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의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주초를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운 집이 온갖 폭풍에도 잘 견디어 내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속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구체적 삶 가운데 실천해 나감으로써 크고 작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축적하게 되며 결국에는 큰 환난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49절).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 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 있는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합니다.
‘주추 없이 흙 위에’라는 말씀에 대해서,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합니다(마 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주추없이 흙위에 지은 집은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할 것’입니다. 탁류가 흘러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냅니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합니다(고전 3:11-15).
적용: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위에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주님의 말씀을 읽고 주님의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딤후 3:16) 인간의 지혜로는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뢰하며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행해야합니다(갈 5:16). 우리의 육체는 성령을 거슬리어 행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행할 수 없습니다(갈 5:17). 성령으로 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갈 5:22-2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요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