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 왕비 시대 : 고려말(AD 1371) 배경 : 일본(日本) 대덕사소장(大德寺所藏), 고려불화로 수월관음도(水月觀音菩蔭圖)는 227.9 X 225.8cm크기이며 수월관음도는 관음보살에 어울리는 지고한 아름다움을 표출하였다. 불화의 공양을주제로 그린 불화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군중 왕실 귀족부인들의 복식을 통해 고려 왕비예복을 가늠하였다. 소장기관 : 일본 대덕사 소장 수월관음도 공양인물군중, 왕비는 높게 올린 머리에 보주식을 하고, 속치마와 속저고리를 입은 위에 운견을 깃에 끼워 박고, 소매에 여의습 장식을 한 교령대수의 겉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이를 근거로 재현한 것이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05375&mode=title&query=%C0%CF%BA%BB+%B4%EB%B4%F6%BB%E7%BC%D2%C0%E5%2C+%3Cb%3E%BC%F6%BF%F9%B0%FC%C0%BD%B5%B5%3C%2Fb%3E+%B1%D9%B0%C5%2C+%BF%D5%BA%F1%BF%B9%BA%B9&dircode=0
2.강민첨[姜民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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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고려 생 몰 년 : ?∼1021년(현종 12) 본 관 : 진주 관련전투 : 귀주대첩(龜州大捷)
고려 전기에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장군. 목종(재위 997∼1009)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전공을 많이 쌓아 입신하였으며, 대장군과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1010년(현종 1) 거란군이 침입하여 통주에서 고려군을 대파하고 곽주와 숙주를 거쳐 서경(지금의 평양)에 쳐들어오자 적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를 방어하였다. 1018년 재차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로 내침하자 대장군으로서 상장군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에서 적을 대파하고, 패배한 소배압의 군대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계속되는 거란의 침입을 맞아 그때마다 선봉으로 출전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다 한다.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 |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4848&mode=title&query=%B0%AD%B9%CE%C3%B7&dircode=0
3.화폐
고려시대 주전(鑄錢)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성종(成宗) 15년인 996년에 주철전(鑄鐵錢)과 방원적용(方圓適用)이 있으나 실제 전문(錢文)에 대하여는 알수없다. 1910년 개성부근의 고려고분에서 무문철전(無文鐵錢)과 건원중보(乾元重寶) 철전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의 형태을 갖추었지만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보아 관조전이라 여기기 어렵지만 주조전인 건원중보는(背 '東國'字) 관주전이라 여겨진다.건원중보(乾元重寶)는 중국의 당 숙종 건원 2년(759)부터 주조된 것인데, 이 전문을 모방하니 중국전과 고려전의 구별이 어려운 관계로 뒷면의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東國重寶'를 만들었지 않았나 추즉되어진다. 이는 거자(巨字) 동국중보의 서체와 모양이 거의 건원중보 背'東國' 錢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숙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등 전명(錢名)별로만 8종이 주조되었다.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2727&mode=content&query=%B5%BF%B1%B9%C5%EB%BA%B8&dircode=0
4.도교 및 신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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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의 우주론과 자연관이 궁궐조경에 미친 정보
- 도교 및 신선사상이 궁궐조경에 어떻게 표출되었는가를 도교의 우주관 자연관 등을 근거로 설명하였으며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
도가사상의 바탕은 유가사상이나 마찬가지로 중국민족이 태고적부터 지녔던 인생관이나 우주관에 두고 있었다. 도가사상이 <역경(易經)>의 사상과 합치되는 일면이 있음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적(典籍)이며 유가의 경전이라 여겨지는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속에서도 도가적인 표현이 적지 않게 보인다. 즉 도가와 유가는 우주관(宇宙觀)에서 합치되는 일면이 있다.
道家의 宇宙論과 人性論
<노자>에 의하면 ‘도(道)’란 바로 우주의 본원이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 만물이 ‘道’를 바탕으로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땅을 법도(法道)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 ‘도’란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존재한 것이며,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모체로서 영원히 변함없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의 존재나 성격은 사람의 이성으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주의 모든 존재는 ‘道’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道’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제 1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道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도(道)라는 것의 성격은 황홀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물상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희미(希微)라는 규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표현하였다. 이것들이 뒤섞이어 일(一)이 되어 있다. 또한 도(道)란 언제나 이름도 없는 것(道常無名)으로 도의 상태는 무(無 )또는 허(虛)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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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5853&mode=title&query=%B5%B5%B1%B3&dircode=0
5.김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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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170 인물 : 김대용, 이의방, 이고, 채원 신분 : 하급장교(교위), 김대용의 아들(이고의 使令) 시대적 배경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열세를 초래하였다. 무신들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여 있었다. 마땅히 무신이 맡아야만 할 군사령관직도 문신이 맡는 임무가 되어 있었다. 유명한 강감찬은 명장으로 이름 높았지만 그의 출신이 무신인 것은 아니다. 윤관이 그렇고, 김부식이 또한 그러했다. 결국 무신은 천대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 사역되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일찍이 현종 5년(1014)에도 최질(崔質)ㆍ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천대는 태평호문의 왕이라고 불리는 의종 때에 극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 의종은 태평대ㆍ환희대ㆍ미성대 등의 많은 정자를 짓고, 여기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환락을 즐겼다. 그리고는 거의 궁성에 발을 붙일 겨를이 없이 돌아다니며 향락생활에 도취하였다. 그를 따라다니는 문신들이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를 호위하고 다니는 무신이나 군인들의 신세는 비참하였다. 병졸 아닌 당당한 장군들조차도 그들의 호위병의 구실밖에 못하였다. 일찍이 무신 정중부가 문신 김돈중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운 일이 있었으며, 대장군 이소응은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무신의 난이 일어난다는 것은 단지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신난의 또 하나의 원인은 군인(軍人)들의 불평에 있었다. 군인들은 군역의 담당자로서 군인전(軍人田)을 받아 그 생활이 보장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규정뿐이었고 사실에 있어서는 토지를 거의 갖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갖고 있는 토지조차 관리들의 녹봉을 위해서 빼앗긴 일이 있었다. 전쟁뿐 아니라 평상시의 공역에도 흔히 동원되는 그들은 마치 천역의 담당자와 같이 천시되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군인들의 불평은 자라나고 있었고, 또 많은 도망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평은 거의 폭발할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무신의 반란은 의종 24년(1170)에 일어났다.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장군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이라”고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무신과 군인들의 합류는 이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켰다, 그들은 이어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명종(明宗)을 옹립하였다. 이 난에 김돈중ㆍ한뢰를 비롯한 수없는 문신이 살육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뒤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는데, 그가 죽음을 당할 때에 “문관은 모두 공모하였다.”고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앞서 화를 면한 문신들이 또다시 많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에 조위총 등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정권은 문신으로부터 무신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정권을 쥔 이후 무인들은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치를 요리하고 문신을 대신하여 고위의 관직으로부터 하위의 말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리고는 그 지위를 이용하여 문신들과 마찬가지로 사유지를 확대하여 경제적인 재부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재부를 배경으로 하고 문객(門客)ㆍ가동(家?)을 무장하였다. 군사적인 실력을 갖추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실력의 세상이 되었다. 문벌을 존중하는 문신들이 지배하던 시대와는 그 성격이 달라졌다. 그러므로 왕실과의 인척 관계가 아니라 실력의 유무가 그들의 정권장악 여부를 결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쉴 새 없이 같은 무인 사이에서 정권이 교체되곤 하였다. 처음 정권에 참여한 것은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 무신란의 3거두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중방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고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모의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고는 음모가 누설되어 탈로 나면서 이의방에 의하여 먼저 제거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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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9000&mode=content&query=%C7%D1%B7%DA&dircode=0
6.이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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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193 인물 : 김사미, 효심, 이지순 신분 : 고위 武臣 (將軍) 시대적 배경 명종 20년(1190) 정월 동경(경주) 일대에서 민란이 크게 일어났다. 조정은 해가 다하도록 반란이 진압되지 않고 점차 그 세력이 강성해지자, 12월에 비로소 중낭장(中郎將) 강순의(강순의)를 남로착척사(南路捉賊使)로 임명하고, 합문지후(합문지후) 유관을 부사로 임명하여 현지에 급파하였다. 그러나 남부지역의 반란은 진압되지 않고, 마른 섶에 불붙듯 연이어 일어나 3년을 계속하였다. 명종 23년 2월, 동남로 안찰부사 김광제(金光濟)가 토벌작전에 실패하고 관군 병력을 다수 잃은 후로, 반란세력은 공공연히 신라 부흥의 기치를 내걸어 남부 민심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렬한 세력은 운문(雲門) 지역을 장악한 김사미와 초전 일대에서 봉기한 효심의 무리였다. 이들은 단순한 오합지졸이 아니라, 벼슬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각처에 흩어져 은둔하던 자들과 죄를 지어 지방으로 유배당한 불온 세력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군은 거칠 것 없이 주ㆍ현을 횡행하면서 고을 수령까지 협박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김광제는 지방군만으로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정에 중앙군을 긴급히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월 조정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하고, 대장군 전존걸(全存傑)ㆍ장군 이지순(李至純)ㆍ이공정(李公靖)ㆍ김척후(金陟候)ㆍ김경부(金慶夫)ㆍ노식(盧植)을 지명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토벌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반란세력을 진압하게 하였다.
세부 사항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정적인 경대승이 세상을 떠난 후, 명종 14년(1184) 2월에 다시 상경하여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으며, 20년 12월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여 두경승과 함께 정계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대장군 전존걸과 장군 이지순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거느린 중앙의 토벌군은 반란 현지로 강행군하여 즉각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초전부터 패배하고 전의가 위축되었다. 왕은 다시 상장군 최인(崔仁)을 착적병마사(捉賊兵馬使)로,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임명하여 증원부대를 급파시켰다. 그래도 토벌작전은 계속 실패하고, 반란군과 싸울 때마다 관군 측은 연패를 당하였다. 토벌작전이 실패를 거듭한 데에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까닭이 있었다. 이의민이 아직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 이선(李善)은 아들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구층탑에 기어오르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도참설(도참설)에 따르면 ‘용손(龍孫; 태조 왕건의 자손)은 12대로 끝나고, 십팔자(十八子)가 등극한다’는 말이 있었다. ‘십팔자’란 곧 ‘李’자의 파자(破字)로서, 이씨가 왕씨(王氏)의 대를 잇는다는 뜻이 되었다. 이에 이의민은 본래 고향이 동경(경주)이었으므로, 은근히 신라를 부흥시켜 임금이 될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경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군 장수로 출정하는 아들 이지순(李至純)에게 밀명을 내렸다. 이지순은 아버지의 분부대로 현지에 내려가 반란군 수장 김사미ㆍ효심과 내통하면서, 관군이 기동할 때마다 그 작전계획을 반란군 측에 누설하였다. 그 결과 관군은 연전 연패를 당하게 되었더 것이다. 11월, 토벌군의 주장 전존걸은 이지순이 적과 내통하여 관군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게 분개한 그는 즉시 이지순을 처형하려 하였으나, 조정에 막강한 세력을 쥔 그 아버지 이의민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토벌작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만큼, 실패하였을 때의 문책도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만약 이지순을 군법으로 다스렸다가는 설혹 토벌작전에 성공하여 개선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이의민의 손에 죽고 말 것이고, 또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반란군의 칼날 아래 전사하거나, 아니면 패전의 책임을 덮어쓰고 불명예스러운 처벌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전존걸은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토벌군의 주장 전존걸이 자살하자, 남로착적병마사 상장군 최인은 즉시 도지병마사 고용지와 함께 부대를 재편하고, 8월 전투에서 패한 장군 이공정ㆍ김경부 등을 김존인(金存仁)ㆍ사량주(史良柱)ㆍ박공습(朴公襲)ㆍ백부공(白富公)ㆍ진광경(陳光卿)과 교체시키는 한편, 전력을 강화하였다. 명종 24년(1194) 2월, 장군 사량주가 남부지역 토벌전을 지휘하던 중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 달에 운문 지역의 반란군 수장 김사미가 관군에 투항하였다. 김사미는 군문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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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9305&mode=content&query=%B1%E8%BB%E7%B9%CC&dircode=0
7.죽주산성[竹州山城] |
본문 |
이 칭: 고죽주성(古竹州城)
시 대: 삼국
소재지: 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규 모: 둘레 3,188m
지정사항: 경기기념물 제69호
관련전투: 죽주(竹州)전투
관련인물: 송문주(宋文胄), 변이중(邊以中)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 성은 복합식 산성으로 내성·중성·외성의 3중 구조를 하고 있다. 성내 정상부(해발 250m)를 중심으로 한 테뫼식의 내성과 내성을 둘러싼 중성, 그리고 동북쪽으로 형성된 골짜기를 포함하여 축조된 포곡식의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성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류와 삼국시대 토기·기와류가, 중성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토기·자기·기와류가, 외성에서는 이들 유물이 혼재되며 나타나고 있어, 시대에 따라 공간구조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중성은 정상부와 동쪽으로 단을 이루며 내려가는 대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계곡을 감싼 성벽의 둘레는 1,688m 정도이다. 이같은 체성 외에 서벽에 잇대어서 북쪽으로 뻗은 외성이 있는데 그 길이는 1,500m 가량이고, 안쪽의 내성 길이는 270m 정도이다. 성벽 높이는 3m 내외이다. 시설물은 문지·치성·각루·포대 등이 있다. 문지는 중성에 3개소, 외성에 2개소를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문지는 성벽의 중간부에 두었으나 남문은 중앙부가 완만한 경사의 능선임을 감안하여 서벽 가까이에 시설하였고, 서문은 본성을 약 20m 정도 벗어난 지점의 외성에 설치하였다. 이는 정상부 바로 아래를 지나는데다가 주변 지세가 험한 서벽의 특성상 성문의 효용가치가 적고 방어에도 불리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의 방향이 꺾이는 곳에는 각루를 두었으며, 군데군데 치와 포대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는 비교적 넓은 대지가 많은 편이며, 장대지를 비롯하여 각종 건물지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몇 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통일신라말인 진성여왕 때에는 기훤(箕萱)이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크게 세력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죽주산성이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고려사》등의 기록에 의하면, 1236년(고종 23) 몽고의 침입이 있자 이곳의 방호별감 송문주(宋文胄)는 백성들을 이끌고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였다. 송문주는 이미 지난날 몽고군의 공격방법을 본 적이 있으므로, 갖가지 공격에 대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치며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이에 몽고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포위한 지 15일만에 물러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이곳 죽주산성에서 변이중(邊以中)·황진(黃進) 장군의 부대가 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
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9865&mode=title&query=%C1%D7%C1%D6%BB%EA%BC%BA&dircode=0
8.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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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363 인물 : 김용, 김수, 조련 신분 : 고위 무반 관리 시대적 배경 공민왕 12년(1363) 윤 3월, 순군제조(巡軍提調)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행궁 흥왕사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고종 이래 90여 년에 걸친 몽고족의 예속을 벗어나 자주적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의 관제와 풍습을 페지하는 한편, 친원 세력의 숙청, 내정 간섭기관인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철폐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하였다. 기씨 일파를 숙청한 5년(1356) 5월 그 달에, 왕은 원 제국이 중국 전역에 파급된 한족의 봉기를 수습할 능력조차 없는 만큼 요동(遼東) 일대에 군사적으로 주력할 여지도 없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자비령(慈悲嶺)-철령(鐵嶺) 이북의 빼앗긴 영토부터 회복하기 위하여 동북ㆍ서북 양계에 대규모 출정군을 파견하였다. 병마사 인당(印?)을 비롯한 신순(申珣)ㆍ유홍(兪洪)ㆍ최영(崔瑩)ㆍ최부개(崔夫介) 등 제장들이 이끄는 서북 방면군은 일거에 자비령 경계를 돌파하여 서경을 수복한 다음, 의주 교두보에서 압록강을 건너 원으로 가는 통로의 요충지인 파사부를 비롯한 요동반도의 8개 참을 공격 점령하고, 이어서 압록강 중류 남안의 임토(林土)ㆍ이성(泥城) 등, 여진족이 고려인과 섞여 살고 있던 지역까지 점령하여 고려 영토에 귀속시켰다. 또한 유인우(柳仁雨)ㆍ공천보(貢天甫)ㆍ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동북 방면군은 우선 쌍성총관부(쌍성총관부)를 공격 점령함으로써, 99년간 원 나라에 예속되었던 영흥 일대와 정평 지역, 그리고 등주 일대와 정평 지역, 그리고 등주ㆍ고주ㆍ문주ㆍ의주ㆍ선덕진 등, 몽고 침입 이전의 과거 고려 변경지대였던 군사 거점을 탈환한 다음, 다시 북상하여 함주ㆍ삼살까지 점령하여, 이들 지역을 고려의 판도에 넣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측의 군사행동에 대하여, 원나라에서는 최초 위협적인 태도로 항의했으나 고려가 전쟁도 불사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하는 수 없이 그 해 10월에 국서를 보내어 고려의 옛 강토 수복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원 나라는 공민왕의 예측대로 중국 전지역에서 봉기한 한족의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고려 서북계를 관할하던 동녕부를 요동성으로 옮기고, 쌍성총관부 지역마저 무기력하게 고려군에게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일단 도서 북방의 실지를 수복한 후, 내정 개혁에 착수하여 옛 제도에 다라 조정의 관직을 개편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군사력을 남방으로 전환하여 왜구 침입을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다. 왜구는 충렬왕 때 여몽연합군이 일본 침공에 실패한 이래로 고려와 중국 연안을 휩쓸면서 공공연히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기 시작하여, 공민왕 6년(1357) 5월과 9월에는 수도 개경에 근접한 교동까지 침입하더니, 이듬해 5월에는 각산수에 정박중인 함선 3백여 척을 불사르고, 또 한주와 진성창, 면주ㆍ용성을 노략질하고 강화 착량에 출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려가 왜구의 침입에 골몰하는 사이, 중국 대륙으로부터는 또 한 차례 엄청난 침략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하북ㆍ산동 일대에 웅거한 홍건적이 원나라 차칸테므르의 토벌군과 황하 하류에서 결전 끝에 패배하여 재차 요동으로 쫓긴 나머지, 마침내는 압록강 건너 다시 고려로 진입한 것이다. 공민왕 10년 10월, 홍건적은 자칭 평장 반성ㆍ사류ㆍ주원수 등의 지휘하에 20만이나 되는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삭주에 침입하더니, 압도적인 기세로 이성과 무주를 휩쓸고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고려군도 전부터 홍건적의 재침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한꺼번에 20만의 대군이 밀려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으므로, 황급히 부대를 청천강을 중심으로 한 박주ㆍ태주ㆍ개주ㆍ안주선으로 철수시켜 재배치하는 한편, 주민과 양곡을 모두 절령 이남으로 소개하였다. 공민왕은 안우ㆍ김득배ㆍ정휘 등 제장을 방어군 주장으로 임명하여, 현지의 이방실 부대와 방어전을 전개하도록 함과 동시에 각 도 지방군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홍건적은 안주에 집결한 고려군 주력을 기습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경-개경 통로의 요해지 절령마저 돌파하였다. 절령 성?을 탈출하여 금교역에 재집결하였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고 그 병력과 사기로는 만회할 수 없을 만큼 사태가 위급해졌다. 도성이 위험에 처하자, 공민왕은 조정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홍건적은 침박한 전란을 피하여 복주에 당도한 공민왕은 경상도ㆍ전라도와 양광도ㆍ교주 강릉도의 지방군 병력을 총동원하여 반격태세를 갖추고, 앞서 도성을 수비하지 못한 김용(金鏞) 대신 정세운을 신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정세운은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ㆍ황상(黃裳)ㆍ한방신(韓方信)ㆍ이여경(李餘慶)ㆍ김득배(金得培)ㆍ최영(崔瑩) 등 제장들과 함께 고려군 20만 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공민왕 11년 정월 17일, 개경 도성을 포위한 고려군은 혹한과 폭설의 악천후로 홍건적의 경계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첫새벽, 도성 외곽 돌파에 성공한 고려군은 아침부터 오후가 기울도록 격렬하게 싸워, 마침내는 홍건적의 괴수 사류와 관선생을 베어 죽이고 혼란 속에 빠진 홍건적을 무려 10여만 명이나 도륙하였다. 파두반을 비롯한 나머지 10만 명은 고려군 총병관 정세운이 ‘궁한 도적을 다 잡을 수는 없다.’하여 도성 북방을 터 주자, 그 길로 북상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홍건적 패잔부대는 3개월 후 또 다시 원나라 고가노군에게 요격을 받아 파두반 이하 수천 명이 참살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개경을 수복한 정세운은 복주 행재소의 공민왕에게 승전보를 올린 다음, 왕명을 기다리면서 개선 장병들과 함께 현지 수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장수들 가운데는 불안감과 불온한 공기가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은 주장 정세운이 패주하는 홍건적을 추격 섬멸하지 못하게 한 데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바로 그 무렵, 전 총병관 김용이 보낸 밀사가 이들을 찾아와 정세운을 모살하라는 왕명을 전하였다. 왕명은 김용이 꾸며낸 허위 문서였으나, 현지 장수들로서는 진위를 판별할 수도 없었고 또 고지식하고도 엄격하기만 한 정세운에게 오해와 불만을 가득 품은 터라, 세장수들은 마침내 술좌석에 정세운을 초대하여 쳐 죽이고 말았다.
세부 사항 김용은 본래 안성 출신으로 성품이 음흉하고 간사한 데다 시기심이 많아 평소부터 유능하고 우직한 정세운과 왕의 총애를 다투어 왔던 인물이었다. 그는 공민왕이 元子로서 원나라에 볼모가 되어 있을 때 시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왕이 귀국하여 즉위한 후 大護軍을 거쳐 鷹揚軍의 上護軍에 승진되었으며, 이 무렵에는 정세운과 함께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정세운이 개경 탈환전을 성공리에 끝냈다는 승첩이 당도하자, 김용은 교묘한 음모를 꾸며 최대의 정적 정세운과 함께 장차 자신에게 불리할 군부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 첫 번째 단계로 거짓 왕명을 꾸며, 현지 장수들로 하여금 정세운을 처치하게 한 것이다. 2월, 공민왕은 도성이 수복되었으므로 피난처 복주를 출발하여 귀한 길에 올랐다. 안우를 비롯한 제장들도 왕명을 받아 개선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상주목에서 공민왕의 행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김용은 은밀히 力士를 행궁 중문에 잠복시켜 놓고 있다가, 안우가 왕에게 정세운의 살해행위를 자수하러 들어서자 철퇴로 때려 죽인 다음, ‘하극상’의 죄목을 걸어 이방실과 김득배마저 잡아 극형에 처해 버렸다. 김용이 정세운을 비롯한 당대 군부 수뇌들을 모살한 것은 그의 간악한 성품과 정세운에 대한 시기심의 발로였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 보다 더 깊은 까닭이 있었다. 즉 그는 원 나라 기황후 일파와 내통하여 공민왕을 폐위 내지 제거할 음모를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민왕이 즉위 초기에 반원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기철 일파를 멸족시키자, 기황후는 원한에 사무쳐 원 순제와 아들 아유시리다라에게 졸라,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때마침 원 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옹립하도록 공작하였다. 덕흥군은 26대 충선왕의 tgj자로서 본명이 왕혜였으나 어려서부터 몽고에 들어가, 이름도 타스티무르라고 고쳤다. 그는 기황후의 비호를 받아 逆臣 최유(崔濡)와 함께 임시 정부까지 구성하고, 고려에 환국하여 임금이 될 야망을 품고 있었다. 김용은 바로 최유와 은밀히 접촉하여 덕흥군 환국 후 실권직인 판삼사사의 벼슬을 받기로 약속하고 국내에서 공민왕세력을 붕괴시킬 공작에 착수하였다. 그는 첫 단계로 덕흥군ㆍ최유의 군이 고려로 진주할 때에 대비하여 정세운ㆍ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 등 유력한 군부 수뇌들을 차례로 모살함으로써 고려 정부군의 방어전력 약화 내지는 무력화를 꾀하여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다음 단계로, 김용은 장차 기회를 엿보아 반원 정책의 주체인 공민왕을 제거하여 왕위를 공석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같은 왕족인 덕흥군이 고려에 귀국하는 즉시 자연스럽게 즉위하고 대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은밀히 사전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원나라측에서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고, 공민왕이 그 사실의 진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이부상서 홍사범을 서북면 체찰사로 파견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것은 공민왕이 환도 도중 청주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었다. 김용은 자신이 덕흥군ㆍ최유 일파와 내통한 사실이 탄로될까 두려워 조기에 거사하기로 결심하고, 공민왕의 행차를 따르면서 기회를 노렸다. 공민왕 12년(1363) 2월 11일, 왕은 마침내 개경에 돌아왔다. 그러나 도성 전체가 전란과 약탈로 파괴도어, 궁궐은 물론 민가마저 모조리 황폐하였으며, 시가지에는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므로, 공민왕은 입성하지 못하고 흥왕사를 행재소로 삼아, 궁궐이 복구될 때까지 임시 거처할 수 밖에 없었다. 김용은 순군제조로 임명받아 도성 계엄 경비 책임을 맡았다. 윤 3월 1일, 김용은 한 밤중에 은밀히 심복부하인 金守ㆍ曹連 등 50여 명의 날쌘 자객을 흥왕사 행궁으로 침투시켜 공민왕을 시해하도록 함과 동시에, 또 다른 부대를 보내어 재상들의 임시 저택을 습격하게 하였다. 김수와 조연의 흥왕사 습격대는 행궁 문을 지키던 위병을 베어 죽이고 곧바로 달려들어가, 숙직중인 시위 김한룡, 평리 왕재, 좌사윤 김태권, 환관 강원길과 위병 7, 8명을 죽인 다음, ‘황제의 명을 받들라’고 소리치면서 공민왕의 침전으로 돌입하였다. 갑작스러운 야습에 ‘황제의 명령’이라는 고함소리까지 들리자, 나머지 숙위관원과 위병들은 놀랍고 당황하여 모두 달아나 숨었다. 이 때 환관 이강달은 재빨리 공민왕을 들쳐 업고 태후의 밀실로 들어가 모포를 씌워 감추었다. 침전에 남아 있던 환관 안도치는 얼굴 모습이 공민왕과 흡사하였다. 그는 왕을 대신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왕이 누워 자던 침상에 올라가 누웠다. 이윽고 침전 안으로 들이닥친 습격대는 안도치를 왕인 줄 알고 쳐 죽인 다음, 만세를 불렀다. 김용은 흥왕사 습격이 성공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이번에는 가장 꺼리던 우정승 홍언박의 집으로 습격대를 출동시켰다. 습격대는 홍언박의 집에 다다르자, ‘황제의 명령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홍언박은 마침 흥왕사 행궁에서 변란이 터졌다는 급보를 받아 황급히 나서던 참이었다. 괴한들의 고함소리가 들리자, 홍언박과 그 가족들은 심상치 않은 사태를 짐작하였다. 가족들은 홍언박에게 피신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국의 재상이 되어서 어찌 죽음을 피하겠느가?’하더니 침착하게 의관을 가다듬고 문 밖으로 나아가 괴한들을 당당히 꾸짖은 뒤, 살해당하였다. 얼마 후 김용은 왕이 아직 살아 있고 김수?조연의 습격대가 다른 자를 잘못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심 크게 놀랐으나 태연한 기색으로 음식 준비를 시켜 올리면서 공민왕의 의심 없이 나오는 순간 다시 처치할 계략을 꾸몄다. 그 무렵, 재상들의 대부분을 묘련사에서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저택을 습격한 무리들 역시 거의 실패하고 돌아갔다. 흥왕사 행궁의 변란은 즉시 묘련사로 전해졌다. 판서 최영과 안우경?우제?김장수 등 제장들은 황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흥왕사로 달려갔다. 대문은 잠겨 있고 절간 안에서는 아직도 괴한들이 왕의 행방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여러 장군들은 적도의 동태를 살핀 다음 진입하려 하였으나, 상장군 김장수는 칼을 뽑아 잡고 소리쳤다. “적이 안에 있는데 무엇을 살펴본다는 말이오?” 그리고 혼자 문을 때려 부수고 뛰어 들어가더니, 괴한 서너 명을 쳐 죽이고 에워싸여 죽음을 당하였다. 김장수는 홍건적의 제2차 침공 당시 고향 염주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홍건적 遊軍 1백 40여기를 몰살한 공로로 상장군 겸 만호(萬戶)에 특진된 용장이었다. 김장수가 죽임을 당하자 최영 이하의 장수들은 크게 격노하여 그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돌입하였다. 김수?조연의 습격대는 삽시간에 낱낱이 사로잡히거나 참살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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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89153&mode=content&query=%B1%E2%C8%B2%C8%C4&dirco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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