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가 남긴 소중한 음악유산 중의 하나가 서정성의 극치를 보여준 '시인과 촌장'이다.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와 기타리스트 함춘호, 둘의 이상적 제휴가 만들어낸 시인과 촌장은 어지럽고 일그러져가는 시절에 투명한 소리와 시적(詩的)인 메시지로 당대 허(虛)했던 음악 감상자의 가슴을 매만지며 감동의 울림을 빚어냈다.
팀의 작가인 하덕규의 말에 따르면 동시대 록 밴드 '들국화'의 통쾌한 사운드와는 길이 다른 나지막한 사운드의 접근법이었다. (하덕규는 이전에 남궁옥분의 '슬픈 재회' 그리고 1980년대의 수작 포크송으로 기록되는 '한계령'을 써서 이미 싱어송라이터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 나지막함은 세태에 굴복하는 패배주의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통해 비상을 꿈꾸는 내면의 꿈틀거림으로 표현되었다. 들국화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면 그들은 속으로 파고들었다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1986년에 발표된 이 앨범을 시인과 촌장의 처녀작으로 여기지만 실은 하덕규는 오종수와의 라인업으로 이미 1981년에 서영은의 단편소설의 제목을 빌린 '시인과 촌장'의 앨범을 발표한 바 있다. 실제로는 팀의 2집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하덕규는 함춘호와 짝을 이룬 이 회심작에서 그 때까지 자신이 바라던 음악의 정점 이를테면 격동의 1980년대를 살아간 젊은 세대의 고민, 갈등 등 사유 일반의 음악적 결정체를 일궈낸다.
얼핏 그 은은하고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문학적 승화로 기억되곤 하지만, 그 밑에는 리얼리즘의 알레고리들이 도처에 잠복해 해석에 따라선 '저항적 표출'로도 볼 수 있다. 그 시대에 대한 예술적이지만 한편으로 리얼한 기록이기도 한 셈이다. 앨범을 여는 첫 곡 '푸른 돛'에서 이미 그 '더블 판타지'의 프리즘이 확인된다. '모두 억척스럽게 살아왔어/ 솜처럼 지친 모습들/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 드높으니/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
여기에서 하덕규는 수록곡 '비둘기에게' '떠나가지마 비둘기' '비둘기 안녕'이 말해주듯 전체를 잇는 주제어로 비둘기를 삼아, 혼탁한 시절에 무뎌지지 않는 불변의 자아와 지고의 순수를 갈구한다. '비둘기에게'에서 그는 '천진난만하게 사는 나를/ 맥 빠진 눈을 가진 나를/ 부탁해, 부탁해, 부탁해...' 라고 절규한다.
함춘호의 기타연주는 그의 언어를 더욱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얼음무지개' '풍경' 등의 곡에서 그는 물처럼 흐르면서 살포시 감겨오는 어쿠스틱 연주로, 때로는 강한 톤의 일렉트릭 기타솔로로 전체 사운드를 세련되게 채색해놓았다. '말하는' 기타가 따로 없을 것이다.
하덕규도 나중 “그가 없었다면 2집 앨범은 안 됐을 것이다. 그의 기타가 빛나는 앨범이다. 난 그때 내 노래를 연주와 편곡으로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가 함춘호였다!”고 술회한다. 대중들이 강렬하게 기억하는 시인과 촌장도 2집의 하덕규 함춘호 라인업이었다. 그 대중들의 기억에 부합하듯 2000년, 하덕규와 함춘호는 14년 만에 다시 만나 < The Bridge >이란 타이틀의 컴백 앨범을 만들었다.
'고양이' '진달래' '푸른 돛' '매'와 같은 곡은 하덕규의 단아하면서도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 함춘호의 기타언어가 완벽하게 결합한 산물이다. 갖가지의 아기자기한 실험들이 돋보이는 '고양이'와 '매' 정도만으로 앨범은 거뜬히 송라이팅의 걸작 서클의 문을 연다.
라디오에서는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사랑해요라고 쓴다' 하는 익숙한 노랫말이 등장하는 '사랑일기'가 줄기차게 사랑을 받았다. 1988년의 3집 앨범 '숲'에 수록되어 있고 나중 조성모에 의해 리메이크된 '가시나무'와 함께 그들 노래 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바로 '사랑일기'다. '풍경'은 2004년 자연을 강조한 한 아파트 CF의 배경음악으로 쓰여 지금의 기준에서도 드높은 서정적 미학이 재확인되었다.
서정성으로 쏘아올린 80년대 내면적 포크의 걸작. 포크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대언어의 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언어와 어쿠스틱 기타와의 악수라는 포크의 패턴이 갖는 역사적으로 장구한 흡수력을 이만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앨범도 없다. 실로 '노래가 있는 풍경'이다. 마음만 갖춰진다면 지금도 그 고감도 가사와 연주는 어둠 속의 등불처럼 은은히 빛을 발한다.
2005년 9월 임진모(jjinmoo.iz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