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 04. 18. 23:04
■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표음기 – 우암 송시열
(貞敬夫人 高靈申氏 墓表)
[생졸년] 1590년(선조 23) ~ 1661년(현종 2) ㅣ 壽72歲
친구 이군미(李君美: 춘전 이경휘의 자) 형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學問)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이라고들 하였다. 이미 모두가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여 모두 대부(大夫)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의 복(福)이라고들 말하였다.
이미 군미형제(君美兄弟)는 의(義)로서 임금을 섬기고 몸가짐을 법도(法度)에 맞게 하여 세상(世上)에서 이름난 사람이 되었다.
그러하니 사람들은 또 입을 모아 말하기를 아아! 그 어머니의 슬기로움이 이렇게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징험(徵驗)을 어떤이는 여러 사람들이 헐뜯음과 칭송(稱頌)함을 가지고 징험(徵驗)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듬과 흩어져 나감을 상고하여 징험(徵驗)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모두 여러가지를 징험(徵驗)하지 못한것 같으니 여러 자손(子孫)을 가지고 징험(徵驗)한다면 아마 믿을만 할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건(敬虔)히 그 묘(墓)에 명(銘)하여 기린다.
신씨(申氏)는 고령(高靈)에서 나왔다. 내 전날에 고령읍(高靈邑)을 지난 일이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상조(上祖)의 분묘(墳墓)를 숭상(崇尙)하고 있었다. 조선대(朝鮮代) 중종조(中宗朝)에 문경공(文景公) 용개(用漑)가 있었다.
옛날의 대신(大臣)들을 평론(評論)하는 사람이 이르기를 문경(文景)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처참(悽慘)했던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이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한(瀚)이고 판결사(判決事)가 군수(郡守)를 지낸 여주(汝柱)를 낳았으며 군수(郡守)는 동지(同知)를 지낸 벌(橃)을 낳았다.
부인(夫人)의 아버지 승지(承旨)를 지낸 응구(應榘)는 동지(同知)가 낳았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고, 이름이 널리 났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부인(夫人)을 만력(萬曆) 경인(庚寅) 선조(宣祖) 二十三年 서기(西紀) 一五九O年 정월(正月) 二三日에 낳았다.
승지공(承旨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딸은 여사(女士: 여자로서 군자의 행실이 있는 사람)다.
반드시 어진 선비와 짝지워야겠다고 하였다. 나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이판서(李判書)벽오공(碧梧公) 한테 시집왔다.
공(公)은 대성(大姓)인 경주이씨(慶州李氏)로 문무(文武)에 뛰어난 재능(才能)을 드러내서 명망(名望)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부인(夫人)은 집에 있으면서 진실로 효성(孝誠)과 공경(恭敬)과 착하고 온순(溫順)함을 오로지 베풀어 시어머니와 공(公)을 지성(至誠) 끝 섬기었다. 자애(慈愛)로이 비녀(婢女: 하녀)들을 주장하여 부렸으며, 진실로 친족(親族)들을 아끼고 어루 만졌다.
그리하여 시집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육친『六親: 가장 가까운 여섯 친족을 말하는 것으로 즉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를 말한다』이 모두 이를 칭송(稱頌)하였다.
공(公)의 전부인(前夫人)과 그의 시비(侍婢: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여종)가 낳아서 기르던 아이들이 대단히 많았지만 부인(夫人)은 이들을 어루만져 길러서 성취(成娶: 장가들어 아내를 얻게함) 시키고 출가(出嫁: 처녀가 시집을 감)시켜 두터운 정의(情誼: 사귀어 친해진 정)가 골고루 미치게 하였다.
이미 부인(夫人)이 낳은 자식(子息)도 있엇으나 사람들은 이들에게 한 가지라도 후부(厚簿)의 차별(差別)을 두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公)이 세상을 뜨자 부인(夫人)은 두 아들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도록 성취(成就)시키지 못한다면 저승에 가서 무어라 할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에게 잘못이라도 있으면 적지아니 꾸짖어서 반드시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야만 용서(容恕)하고 꾸짖기를 그만 두었다.
공부를 시킴에도 심(甚)히 엄(嚴)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하게 하지 않았다.
두 아들이 서로 이어서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고 아울러 지위(地位)는 낮고 봉급(俸給)은 적지만 뒷날에 높이 될 좋은 벼슬인 시강원(侍講院)이나 홍문관(弘文館) 같은 청환(淸宦) 자리에 있었으나 부인(夫人)은 매양(每樣) 공(公)을 뒤따라 가지 못하였음을 슬퍼하였다.
노경(老境: 나이를 많이 먹은 때,)에 들어 육순(六旬)과 칠순(七旬)에 여러 아들들이 작은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부인(夫人)은 이를 말려 이르기를 무슨 마음으로 기뻐하고 경사스러워 하겠느냐며, 못하게 하였다.
여러 자식들에게 부침성쇠(浮沈盛衰)가 있어도 기뻐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으며, 막내 아들이 사신(使臣)이 되어 바다를 건너 갔을 때도 부인(夫人)은 역시 태연(泰然)히 딱하게 여기는 기색(氣色)을 짓지 아니 하였다.
감정(監正=正三品)으로 있는 친정 동생과 더불어 우애(友愛)가 더욱 두터웠으며 서로 만나는 날이 조금만 드물어도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함을 자제(自制)하지 못하였다. 한 가지의 맛있는 음식(飮食)이라고 생기면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보내었다.
일찍이 공(公)이 귀(貴)히 되어 부인(夫人)도 첩지(牒紙)를 받게 되었다.
실지(實地)로 첩지를 머리에 꽃고 다니게 되니 그 존귀(尊貴)하고 영화(榮華)로움은 비길데가 없었으나 부인(夫人)은 여전히 겸손(謙遜)하고 검약(儉約)함을 스스로 지켜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현종(顯宗) 二年 신축(辛丑) 서기(西紀) 一六六一년 四月二十九日 하세(下世)하였고, 진천(鎭川) 초평면(草坪面) 용정리(龍亭里) 지전(芝田) 묘좌(卯座)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葬事)지냈고, 공(公)의 묘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대체로 부인(夫人)의 천품(天稟)은 지혜(智慧)가 밝아서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였고, 식견(識見)이 심(甚)히 높아서 의리(義理)에 맞지 않는 일이 희소(稀少: 매우 드물고 적음)하였다. 그에게 군미(君美: 춘전공)와 석이(錫爾: 화곡공)의 두 아들이 있음은 당연(當然)한 일이며, 이씨가문(李氏家門)의 명망(名望)을 크게 떨쳐 놓았다.
내 전날에 벽오공(碧梧公)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하여 묘도(墓道)에 세우고 그 선조(先祖)들의 덕업(德業)과 그 뒤를 이은 자손(子孫)들에 대하여 자세히 적었거니와 거기에 경휘(慶徽)라 이름은 곧 군미(君美)니 춘전공(春田公)으로 지금 지금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거기에 경억(慶億)이라 했음은 곧 석이(錫爾)니 화곡공(華谷公)으로 지금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내 또 감정공(監正公)의 서장(書狀)에 부인(夫人)의 묘비(墓碑)에 관해 적었는데, 거기에 이른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달(通達)하고, 의리(義理)와 화목(和睦)할 줄을 알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우리 어머니와 서로 비슷하여 어릴 때, 부모(父母)를 여의인 사람으로서 슬프고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군미(君美)와 마주 대(對)하여 우는 얼굴을 가리고서 이와 같이 썻다.
문득 또 감정공(監正公)의 서장(書狀)을 생각하니 슬픈 생각과 애통(哀痛)한 마음과 사랑이 깊은 언사(言辭)가 간절(懇切)하고. 거짓이 없었다. 소위(所謂) 한 자(字)를 쓰며, 천(千)번을 울었다. 부인(夫人)의 어짊은 오직 자손(子孫)에서만 징험(徵驗)될 뿐 아니라 또한 가(可)히 형제간(兄弟間)에 서도 징험(徵驗)된다.
명(銘)하여
옛 사람의 교훈(敎訓)에 며느리는 집안의 성애(盛哀)를 좌우(左右)한다 하였더라.
생각컨데 이씨(李氏)는 대체로 전(前)날에는 좀 애퇴(哀退)하였거니,오직 벽오공(碧梧公)이 이를 일으켰어라. 생각컨데, 강건하고 부지런하다고 혼자서 이루는 바는 없거늘. 오직 부인(夫人)이 이를 받들어 의(義)롭게 이미 공(公)을 도왔고 또 그 아들 들을 성취(成就) 시켰네.
생각컨데, 옛날 양육(養育)할 때, 이르기를 앞으로 너희를 돌보지 못할 것이라고, 너희가 애써 공부하고 노력(努力)하여 자신(自身)이 벼슬하라 하였네.
형(兄)과 아우가 반짝반짝 빛남은 학문(學問)이 깊숙한 경지(境地)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일레라.
나라를 빛냄이 대체로 이와 같이 어머니요. 아내였음을 이에서 보고 기리어 밝히노라.
우암 송시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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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貞敬夫人申氏墓表
友人李君美兄弟。早孤有文。人曰。其母氏之敎也。旣而皆占大科。皆爲大夫。人曰其母氏之慶也。旣而君美兄弟事君以義。持身以度。爲世名人。則人又交口言曰。嗟其母氏之賢使然也。夫賢否之徵。或取諸訾頌。或考諸湊解。然皆未若徵諸子孫之爲可信也。余故敬以銘其墓。申氏出自高靈。余嘗過高靈。邑人猶尙其上祖墳。我中廟朝。有文景公用漑。有古大臣風。論者謂文景而無死。則北門之禍無作也。其子判決事瀚。生郡守汝柱。郡守生同知橃。夫人之考承旨諱應榘。其出也。遊牛溪成氏門。有高名。妣淑夫人安東權氏。夫人生於萬曆庚寅正月廿三日。承旨公嘗曰。吾女女士也。必以配良士。年若干。歸于李判書碧梧公。公慶州大姓。文武全才。標望絶人。夫人在家固孝敬祥順。一移以事姑與公。慈以御婢使。誠以撫宗黨。入門未幾。六親咸稱之。公前夫人及媵御所育甚多。夫人撫養嫁娶。恩意周至。旣而自有子女。人猶未見其厚薄。及公沒。夫人抱二子泣語曰。吾不能使汝續成。吾則無以下報。故其有過失。訶責不少假。必改悔乃已。課學甚嚴。勿使少怠。及二子相繼登科。並居淸列。則夫人每以不逮公爲悲。時節慶壽。諸子稍設。則夫人止之曰。何心歡慶。諸子有升沈。不爲欣慼。季子嘗奉使越海。夫人亦夷然。不使有可憐色。與弟監正湸。友愛彌篤。相見稍疏則涕戀不自克。得一美味。雖相遠輒必附至之。嘗以公貤典受眞誥。命服在躬。尊榮無比。而夫人猶謙約自持。始卒不渝焉。辛丑四月廿九日沒。葬鎭川草坪里面酉原。與公異穴。蓋夫人天資明達。識見甚高。其於義理。不合者鮮矣。宜其有君美,錫爾而大李氏之門也。余嘗銘碧梧公徑樹。其於先德後承。詳矣。其謂慶徽。卽君美。今爲副提學。其謂慶億卽錫爾。今爲大司諫。余又以監正公狀記夫人墓石。而其所謂通書史知義宜而不欲人知者。略與吾母相類。孤露餘生。不勝愴慕。遂與君美。相對掩涕。而書之如此。抑又念監正之狀。悲思痛念。愛深辭切。眞所謂一字而千涕者。然則夫人之賢。不獨徵於子孫。而亦可以徵於兄弟也。銘曰。
古訓有之。婦者家之盛衰。惟李氏蓋嘗少替。惟碧梧興之。惟乾道無所獨成。惟夫人承之以義。旣相于公。又成其子。惟昔育鞠。謂將汝棄。爾書爾劬。爾身爾耆。爾纓爾綬。長弟煌煌。幽壼有造。邦家之光。凡爾母婦。眎此銘章。 <끝>
송자대전 >宋子大全卷二百 /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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妻祖母貞敬夫人申氏墓祭文 - 崔錫鼎 撰
玄黓之歲。攝提其辰。余時委禽。託好高門。夫人之喪。旣成練事。展拜素帷。省舅于次。慈訓之懿。梱範之純。不及升堂。徵諸見聞。眷惟我儀。夙奉含飴。載鞠載誨。以底勝笄。孰無王母。恩莫如斯。結鞶未覯。萱華遽謝。十載歡戚。倏如夢過。顧玆玄宅。在湖之西。山河隔閡。瞻省尙稽。日造明庭。濫陪八彀。禮重拜掃。情深愴舊。來薦泂酌。心焉有惕。不昧者存。鑑此顒若。尙饗。
명곡집 > 明谷集卷之十 / 祭文
▲벽오 이시발 선생 배위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