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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우정언 석탄 이존오(李存吾) 정려-경주이씨-
충남 부여군 부여읍 자왕리 384-3
이존오[李存吾, 충혜왕 후 2년(1341)~공민왕 20년(1371)]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본관은 경주(慶州), 증조는 내시흥위위장사 이예(李芮), 조부는 봉상대부 감찰사장령 이손보(李孫寶), 아버지는 승봉랑 사재시승 이길상(李吉祥) 어머니는 봉익대부 판도판서 예문관제학 방서(方曙)의 따님 온양방씨, 배위는 판도판서 민선(閔璿)의 따님 여흥민씨이다.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성균관대사성에 추증되었으며,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 의열사(義烈祠), 무장 충현사(忠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 2권이 있다.
【정려 현판 역문】
공의 휘는 존오요, 자는 순경이며, 경주 사람이다. 옹모가 단결하고 과묵하여 말이 적었고, 천성적으로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학문에 힘썼고 의분을 참지 못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나이 십 여세에 지은 강창시에 “넓은 들판 모두 물에 잠겼거늘 외로운 산만 홀로 항복하지 않네.”라 하여 식자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정몽주·박상충·이숭인·김구용·김제안1) 등의 여러 뛰어난 이와 서로 벗하여 잘 지냈다.
나이 19세(1360)에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 공민왕에게 사한으로 선출되었다.
25세(1366)에 우 정언으로 임명되었었을 때 속명이 신돈인 요승 편조가 좌도로 공민왕을 현혹시켰고 왕사가 되어 첨의부를 다스렸으며 왕과 대등하게 앉아서 조정 신하들의 절을 받았고, 말 타고 홍살문을 거리낌 없이 출입하여 궁궐을 교란하고 온 나라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려도 아무도 감히 말하지 않았다.
공이 상소를 써서 중서문하성에 가니 상소의 글이 준엄하고 강직하여 여러 사람이 두려워하고 움츠리고는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사간대부 정추에게 말하기를 “형이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라 하니, 정추도 드디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리니 왕이 크게 화를 내면서 보기도 전에 불사르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공 등을 불러서 문책하였다.
신돈이 왕과 함께 의자에 마주 앉아 있자 눈을 부릅뜨고 “늙은 중이 어찌 이와 같이 무례하냐?”라 꾸짖자 신돈이 놀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서 내려왔다. 왕이 더욱 화를 내어 순군옥에 가두고서 이춘부2)·김란·이색 등에게 신문하라 명령하였다.
고문관이 공에게 “너는 젖내 나는 어린애인데 어찌 네가 알아서 했겠느냐?” 반드시 늙은 여우가 사주했을 것이니 숨기지 말라.“라 묻자, 대답하기를 ”나라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어린애에게 언관에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히 말도 못하고 국가의 책임을 지겠습니까?“라 하였다.
1)김구용(金九容) 가계 : 판전교시사 문온공 김구용(金九容)-성천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김맹헌(金孟獻) + 이춘부(李春富)의 증손 녀가 김구용의 손자며느리이다. 김제안(金齊?)은 김구용의 동생으로 공민왕 17년(1368) 재종형제간인 밀직부사 김정(金精)과 더불 어 요승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밀고로 오히려 죽임을 당하여 김제안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김정의 후 손은 수안김씨로 분적되는 사건이 있었다. 2)이춘부(李春富) 가계 : 문하시중 양성군 이춘부(李春富)-지중추부사 정절공 이옥(李沃)-지중추부사 공소공 이사검(李思儉)-子 직제 학 이휘(李徽), 女 직제학 김맹헌(金孟獻), 김맹헌의 처 증조부이다. |
신돈은 이로 말미암아 자기와 다르고 명망있는 사람들은 모두 없애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원송수·경천흥 등을 끌어대면 죽음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자 대답하기를 ”저는 간관으로 나라의 도적을 없애려고 했을 뿐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시켜서 했겠습니까?
그리고 죽고 살고는 운명인데 어찌 남을 모함하여 나를 살리겠습니까?“라 대답하였다. 신돈의 무리가 반드시 죽이려 하자 이색이 이춘부에게 ”태조 이래로 간관을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영공(신도)이 간관을 죽인다면 나뿐 소문이 우리에게도 미칠 것입니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죽음을 모면하고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 이로부터 신돈은 더욱 사납고 거세져 온 나라 사람들이 아부하여 언로가 막혀 버렸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공주 석탄에 물러나 살았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보낸 시에 ”임금님 은총 받을 날 멀지 않으려니 석탄의 밝은 달은 자랑마라.“라 하였으니 공민왕이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깨우칠 것이라는 것을 믿은 것이다.
공이 나이 31세에 병을 얻자 좌우 사람들에게 붙잡아 일으키게 하고는 ”신돈이 아직도 기세가 대단하냐?“라 묻자 ”그렇습니다.“라 대답하니, 도로 누우면서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으리라.“하면서 자리로 돌아 왔다가 돌아가시니 공민왕 20년이었다. 공이 돌아간 지 1년 뒤에 신돈도 처형되었다.
공민왕은 공의 충성이 특별하여 대사성에 증직하였다. 공의 아들 래(來)는 나이 겨우 열 살이었는데 공민왕이 손수 ‘간관 이존오의 아들 안국(안국은 래의 어릴 적 이름이다.)’라 써서 정방에 내리고는 장기직장에 임명했다. 오호라!
이곳이 공이 애석하게 돌아가신 곳인 이른바 석탄이다. 역사에 따르면 공주 땅이지만 반월현(부여현)의 경계이고 현의 사람들이 공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공의 후손들이······하여 비록 정표가 있었으나 수풀사이로 매몰되어 어디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공의 후손으로서 삼가 건물을 다시 짓고 또 내가 지붕을 얹었다. 삼가 고려사에 실린 바에 따라 선생의 사적을 간추려 적는다.
이 해는 숭정 기원 후 갑인년[숙종 원년(1674)] 12월 일이다.
선생의 시 한 수1)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하단 말이 아마도 허황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1)이 시조는 고려 말의 문신 이존오(李存吾)가 요승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공민왕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을 때 쓴 것이 다.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을 풍자한 작품으로 이 시조에서 ‘구름’은 신돈을, ‘날빗’은 왕의 총명함 을 뜻하므로 ‘구름’이 ‘날빗’을 가렸다는 것은 신돈이 왕의 총명함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次韻金仲賢 齊?/김중현 제안의 시를 차운하다.】
不須개眼苦看書(불수개안고간서) / 모름지기 눈을 비비면서 글만 볼 것이 아니라
隨意吟揩亦自如(수의음아역자여) / 뜻대로 시를 읊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우네.
黃鳥園林春晝永(황조원림춘주영) / 꾀꼬리 우는 우거진 숲에 봄날 길기만 하니
偶然乘興愛吾廬(우연승흥애오려) / 우연한 흥취로 내집 풍경 사랑스럽기만 하네.
《출처 : 국역 고산유고/『석탄집 상 유고, 시》
石灘先生祀壇碑銘譯文(석탄선생 사단비명)
아! 선생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의 志節(지절)을 보건대 烈日秋霜(열일 추상)보다도 凜凜(늠늠)하고 泰山喬嶽(태산교악)보다도 높으니, 하늘이 선생을 낳게 한 것이 우연치 않은 것이다.
高麗末期(고려말기)에 國政(국정)이 문란하여 요망한 辛旽(신돈)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선생과 같은 直道(직도)가 어찌 협박을 당하고 夭死(요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高麗 五百年 諫官(간관) 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알게 된 것이다.
先生(선생)은 慶州李氏(경주이씨)니 新羅(신라) 佐命大臣(좌명대신) 휘 謁平(알평)으로 始祖(시조)를 삼고 휘 淑眞(숙진)은 尙書中丞(상서중승)이요, 휘 芮(예)는 監察糾正(감찰규정)이요, 휘 孫寶(손보)는 掌令(장령)이요, 휘 吉祥(길상)은 司宰監丞(사재감승)이니, 이분들은 高祖(고조), 曾祖(증조), 祖考(조고)와 및 先考(선고)이다. 婦(부)는 溫陽方氏(온양방씨) 이니 版圖判書(판도판서) 大提學(대제학) 曙(서)의 따님이다.
先生(선생)이 忠惠王(충혜왕) 2년 辛巳1341年(신사1341년)에 出生(출생)했으니 휘는 存吾(존오)요, 字(자)는 順卿(순경), 號(호)는 石灘(석탄)이다. 자품이 단정하고 결백하며 간고하고 진중하였다.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어릴 때에 驪州孤山(여주고산 : 여주 山名)에 우거했다. 十二徒(도)에 나아가 강물이 붓는 시를 지었는데 「젊은 들판이 모두 물속에 잠겼는데 고산만은 의연하게 홀로 우뚝 서있네」라는 글귀가 있으니 아는 이들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恭愍王(공민왕) 9년 庚子1360年(경자 1360년)에 國子進士(국자진사)로써 文科(문과)에 급제하고 史翰(사한)에 보직 되어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陶隱 李崇仁(도은 이숭인), 潘南 朴尙衷(반남 박상충) 제현으로 더불어 서로 좋아하여 강론하기를 빈 날이 없으니 대개 圃隱(포은)은 선생 보다 네살이 위이고 선생과 같은 과거에 급제했다.
병오년에 右正言(우정언)이 되었는데 이때에 辛旽(신돈)이 국권을 잡아 능멸하고 참람되어 괘도에 벗어났다. 恭愍王(공민왕)이 아들이 없어 德豊君 義(덕풍군 의)와 右常侍 安克仁(우상시 안극인)의 딸을 선택하여 王妃(왕비)를 삼고 辛旽(신돈과 함께 참관 하는데 辛旽(신돈)이 높은 의자에 버젓이 않아 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드디어 상소문을 초잡아 서울에 올라가 同僚(동료)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요망스런 물건이 나라를 그릇치고 있으니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여러 郞官(낭관)들이 두려워하고 움추리어 감히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이 그 인척 左司諫 鄭樞(좌사간 정추)에게 말하되 『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하니 鄭樞(정추)가 따랐다. 上疎文(상소문)이 올라가자 王이 크게 성을 내어 불사르라 명하고 선생을 불러 꾸짖는데 이때에 辛旽(신돈)이 왕으로 더불어 의자를 마주하여 앉아 있었다.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辛旽(신돈)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한고.』 하니 辛旽(신돈)이 깜짝 놀래어 부지중에 의자에서 내려오니 왕은 더욱 성을 내어 선생과 鄭樞(정추)를 巡軍獄(순군옥)에 가두고 贊成事 李春富(찬성사 이춘부), 密直副使 金蘭(밀직부사 김란), 簽書密直 李穡(첨서밀직 이색), 同知密直 金達祥(동지밀직 김달상)을 명하여 국문하라 하고 이에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그 성낸 눈이 두렵다.』 했다.
春富(춘부)등이 선생에게 이르기를『네가 이직 젓내 나는 童子(동자)로 어찌 자발적으로 알았을까? 반드시 몰래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니 숨김없이 고백하라!』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무지한 동자로 諫官(간관)에 두지 않았으니 감히 말하지 않고서 국가를 저 버릴 수가 있으랴.』하니 선생이 이때에 나이 26세였다.
이에 牧隱 李先生(목은 이선생)이 李春富(이춘부)를 조절하여 극력 신구하므로 드디어 長沙監務(장사감무)로 폄직하니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된 正言(정언)』이라 하였다. 戊申年(무신년)에 公州(공주)의 石灘(석탄)으로 퇴거하여 호를 삼고 石灘(석탄)의 노래를 지었다. 이로부터 言路(언로)가 막히고 辛旽(신돈)은 더욱 사납고 날뛰었다.
선생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병환이 위독하였다. 左右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辛旽(신돈)이 아직도 치열한가? 辛旽(신돈)이 망해야 나도 망한다.』하고 易簧(역황 : 스승이나 훌륭한 이가 죽음을 뜻함)에 이르니 이같이 하기를 두어번 하였다.
恭愍王(공민왕) 辛亥年(1371년) 5月 12日에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31세였다. 돌아간지 석달 만에 辛旽(신돈)이 베임을 당했다. 王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成均館大司成(성균관 대사성)을 증직하고 國朝[李朝](국조[이조])에 들어와서 자제 景節公(경절공)의 귀하므로 資憲大夫 鷄林君(자헌대부 계림군)을 추증 했다.
墓所(묘소)는 長湍 大德山 子坐原(장단 대덕산 자좌원)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다. 書院(서원)과 祠宇(사우)에 배향된 곳으로는 扶餘(부여)에 義烈祠(의열사)와 公州 孔巖(공주 공암)에 忠賢書院 (충현서원) 茂長(무장)에 忠賢祠(충현사)와 驪州(여주)의 孤山書院(고산서원)이요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임군의 그롤 칭찬하며 사기에 大書特書와 名人(명인)들이 지은 詩(시)가 아 ! 또한 성대 하도다.
아! 선생의 바른 학문과 곧은 기운, 곧은 충성,큰 절개는 진실로 千古(천고)에 등대할 이가 드문데 운명이 곤궁하고 시대에 맞지 않았으며 하늘이 빼앗기를 빨리하여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대를 의논하며 그 덕행을 상고하여 보면 거듭 탄식할 일이다.
高麗(고려)가 이미 망하고 太祖(태조)가 혁명하매 儒學(유학)을 숭상하고 佛敎(불교)를 배척하여 집집마다 忠義(충의)를 세우고 호호마다 節烈(절열)을 일삼아 빛나는 정치와 교화가 실상 선생이 의논한 바에 암합함이 있으니 선생의 도가 비록 한때에는 굴했으나 萬代(만대)에 펴게 된 것이다.
傳(中庸)에 이르기를『國家(국가)가 장차 흥왕하매 반드시 상서로운 일이 있다.』 하였으니 선생을 일컬음인가? 先生의 孝友(효우)가 천성에서 우러났는데 伯氏가 일찍이 도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뒤늦게 들어 알고 즉시 분상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니 시체가 이미 백골이 되어서 알 수가 없는데 선생이 백씨의 손가락이 여섯이므로 찾아 장사 지내고 드디어 관에 알리어 그 도적을 다 제거하였다.
배위는 驪興閔氏(여흥민씨)니 版圖判書 璿(판도판서 선)의 따님이고 묘소는 또한 전하지 못 하였다. 二男一女를 낳았으니 맏이는 즉,景節公 來(경절공 래)니 辛禑王(신우왕) 九年에 太宗(태종)으로 더불어 같은 과거에 급제 하였으며 뒤에 佐命功臣(좌명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이 兵曹判書 藝文館大提學 集賢殿大提學 兼世子左寶客(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집현전 대제학 겸세자좌보객)에 이르렀으며 太宗廟庭(태종묘정)에 배향했다.
다음자제 採(채)는 御史監丞(어사감승)인데 叔父 存中(숙부 존중)에게 出系(출계)했다. 딸은 權近(권근)에게 시집 갔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묘연한 나 후생이 동종의 후손으로 선생을 깊이 앙모 했더니 하루는 여러 후손들이 묘소를 실전함으로 한을 삼아 廣州(광주)의 景節公 墓山(경절공 묘산)에다 부인과 함께 단을 만들고 제향을 올리어 추모하는 정성을 펴니 실상 옛 사람의 묘소를 바라보고 설단하는 예를 따른 것이다.
일을 이미 마무리 하매 종손 鍾岳(종악)이 그 아우 鍾岱(종대)와 族弟 鍾哲(족제 종철)로 하여금 나에게 비석에 기록할 것을 요구 하면서 이르기를 『이런 등의 문자를 지금 세상에 가히 더불어 상의할 곳이 없을뿐더러 자네는 文憲公 草盧先生(문헌공 초노선생)의 후손인즉 종족의 의가 자별하니 그대를 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 청함이 더욱 간곡함으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사적이 文集(문집)과 國史 家牒(국사 가첩)에 기재된 것을 간추려 上과 같이 서술하고 銘(명)으로 이으니 銘(명)에 이르되
高麗 末(고려 말)에 忠賢(충현)은 선생이 우뚝 하였으니,
밝기는 日月과 같고 높기는 山岳(산악)과 같았네.
요망스런 중이 국권을 주름 잡으니 나라는 하나인데 임금은 둘이네.
선생이 통쾌하게 배척하니 상소로 항쟁하고 성낸 눈이로다.
買誼(매의)는 長沙(장사)에서 굴하였고 薺望之(제만지)는 감옥에 갇혔네.
물러와 감추었으니 여울 물소리 들리는 곳이었네.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니, 병은 이에 따라 위독하였네.
辛旽(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말 하였으니, 누구인들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요.
자자하게 口碑(구비)를 이루었고 빛나고 빛나게 사기에 실렸네.
정문을 세워 풍교를 심었고, 祠宇(사우)를 지어 제향을 올리었네.
굴하면 펴지고 가면 오는 것이니 이치가 어찌 어긋남이 있으리요.
요소가 실전되었으니 세대는 요원하고 한은 극진하였네.
단소를 모으고 비석을 세우니 武甲(무갑)의 기슭이네.
제수를 정성으로 받들어 千億年(천억년)을 내려가리라.
■이장사전(李長沙傳)
이존오(李存吾)의 자는 순경(順卿)이니, 경주인이다. 용모가 단결(端潔)하고, 간중과언(簡重寡言: 침중하여 말이 적음)하였으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학문에 힘써 강개(慷慨:의분에 복받친 슬픔에 한탄)하고 지절(志節)이 있더니, 나이 십여세에 십이도(十二徒)에 나가 강창시(江漲詩: 위에 보였음)를 지으니 식자들은 특이하게 여겼다.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고, 수원서기를 거쳐 사한(史翰)에 보직되니,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여 빈 날이 없이 강론하므로서 큰 칭찬을 받았다.
여러번 감찰규정에 제수되었다가 15년(1366)에 우정언이 되었다. 이 때 신돈(辛旽)이가 국권을 잡고 불법을 자행하였으며, 왕은 아들이 없으므로 덕풍군(德豊君) 의(義)와 우상시 안극인(安克仁)의 딸을 간선하여 왕비를 삼게 되자, 신돈과 더불어 같이 참관하는데 돈(旽)이 높다란 걸상에 앉아 태연자약하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존오(存吾)는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장차 논박하려 하여, 상소의 원고를 옷소매에 넣고 성(省)에 나가서 동렬(同列)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요물(妖物)이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한대 모든 낭관들은 두렵고 움추려서 감히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좌사간대부 정추(鄭樞)는 존오(存吾)의 인친(姻親)이다. 존오는 그이에게 말하기를 “형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하니 정추가 이에 따르거늘 드디어 상소를 올렸다.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은 대언 권중화(權仲和)를 명하여 읽게 하였다.
절반도 읽지 못한 채 임금은 크게 성내어 급작스레 상소를 불사르라고 명하고 정추와 존오(存吾)들을 불러 면책(面責)하였다.
이 때 신돈이는 왕과 더불어 나란히 상(牀)을 대하고 앉았다. 존오(存吾)는 신돈에게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쩌면 이와같이 무례한고”하니 돈(旽)이 황겁하여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상에서 내려섰다.
왕은 더욱 성내어 정추 등을 순군옥에 처하고, 찬성사 이춘부(李春富), 밀직부사 김난(金蘭), 첨서밀직 이색(李穡:호 牧隱, 한산인), 동지밀직 김달상(金達祥)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고, 이에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는 존오의 성낸 눈이 두려웠다.”하였다. 춘부(春富) 등은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서 상소케 한 자가 누구인가”하였다.
대답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서로 이어서 간대부가 되어 국가의 은혜를 받았는데, 이제 주상께서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정치를 위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자 온 국민이 울분과 원한에 사무침으로 언직(言職:간관)에 있으면서 침묵만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남의 꼬임을 기다린 후에 말하리오.
또한 신돈이가 국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길가는 사람들도 눈 여겨 보고 있는데 누가 시켜서 했겠는가.”하였다.
존오에게 묻기를 “너는 입에서 젖내나는 동자(童子)로서 어찌 스스로 알아서 했으리오. 반드시 늙은 여우같이 간사한 무리가 사주하였을 것이니 숨김없이 말하라.”하였다.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무지한 동자를 언관(言官)자리에 두지 않았을 터인데, 감히 말을 아니하여 국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하니 이 때 존오의 나이 26세였다.(선생이 신사생으로 병오년에 상소하여 신돈을 공척하였으니 이 때 나이가 26세였다.)
신돈의 무리가 이를 계기로 자기 쪽이 아닌 명망있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여 기어코 정추 등을 원인증거로 삼으려 했다. 혹자는 정추 등에 말하기를 “만약에 전 정당 원송수(元松壽)와 전 시중 경천흥(慶千興)이 사주했다 한다면 죽음을 모면할 것이다.”하였다.
정추는 대답하기를 “간관의 신분으로서 다만 국적(國賊)을 논박할 뿐인데 어찌 남의 가르침을 받았겠는가. 또한 죽고 삶은 운명에 있으니 어찌 남을 모함하여 모면하기를 구하겠는가. 우헌납 박진록(朴晉祿)과 좌사간 임현(林顯)이 정추 등을 순군옥에서 찾아보고 진록(晉祿)이가 나오는 길에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도 아니라고“하였다.
임현은 깜짝 놀래어 빠른 걸음으로 나오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고? 정추 등을 순군옥에 하옥시킨 것은 돈당(旽黨)이 반드시 죽이려고 하기 때문이야“라고 하였다. 이색(李穡)은 이춘부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의 광망한 것은 진실로 처벌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태조(고려 태조)이후로 5백년간에 걸쳐 하나의 간관도 죽인-적이 없는데 이에 영공(令公:신돈을 가르킴)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악성(惡聲:악한 소문)이 멀리 전파될까 두렵고, 또한 소유(小儒)의 말이 대인에게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영공께 말하여 죽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한대 춘부 등이 그렇게 생각하므로 사형을 모면하였다. 이로부터 신돈의 사납고 거셈이 더욱 심하니 재상과 대간(臺諫:사헌부, 사간원의 총칭)들은 다 신돈에게 아부하고 언로(言路:임금엑세 말을 올릴 수 있는 길)는 막혔다.
존오는 장사감부로 폄직(貶職)되니, 사람들은 일컫기를 “참다운 정언이라”하였다. 공주의 석탄으로 은퇴하자 신돈의 기세는 더욱 불꽃같이 극성했다. 존오는 나라를 생각하는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되어 공민왕 20년(1371) 신해에 병세는 위급했다.
좌우(옆사람)로 하여금 부추켜 일으키고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기세가 지금도 치열한가?”했다. 좌우들은 “그러합니다.” 말하니, 도로 누우면서 말하기를 “신돈이가 죽어야만 내가 죽을 것이다.”하고 편안히 돌아눕지도 못한 채 졸하니 나이 31세이다. 몰 후 석달만에 신돈은 처형되었다. 왕은 그의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관대사성을 증직하였다.
아들 내(來)의 나이 십세 때 왕은 친필로 간관 존오의 아들 안국(安國:來의 小字)이라 써서 정방(政房:정무를 집행하는 곳)에 내려 장거직장을 제수했다. 존오의 성품이 효우(孝友)하여 형 양오(養吾)가 외출했다가 도둑에게 피살되자 존오는 여러 달 만에 이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서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시체가 이미 부패되어 분별할 길이 없었다.
존오는 말하기를 “우리 형은 보통사람과 달라 손가락이 여섯이다.”하고 찾아서 안장한 후 관에 청하여 도둑을 잡아 죽였다.
《출전 : 「이장사전(李長沙傳)」 원문은 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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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李長沙傳
李存吾字順卿。慶州人。姿相端潔。簡重?言。早孤力學。慷慨有志節。年十餘。隷十二徒賦江漲詩。見上遺稿 識者異之。恭愍九年登第。調水原書記。選補史翰。與鄭夢周,朴尙衷,李崇仁,鄭道傳,金九容,金齊?相友善。講論無虛日。大爲人稱賞。累授監察糾正。十五年。爲右正言。辛旽當國。陵?不法。王以無嗣。選德?君義右常侍安克仁女爲妃。與辛旽共觀之。旽據胡床自若。無敢言者。存吾奮不顧身。將論之。袖疏稿赴省示同列曰。妖物誤國。不可不去。諸郞畏縮無敢應者。左司諫大夫鄭樞。存吾姻親也。謂曰。兄不當如是。樞從之。遂上疏曰。見上遺稿 疏上。命代言權仲和讀之。讀未半。王大怒。遽命焚之。召樞,存吾等面責。時旽與王對牀。存吾目旽叱之曰。老僧何得無禮如此。旽惶駭不覺下床。王愈怒。下樞等,巡軍獄。命贊成事李春富,密直副使金蘭,簽書密直李穡,號牧隱。韓山人。同知密直金達祥鞫之。乃謂左右曰。予畏存吾怒目也。春富等問樞曰。誘汝上疏者誰耶。對曰。吾父子相繼爲諫大夫。俱受國恩。今見上委政非人。將危社稷。人人憤恨。故在言職。不得??耳。豈待人誘之然後言乎。且旽擅威福。道路以目。孰使之者歟。問存吾曰。爾尙乳臭童子。何能自知。必有老狐陰嗾者。其無隱。對曰。國家不以童子無知。置之言官。敢不言以負國家耶。時存吾年二十五。先生辛巳生。丙午上疏斥旽。時年二十六歲矣 旽黨因此欲盡去異已有名望者。必欲樞等援引。或謂樞等曰。若云前政堂元松壽,前侍中慶千興嗾之。則可免死。答曰。身爲諫官。第論國賊耳。安有爲人所指乎。且死生有命。豈可誣人以求免耶。右獻納朴晉祿,左司諫林顯。見樞等于巡軍獄。晉祿將出曰。我輩不人不人。顯愕然趨出曰。是何言也。樞等之下獄也。旽黨必欲殺之。穡謂春富曰。二人狂妄。固可罪矣。然我太祖以來五百年間。未嘗殺一諫官。今因令公 所謂令公。指逆旽也。 殺諫官。恐惡聲遠播。且小儒之言。於大人何損。不如白令公勿殺。春富等然之得免。自是旽之桀?尤甚。宰相臺諫皆附旽。而言路塞矣。存吾貶爲長沙監務。國人稱之曰。眞正言也。退臥公州之石灘。旽勢益熾。存吾憂憤成疾。二十年辛亥。疾革。令左右扶起曰。旽尙熾乎。左右曰然。還臥曰。旽亡吾乃亡。返席未安而卒。年三十一。歿三月而旽誅。王思其忠。贈成均大司成。子來年十歲。王手書諫官存吾之子安國 來小字 下政房。授掌車直長。存吾性孝友。兄養吾出爲賊所殺。存吾累月乃得聞。卽奔赴將收葬。屍已成骸不可辨。存吾曰。吾兄異常。手有六指。驗之乃得以葬。請于官盡殺其賊。<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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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忠臣 石灘 李存吾의 壇碑
公의 諱는 存吾요 字는 順卿, 號는石灘으로 慶州李氏이니 新羅 佐命大臣 諱 謁平을 始祖로 삼고 高麗 28代忠惠王 2年(1341年) 辛已에 司宰監察 諱 吉祥을 父로 大提學의 따님 溫陽方氏를 母로하여 出生하였으나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京畿道 驪州 孤山에 寓居하며 學文에 힘썼고 10歲에 十二徒에 나아가 江물이 붓는 것을 보고 "大野 皆 爲沒, 孤山 獨 不降"(넓은 들판이 모두 물속에 잠겼는데 孤山만은 毅然하게 홀로 우뚝 서 있네)이란 江漲詩로 識者들을 놀라게 하고 31代 恭愍王 9年(1360) 20歲에 國子進士로서 圃隱 鄭夢周 等과 文科에 及制하여 史翰에 補職되어 圃隱 鄭夢周, 陶隱 李崇仁, 潘南 朴尙衷, 三峰 鄭道傳 等과 講論하기를 빈날이 없었고 監察糾正을 거처 恭愍王 15年(1366) 26歲에 右正言職에 있을 때 恭愍王의 寵愛를 받고 있는 妖僧 辛旽이 領都僉議 判監察로 國政을 휘두르며 임금을 無視하므로 彈劾하고저 上疏文을 올리자 王은 크게 怒하여巡軍獄에 가두고 死刑시키려 하였으나 牧隱 李穡 等의 諫請으로 死刑을 免하고 長沙監務(現 茂長)로 貶黜(폄출) 2年 後 放還되어 公州의 西쪽, 扶餘의 東쪽境界에 있는石灘에 寓居하며 나라 걱정을 하는 鬱憤으로 病이 되어 恭愍王 20年(1371) 31歲로 殞命한지 3個月 後 辛旽이 叛逆으로處刑되자 비로서 王이 公의 忠節을 깨닫고 判三司 大司成을 贈職하였고, 朝鮮朝에 胤子 慶節公(諱 來)의 榮貴로 資憲大夫의 贈職과 鷄林君에 追封되었다.
公의 憂國時調(우국시조) “구름이 無心탄 말이 아마도 虛浪하다 中天에 떠있어 任意로 다니면서 구태여 光明한 날 빛을 따라가며 덮나니"(注 : 恭愍王을 태양, 妖僧 辛旽을 구름에 비유)는高等學校 國語 敎科畵에도 실려 있으며, 墓所는 長端 大德 南山 藥師院 北이나 失傳되고 京畿道 廣州市 草月邑 新月里에 祀 設壇하여 每年 陰曆 十月 壹日 享祀를 받든다.
中宗 14年(1519) 忠淸觀察使 李世應의 狀啓로 公의 遺墟(유허)에 公의 行蹟과 江漲詩를 새긴 “高麗正言 李先生 存吾 萬居之所" 라는 短碑를 旌閭한 後 周圍에는 얕은 담을 두르고, 肅宗 5年(1679)에 紅門旌閭로 改竪하였으나 肅宗 40年 曺孫 裕慶이 禮部에 아뢰어 紅門旌閭는 子 景節公(諱 來) 祠堂이 있는 現 서울시 瑞草區 牛眠洞에 移建하고 短碑는 2008年 5月 6日 40番 國道確張工事로 이곳 자왕리에 移建하였다.
宣祖 8年(1575)에 扶餘縣監 洪可臣이 百濟 忠臣 成忠, 興首, 階伯과 公의 忠義를 後世에 알리고저 扶餘邑 東南里에 建立하여 賜額받은 義烈祠(舊頭義祠) 光海 1年(1608) 宣祖 御筆로 賜額받은 全北 高敞郡 茂長 忠賢祠, 仁祖 2年(1624)에 賜額받은 公州市 盤浦面 忠賢書院에各 配享되고, 世宗 16年(1434)에 篇撰한 三綱行實圖(朝鮮, 中國 孝子, 忠臣, 孝女 모음)에 올라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