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구미와서 길(인도)쓸어서 먹고 살았다.
극빈자(기초수급자)로 어려운형편에서도 아내와 결혼은 하게 되었고 아들 삼형제를 두게 되었습니다.
내가 못 배운 한을 때우기 위해 내 자식들은 꼭 대학을 켜서야 겠다는 일념으로 구미로 가기로 하고 이사올 화물 차비가 없어 이삿짐 보따리는 싸놓고 부산에가서 화물차 기사를 하는 이종 동생이 북쪽으로 갈 때만 기다렸다가 어느날 동생과 동생 아버님이신 이모부님의 도움으로 어머님과 아이들은 화물자 앞에 나와 아내는 의농 속에서 힘들게 1978년6월15일 구미에 오게되었다.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구미 우시장(소전걸)옆에 지붕에 스레트만 덥혀있는 판자촌에 방을 얻어서 어머님과 가족 아이삼형제 다섯식구을 두고 저는 떠돌이 신세로 밤을 지세우고 아이들은 아버지 학교는 좋은데 집이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새벽에 잠들다 께곤하였습니다.
처음 구미이사 올 때는 구미중앙시장 경찰서 담 밑에서(현제 현대유통) 리어카에다 생선 장사를 하고 어머님은 과일이나 채소장사 도로변에 한 무대기에 천원하는 장사를 하기위해서 리어커사고 했다가 먼저 생선장사 하고 있는 사람이 갱판으로 못 하게하여 고향영해에서 하든 군장품 장사를 부득히 다시하게되어 원평1동 철도변에 뱃집 한칸얻어 화랑사라는 군장품 가게간판을 걸게 되었습니다.
도로변에는 가게세가 너무 비싸서 얻지 못하고 철도변에다 헌 진열장 하나사서 예비군복 민방위복외 새마을운동 하는 장비와 모자 완장 등을 진열해놓고 오전에 (주)코오롱 구미공장에 30원하는 명찰하나 새기려고 가면 정문에서 거절당하고 회사울타리 한바퀴 돌고 가게오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척추장애6급 환자인(병원생활1년) 저는 추운 겨울에 장애자가 화랑사 가게입구에 목침대로 잠을 자다보니 춥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이루다가 통행해제 싸이렌 소리만나면 깜깜한밤에 일어나서 구미관문입구 구미주유소에서 구미중앙로 구미 역까지 구미역건너편에서 금오시장까지 인도를 새마을 정신으로 매일 썰게 되었습니다.(그때는 인도가 보도블록이 아니고 마사 흙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많이 지저분했지요)
저는 인도 쓸고 가게 들어가서 다시자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주민들께서 동사무소에나 구미시청에 전화를 해서 구미시내 인도를 누가 자고나면 깨끗이 쓸어놓는다고 신고를 하게 되었고 구미시청에서는 그 사람 찾아라고해도 아무도 저를 못 찾았답니다. 새벽에 쓸고 들어가서 다시 자버리니까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구미화제가 되었다는데 저만 몰랐습니다.
어느 날 캄캄한 밤에 길을 쓸고 있는데 누구신지 날좀 보자고해서 보니까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이신 노모 씨가 화랑사 사장님이시군요. 잘 알았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때가 한 3개월 쓸었을 때입니다.
그 후 2.3일 뒤에 구미시청 H모 총무과장님 B모 새마을과장님 원평1.2동장님과 관계공무원님이 10여명이 저의 작은 가게에 오셨습니다.
H모 과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어디서 왔어~~ 영덕서 왔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H모 과장님 아니~
처음에는 죄지은 건 없어도 겁이 나더라고요. 70년대는 공무원이 양복입고 넥타이 메시고 시민들보고 반말했습니다. 병원의사선생님도 환자보고 반말했습니다.
그다음에는 구미는 왜왔어~~ 아이들 교육시키러 왔습니다.
또 길(인도)은 왜 쓸었어? (어떤 어도로…….목적을 가지고) 길을 쓸었느냐)~ 저는 교통사고 장애인입니다. 보시다시피 잠자리는 춥고 허리는 아프고 해서 박정희대통령님의 새마을 정신으로 길을 쓸었습니다.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 하시고 가게를 둘려다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뭘 취급하느냐 하시더니~
어이 B과장 이것좀사~~ 하시면서 새마을 모자 얼마요? 250원부르니 500원 받으라 하시고, 1,000개, 어깨띠 150원 부르니 300원 받으라 하시고,1.000개.외에 모두 작은 짐차로 한차 납품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거래처가 있었는데 다 끊어지고 총무과에 책상하나주면서 각읍면동 사업소에 방송해서 화랑사 사장이 총무과에 있으니까 다른곳에 하지말고 화랑사에 하라고 방송도 해주시고해서 그 다음해에 전원도시5개년계획 1차지구 연립주택 20평 내 집을 마련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입주하게 되었습니다.(어머님께서 우시더라고요 어머님 왜 우십니까? 내가 너무 좋아서 운다.)
나중에 알고 보니 J모 시장님께서 그 사람 찾아서 잘사는 사람이면 감사패를 만들어주고 못사는 사람이면 좀 도와주라고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후 새마을 조기청소회도 운영하고 구미관문에 있는 쓰레기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 이전했습니다.(현.한촌설렁탕앞) 그해 8월15일 구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J모 시장님으로부터 깨끗한 시민 상을 받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시장님께서는 저의 가게 앞에 오셔서 10짜리 명찰 쟁이인 저를 시장님 차에 태우시고 구미공단 대기업 사장실에 가셔서 저를 소개 시켜주시고 같이 놀아주시고 이분 이런분이니까 좀도와주세요 부탁하시고 각기관장님과 공단기업체대표님으로 구성된 한마음 테니스회 회장 이신 구미시장님께서 부족한 저를 한마음테니스회 회원으로 참가시켜 각 기관 단체장님과 각기업체 대표님께 소개와 많은 도움을 받게해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후임시장님께 부족한 저를 인사시켜주시고 구미를 떠나신 시장님들께서 대구 경주지역 시장님으로 계시면서 운동도 같이하시고 하시다가 몇 분은 벌써 고인이 되시기도하였습니다.
한 가지만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시장님과 공단 모 D전자주식회사 P모 이사님과 같이 있으면서 저가 시장님과 P이사님은 노셔도 월급 나오지만 저는 10원짜리 명찰 새기려 가야합니다. 보내주십시오 하면 어이 P이사 권사장 10원짜리 소리좀 못하개 하는 방법없나 하시니까 P이사님께서 “지금이라도 당장나가서 큰 창고만 하나 얻어라 그러면 내가 일거리와 사람까지 다보내줄 테니까 돈만 챙기면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자 전자도 모르고 인력관리도 안해본 사람이 큰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나 우리 아이들이 누애 한잠 먹는 시기인데 대학 못시킨다는 생각 때문에 자제하게 되었고 시장님은 명만 받으시면 구미 떠나가시고 P이사님도 그때 7년계셨는데 모두 가시고나면 나는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시장님께서는 후임시장님께 인사시켜주시고 P이사님께서 15년 구미공장에 계시면서 저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 후에 가끔은 조립공장 생각이 나더라고요 후회는 늦다는 말과 같이요. 포기 잘했지요? 10원짜리 명찰쟁이 끝까지 잘해서 우리 아이들 대학도 무사히 잘 시켰고요. 아니면 지금쯤 여기 이 자리에 있지 않고 미국이나 해외 휴양지어느 나라나 서울에 있으면 오늘 여러 선생님들 뵙지 못하잖아요 여러분 저 전자공장 포기 잘했지요?
마지막으로 구미관문이고 금오산도립공원 입구이기도한 금오산 사거리가 옛날에는 사방이 꽉 막혔습니다. 철도지하도 정비공사는 저가 수년간 지역 국회의원에게 매달리고, 제2금오교 교각확장공사는 건설국장에게 수차 건의하면서 저가 한말은 “나는 이주위에 땅한 평 없다”고 하고 몸부림 처서 오늘에 훤한 금오산 사거리의 모습입니다.(준공식할때는 저들끼리 하더라고요. 제가 10짜리 명찰쨍이 엿잔아요)
지금도 저는 구미에 지나다니면서 관심있게보고 생각하고 관계부처에 늘 개선 부탁을 하고 현제는 제3금오교 교각확장공사도 수년전부터 또 며칠전에도 건의해 놓고 지켜보고 있습니다.만 가까운김천시에 가보세요 시내를 통과한 수많은 일제때 철도 교각을 모두다 정비했는데 구미시는 전국체전을 앞두고도 원평2동 e편한세상@ 방향 철도교각정비와 시민운동장앞 좌우 철도지하도 확장공사는 전국체전 교통란해소 문제도있고 지하철도확장 정비할 생각도 안하는것 같아서 시민으로서 구미시청이나 구미시의회 구미시체육회보기를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위 사업은 저는 무지해서 잘모르지만 구미시 예산 10원도 안들고 모두 국비로 할수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미시민 여러분!
아직도 전국체전이 1년 이상 남았습니다.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봉사정신이 투철하이 모습 참 아름답습니다. 인생 성공에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