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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연애한다
낙서 아래에 댓글 한 줄을 무심히 달았다가 그야말로 먼지 나게 맞던 열세 살 순임이의 사연이다. 기실 한 줄도 되지 못한다. 수수꽃 긴 다리 용자가 습자지 뒷장에 끄적거린 문장을 보고 그 아랫줄에 맞장구 채운 글자 수는 달랑 ‘헐, 대박.’ 딱 세 글자뿐이다. 그다음은 모두 잊었다. 그때까지 모처럼 머리를 꽉 채운 고난도 산수 문제를 해결하느라 자기가 댓글 단 내용조차 깜빡 잊었던 것 같다.
그 세 글자에 50대를 맞았으니 글자 하나에 열일곱 대씩 두들겨 맞고도 한 대가 남은 셈이다. 울 수 있는 틈도 없었다. 매질의 억울함보다는 이 자리를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급했다. 또 있다. 매질 이후에도 무용님의 집요한 항복 요구에 꽁꽁 묶인 것이다. 반성문 석 장을 한 시간 이내에 앞뒤 꽉 차게 만드느라 여기저기 글자를 끌어오면서 정신이 없었을 뿐이다. 앞뒤 빽빽하게 적어냈는데 쑥 훑어본 다음 홱 집어던져서 마루에 엎드려 다시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 사실 아직도 매를 맞은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유를 명징하게 드러내야 했고 아프게 반성하는 내용을 구구절절하게 적어내야 했다.
솔직히 이유를 모르기는 다른 매질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저 스승님이 손바닥 날리기 좋도록 뺨을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기울여주는 것이다. 막대기를 들면 엉덩이를 불쑥 올려주었고 종아리 걷으라면 책상 위에 올라가 회초리 때리기 좋은 자세로 바지를 걷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막대기가 떨어질 때마다 곤두벌레처럼 이리저리 비틀며 종아리 박박 문질렀다. 때리는 스승도 킬킬 웃었고 구경꾼 아이들도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렸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맞은 게 입학 직후 두 달째인 1963년 5월이니 벌써 5년이 지났다. 뺨에 불이 번쩍 터졌지만 순임이는 눈물도 흘리지 못했던 것 같다. 헌병대 출신인 윤기석 담임님이.
“이순이. 나와.”
창밖으로 아카시아 하얀 꽃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봄꽃 풍경에 빠지느라 그 소리를 깜빡 놓쳤다. 해방 직후인가 6.25 사변 전후 미국 어디선가 들여온 수입종 나무인데 가장 번식력이 좋다고 들었다. 가시가 많고 꿀벌들이 윙윙 몰려들었으며 자라는 속도도 빨랐지만 무엇보다 씨앗이 빨리 퍼졌다. 그래서일까, 한머리 과수원집도 아카시아로 울타리를 바꾸었고 담장이 없는 학교도 아카시아로 바리게이트를 쳤다. 배고플 때 하얀 꽃송이를 입에 넣어 공복을 채우면 단맛이 나기도 했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혓바닥이 맵고 아렸다.
“이순잇! 너 이 새끼 안 들렷!”
아차, 교실 출석부에 이순임이란 이름 대신 이순이로 적힌 걸 깜빡한 것이다. 그렇게 입학 초기에는 ‘이순이’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누가 불렀을 때도 멍하니 놓칠 때가 많았다.
진짜 ‘이순이’는 개울 건너 언덕길 양지편 옴팡집에 사는 셋째 딸이다. 순임이보다 세 살이 많은데 열한 살이 넘도록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순이 언니인 순자와 순옥이도 모두 학교에 입학을 시키지 않고 대처의 애보개로 보냈으니 순이도 입학 대신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순임이와 그 또래 아이들이 등허리에 책보를 두르고 언덕길 고샅을 넘으면 순이는 혼자 목화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오가며 눈인사를 나눈 적도 있긴 했지만 이름 글자가 받침 하나 차이로 비슷하다는 것뿐 전혀 친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담임님께 그 사실을 알릴 방법이 없다. 아무튼 특히 가난하고 못생긴 아이들을 잘 때렸으니 이번에도 맞을 게 확실하다.
한머리 이장님도 문제였다.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지기는 했지만 막걸리 한 잔만 마시면 정신을 못 차리던 주정뱅이 체질 탓이다. 그렇게 마을 아이들 출생 신고를 몇 명이나 놓치고도 쬐끔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허허실실 웃으면 그게 끝이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이장이 면사무소에 가서 대리로 출생을 신고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나중에는 아예 깜빡하는 것이다. 모내기 하다가 까먹었고 막걸리 마시다가 잊어버리기도 했다.
이순이의 신고를 놓쳤다가 3년 후 개울 건너 순임이가 태어났을 때 한꺼번에 신고했는데 그마저 두 아이의 이름을 뒤바꾼 것이다. 노라실 사는 정태권이도 마찬가지였다. 3년 뒤에 태어난 동생 정태철과 동시에 호적에 올려 서류상으로는 형제가 쌍둥이처럼 동갑내기가 되어버렸다. 호적 오류 피해자 부모들도 한두 마디 불평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쓰뭉하게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이순잇!”
여덟 살 순임이가 그제야 아차, 하며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왜 위문엽서 안 내냐굿?”
아버지 이봉구 씨가 위문엽서를 돌돌 말아 담배를 피워버린 걸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담배 이름은 풍년초였다. 건조 시킨 입담배를 누런 봉투에 담아 팔았는데 근동의 농투성이 대부분이 그걸 피웠다. 그마저 없으면 햇볕에 바싹 말린 입담배를 비벼서 가루를 내어 연기를 날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풍년초 담배가루를 신문지에 쏟아서 길게 말아 침으로 둘레둘레 붙인 다음 성냥불을 켰다.
이봉구 씨는 원래 밥상을 물리자마자 담배부터 피우는 체질이다. 그날도 개다리 밥상을 물린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려다 신문지가 눈에 띄지 않자 순임이가 쓴 국군장병 위문엽서에 둘둘 말아 담배 연기를 날렸다. ‘안 돼윳!’하고 달려들다가 아버지의 통빤쓰 사이로 성기가 덜렁덜렁 보여서 짐짓 멈춘 것이다. 이상하다. 가끔 보았던 아버지의 몸이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껴 재빨리 고개를 돌렸는데 그 사이에 어느새 위문엽서를 담배 연기로 날려버린 것이다. 담배 연기를 빨아댈 때마다 ‘국군장병 아저씨 덕분에 저희들은 안심하고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란 연필 글씨가 바싹 타면서 허공에 폴폴 날아가 버렸다. 막아내기엔 이미 늦은 건데, 스승님은.
“위문엽서 내라구, 임마! ”
“아부지가 둘둘 말아 담배 피웠는유.”
담임님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보더니.
“그걸로 왜 담배를 피워. 정신이 있는 거여?”
“지가 피운 거 아닌디유.”
“누가 뭐래나? 어디 말대꾸를……너, 원래 그러냐?”
“네.”
‘네’라는 대답은 진짜 무심결에 나온 소리였는데.
짝.
번갯불이 번쩍 튀는 찰나 오른쪽 볼이 아리고 시렸다. 말대꾸를 잘못해서 맞은 건지 아니면 아버지의 뺨 대신 분풀이로 때린 건지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다. 그렇게 교탁 옆에서 10분가량 무릎 꿇고 손을 들었던 것 같다.
“들어갓. 이름도 앞뒤로 똑같은 게.”
‘이장님 땜이 호적이 바뀐 건디유.’ 라고 대꾸했으면 또 싸대기 한 대를 더 맞았을 것이다. 덜 맞는 방법은 일단 스승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하고 눈에 띄었더라도 말대꾸를 말아야 한다.
수요일마다 수업하러 오는 무용님 정미정 선생님도 이름이 앞뒤로 똑같다. 그랬다. 고요하고 조금은 칙칙한 시골 학교에 늘씬하게 쫘악 빠진 몸의 여신이 나타난 것이다. 진눈깨비 내리는 3월 어느 수요일, 하얀 코트에 노란 우산을 쓴 멋쟁이 여자 선생님이 짠, 하고 나타나면서 음산했던 교정이 환하게 빛을 발했던 것 같다. 키가 큰 여자도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또 하나, 얼굴 예쁜 여자가 마음도 예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동화책 여주인공들의 인물과는 사실이 다른 것이다. 아무튼 오자마자 5,6학년 중에서 키가 큰 여자아이들만 뽑아갔으니.
수요일 오후마다 3학년 이상이 각자 특활반 찾아가던 그 행사의 연장이다. 시인 지망생 강철이는 문예반, 농부가 되겠다는 민구는 원예반, 숫자 계산이 워낙 빠른 순임이는 주산반, 공차기를 좋아하는 관모는 축구반, 키다리 용자는 무용반 소속으로 흩어졌다. 무용반은 운동회를 두 달 앞두고 갑자기 만들어졌는데 특별히 읍내 무용학원 선생님을 모시면서 다른 부에서 중간에 따로 뽑아서 강도 높게 연습한다고 했다.
그 정미정 선생님이다. 유독 수수처럼 늘씬한 상급반 여자애들로만 따로 뽑았는데 두 살 많은 동급생 용자도 그 소속이었다. 용자는 키가 큰 만큼 몸도 달랐다. 작년 5학년 신체검사 때는 용자의 강력한 거부로 여자아이들의 가슴둘레 검사 때 옷을 벗지 않게 되었는데.
1학년에서 3학년 때까지는 여자애들 모두 거리낌 없이 윗도리를 벗고 오그르르 줄을 서서 재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4학년이 되면서 몇몇 소녀들이 소극적으로 반항을 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윗도리 벗은 채 가슴둘레를 재었다. 소녀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앙가슴 부분의 노출을 최대한 가렸지만 뒤를 돌아서자마자 낄낄대기도 했다.
5학년이 되면서 여자아이들의 반응이 또 달라졌다. 시력과 청력 검사가 끝나고 키를 재거나 몸무게 측정까지도 약간의 술렁거림만 있었을 뿐 그럭저럭 넘어간 것 같다. 그런데 가슴둘레 검사의 첫 대상자인 용자가 강력하게 거부한 것이다. 출석부 번호가 생년월일이 빠른 순서대로 적혀 있었는데 나이가 가장 많은 용자가 첫 번째 번호였으므로 그 순서에 따라 맨 앞에서 측정을 해야 했다. 6학년 담임님인 기종환 스승님은 원래 마음이 모질지는 못했다. 용자가 강력하게 거부하자.
“그럼 안 되는디.”
머슥하게 종용했을 뿐이다.
“싫유.”
“정확하게 재야 하는디. 워쩐댜?”
“죽어두 못 벗유.”
그 말을 터뜨리자마자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기 스승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망상망상하다가.
“그려, 용자는 나이두 많구 허닝께 옷 입구 재는 걸루 하구 나머지 뒷사람부터 원칙대로 측정허자. 정확히 허지 않으먼 생기부에 그짓말루 기록헤야 허니께……여러분의 몸이 가짜루 기록되먼 안 되잖남?”
그러자 뒤쪽 번호 조무래기 소녀들도 우우우 들고 일어났다.
“왜 용자만 안 벗구, 우리는 벗으야 한 대유. 용자가 벗으먼 몰라두 우리끼리만 벗는 건 말두 안 되유.”
“용자는 나이가 많잖니?”
“나이 때문에 인권 차별을 헌대유. 우리두 죽어두 못 벗유.”
“아직 젖 안 나왔는디…….”
푸하하하하. 소녀들이 얼굴을 빨갛게 달구면서도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결국 가림막 속에서 메리야쓰만 입고 가슴둘레를 재기로 합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순간.
쿠쿵.
뭔가 지붕에서 호박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려 모두 화들짝 놀란 것이다. 바깥으로 쫓겨나갔던 사내아이들 중 몇몇이 살구나무에 올라가 훔쳐보다가 미끄러진 것이다. 동만이 엉덩이 아래에 깔린 건 병구다. 추녀 아래 널브러진 채 인상을 찌푸리는 병구도 악동 중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존재답게 별명도 ‘찌질놀부’였다. 그랬다. ‘호박에 말뚝 박고 우물 속에 똥 누고 똥 누는 아이 주저앉히는’ 그 놀부의 판박이가 틀림없다. 덩치 큰 사내아이들한테는 눈치나 살살 보지만 작은 아이들이나 툭툭 건드리곤 했는데 특히 여자애들을 잘 괴롭혔다. 고무줄을 끊거나 오자미를 낚아채 튀기도 하고 치마를 올리고 도망치던 그놈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공회당 벽에 붙인 박정희 후보의 눈동자에 못 자국을 내고 윤보선 후보의 입술에 사금파리 조각을 내었다.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막상 이장님이 사색이 된 채 범인을 찾을 때 순임이는 차마 고자질도 못한 채 슬쩍 피해버렸다.
그놈이 오늘은 여자들 알몸을 훔쳐보려고 살구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졌으니 조금은 고소한 마음이다. 그래도 꿀밤 몇 대로 끝냈으니 기 선생님은 확실히 착한 성품이다. 그랬다. ‘김’에서 ‘ㅁ’이 떨어져나간 ‘기’스승님은 마음이 너무 약해서 절대로 악동들의 버릇을 고쳐주지 못한다. 때리지도 않고 만화책을 보다가도 눈물을 글썽이니 틀림없이 불량 아이들이 가장 만만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치고.
순임이가 3학년 때이고 세 살 더 많은 열세 살 순이 혼자 또 목화밭 매던 봄날이었다.
“나도 맞아보고 싶다.”
그 소리가 어리둥절한 것이다. 함께 밭을 매는 동네 아줌마보다 순이의 키가 조금은 작지만 눈높이가 얼추 비슷할 만큼 컸을 즈음이다. 그 못 배운 순이가 진둠벙 여울에서 발을 닦고 있었고 하굣길 순이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중이었다.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으니 선생님한테 맞아본 경험도 당연히 없단다.
“내 이름이 느이 학교에서는 네 이름이라매?”
괜시리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는 순임이의 머리카락이 여울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우지끈 뚝딱. 까치 몇 마리가 날개 치면서 삭정이 하나가 툭 떨어진다.
“구구단 못 외워 손바닥두 맞구 싶지먼……시방은 돈을 버는 게 가장 중요혀.”
하필 불쑥 튀어나온 말이.
“오또케 벌 건디?”
“뭐든지 헤야지. 시방은 어려서 안 되지먼 나이만 채우먼 공장에 가든 버스 차장을 하든 식모로 가든 아니면 술집이라두 나가야지.”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빗줄기 하나가 툭 떨어졌다. 소나기는 이렇게 한두 방울 떨어지다가 갑자기 후두두 쏟아지므로 두 소녀는 짚누리 쪽으로 피해서 수수깡을 뒤집어썼다.
“술집은 나쁜 덴디.”
“돈을 벌으야 허닝까……돈이 된다면 뭐든지 헐 거여.”
“빨개 벗으라먼 어쩔 거여?”
수숫대 위로 빗물 쏟아지는 소리가 총소리처럼 탕탕탕 들렸던 것 같다.
“벗는 거지.”
삼 년 후 순이는 실제로 즈이 엄마가 문을 연 신작로 대포집에서 막걸리를 따랐다. 색시가 예쁘다면서 거문면 아저씨들이 자주 들락거린다니, 어리둥절한 일이다.
읍소재지 차부 뒤쪽에서 운영하는 ‘훌라라 무용학원’은 간판을 달자마자 수강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소문이 돈 상태이다. 그 스타 무용 강사께서 완행버스로 수요일마다 거문초등학교 수업을 자원한 특별 서비스는 발이 워낙 넓으신 윤기석 선생님 덕분이란다. 생머리가 출렁일 때마다 뽀얀 목살이 뽀송뽀송 드러나던 신데렐라 아가씨 그 선생님이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 전나무 울타리까지 화사하게 변했다.
가세연 선생님처럼 장롱다리도 아니고 서숙자 선생님처럼 웃을 때마다 우수수 퍼지는 주근깨도 없는 데다가 옷차림까지 반짝반짝 빛을 내니 확실히 우아했다. 까치발 선 채 발가락 끝을 뒤로 올려 손바닥으로 잡아당기면 잘룩한 허리가 활처럼 꾸불텅 휘어졌다. 미루나무처럼 쭉쭉 뻗은 종아리를 귓바퀴까지 올려붙이고 허리를 팽그르르 돌릴 때면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학처럼 우아했다. 원래 기계체조를 하다가 무용으로 전공을 바꾸어서 몸이 더욱 유연하단다. 그래서일까, 양팔을 뒤로 제키고 뒤로 연달아 폴짝폴짝 재주넘을 때는 뱀처럼 매끄럽게 흐물거렸다. 그렇게 학처럼 우아한 몸에서도 악마의 마음이 숨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안 것이다.
순임이는 산수를 잘했다. 2학년 초기에 교실에서 구구단을 가장 먼저 떼었고 3학년 때 수요일 특별활동 주산반에서도 이름을 날리면서 확연히 두각을 나타내었다. 덧셈 뺄셈은 물론 서너 자리 수를 나누고 곱해도 짧은 시간에 해결하였다. 4학년이 되더니 암산도 잘해서 담임님의 성적표 계산까지 도맡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과목 성적은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서 반에서 10등 안에 드니 석차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다. 담임님도 우등상을 타지 못하는 순임이를 보며 조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상하다. 산수를 잘하는 걸 보면 순이가 필경 머리가 좋은 아이인데.”
6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꿈이 생겼으니 수학 선생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한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처음으로 알아낸 것이다. 칠판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면서 월급 받아 쌀도 사고 라디오도 사면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 집에서 상급학교에 보내주느냐가 문제이다. 그러다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읍내 여고에 다니는 쇳밭둑 성숙이 언니가 들려준 부설학교 이야기에 솔깃한 것이다. 아산이나 대전 공단에 가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기숙사 학교가 있다고 귀띔해주면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만약에 중학교만 졸업할 수 있다면 부설학교 야간반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학을 가겠다고 마음만 먹어보았다. 장래희망 란에 ‘중학교 수학 선생’이라고 써놓으니 마음이 더 깊이 쏠렸다. 아버지 이봉구 씨가 ‘공부만 잘하면 대학까지 보낸다’고 큰소리치는 걸 믿을 수 없으므로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무용부 상급반 소녀들 모두 미루나무처럼 키가 커서 모여 있을 때는 얼핏 중학생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나이 많은 용자가 허리를 뒤로 제키면 메리야쓰 위로 봉긋한 가슴도 살짝 도드라졌다. 그렇게 키가 큰 소녀들도 어여쁜 무용님의 카리스마 앞에서는 벌벌 떨었다. 장밋빛 새빨간 입술에서 욕설이 터질 때마다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이다. 운동회 오후 오픈식 때 전교생과 부모님 모두의 눈을 기쁘게 하기 위해 피땀을 쏟아야 한다며 혹독한 연습에 적응하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승님의 인정사정없는 회초리를 잘도 견디며 발끝을 세우고 몸을 돌렸는데.
‘엽전들은 맞을수록 잘 돌아가는 거여.’
매를 맞은 만큼 실력이 쑥쑥 늘어간다는 농투성이 아저씨들의 주장처럼 또 다른 구경꾼 스승님들의 칭찬도 자자하게 퍼졌다. 마찬가지였다. 아이들도 스승의 회초리가 ‘사랑의 매’라는 걸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분 기종환 선생님만 달랐다.
어느 날 착한 스승 기 선생님이 습자지 한 장씩 주면서,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써 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마음이 더욱 약해지면서 ‘많이 때려주세요’, ‘아프게 때려서 가르쳐 주세요’ 심지어는 ‘선생님이 때리지 않으니까 아이들 버릇이 나빠지는 거예요’라고 하소연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또 이상하다. 아이들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기 스승님께서 우울한 표정으로.
“너희들은 왜 자꾸 때려달라고 하는 거냐? 너희들의 몸은 소중한 거야. 누구한테도 함부로 맞으면 안 되는 거여.”
겨우 그런 말을 던지며 한숨이나 뿜으니 모두 갸웃갸웃하는 것이다. 춥고, 배고프고, 맞으면서 공부해야 텅 빈 머리가 쏙쏙 채워지는 건데 웬일로 선생님께서 그걸 반대하시다니.
언제부터였나, 6학년 여자애들부터 미끄럼틀 아래에서 수군대기 시작하는 게 수상한 것이다. 철봉대 아래건 뽕나무밭이건 모이기만 하면 조조조 수다를 떠는 내용은 ‘선생님이 연애한다’였다. 그래도 순임이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빨리 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보고 싶을 뿐이다. 무용실에 놀러갔을 때 용자가 산수공책의 낙서를 보여주며.
'순이야. 선생님끼리 연애한다.'
순임이도 열세 살이 되면서 연애라는 단어를 새롭게 떠올리긴 했을 즈음이다. 윤기윤 선생님이 짝꿍이라는 풍문이 얼핏 들리긴 했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네 명이나 달린 유부남인데다가 내년에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므로 어이없어했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승들끼리의 연애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수제비처럼 슝슝슝 퍼지는 것이다.
윤기석 스승님이 최근 노름도 끊고 아령으로 몸의 근육을 만드는 것도 그 이유라고 했다. 수요일 오후마다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운동장 평행봉에 체조 자세로 뛰어올라 물구나무섰다가 으랏차차 한 바퀴 회전하는 것도 순전히 무용님이 수업 나오는 시간에 맞춰 폼을 잡는 거란다.
솔방울 팔고 오던 차순이가 먼저 퍼뜨렸다지만 읍내 버스로 함께 오던 6학년 소녀들 세 명도 함께 보았다는 소식통이다. 수업이 끝나고 상급반 가난한 소년 소녀들이 책보를 던지고 동산에 올라갔던 그날이다. 산지기의 눈만 피하면 매달리거나 떨어진 솔방울들이 따고 줍는 대로 모두 돈이 되었다. 하굣길을 마친 후 사내들은 등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솔방울 가마니를 운반하러 오그르르 산에 올랐다. 한 가마니를 팔면 30원을 받았으니 읍내까지 완행버스 왕복 차비 10원을 제외해도 20원이 남는 것이다. 그 돈으로 크레용과 습자지도 사고 고무줄놀이도 할 수 있었다.
스산 차부 은하다방 뒷골목에서 아, 분명히 보았다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맥고모자로 귀를 덮은 멋쟁이 중년의 스승이 미니스커트 무용님 이맛살 가까이 붙이더니 귓속말로.
‘물솥 내려놨니?’
‘걱정 끄셔.’
꺼진 가로등 아래로 땅거미가 썩은새처럼 몰려들 즈음이다.
‘방 식으면 어쩌려고?’
‘번개탄 두 개 있어.’
그 대화 내용을 쪼개고 짜 맞추며 온갖 부정한 소문을 부풀리며 상상에 빠지곤 했다. 근엄한 스승님끼리 골목길에서 이마를 바싹 붙인 전봇대 풍경도 신기하지만 설핏 귀를 스치는 반말 투가 도대체 생경한 것이다. 문풍지 너머 몇 다리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그 뒷담화를 들은 용자가 산수공책 뒷장에.
‘무용님이 미술님하고 반말도 하더라. 이젠 틀림없지?’
그렇게 적는 용자의 가슴에서 경운기처럼 덜덜덜 요동치는 소리가 들린 것도 수상하다. 순임이는 용자의 손끝이 자르르 떨리는 이유를 전혀 모른 채 무심히.
‘헐, 대박.
댓글 세 글자만 달랑 달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용자가 오줌 누러 가기 직전에.
‘물솥 올린 것도 물어볼 정도면 같이 사는 건감?’
삐뚤빼뚤 적어놓더니.
‘뽀뽀도 했을 거랴. 순전히 차순이 얘길 죄다 믿을 순 없지만.’
‘헥.’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풍경들이 폭발적 상상으로 진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설레설레 흔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바싹 붙으면서 사내의 솥뚜껑 손바닥이 여인의 옷 속으로 파고들던 상상이 재빨리 지워진 게 아주 다행이긴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자는.
“요새 양복도 멋쟁이로 변신했잖니? 구두도 반들반들.”
순임이는 더 이상 관심을 쏟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중학생 호순이 언니가 보던 학원 잡지에 실린 수학 문제를 마저 풀기 위해 머리를 집중하는 중이다. 문제 수준은 높았지만 끝장내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집중력이 더 높아진다.
‘철수는 가진 돈의 절반보다 60원을 더 써서 가방을 사고 남은 돈의 3/4보다 10원 더 많은 돈으로 책을 사고도 결국 70원이 남았다. 처음 가진 돈은 얼마인가?’
숫자 앞에 마주하면 온갖 계산법이 터져 나오니 고난도 산수는 영적 감각인 게 확실하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빨리 집에 가서 마늘밭 풀을 걷어 고샅에 쌓아놓은 다음 설거지를 할 참으로 문제 풀이에 집중한다.
먼저 철수가 가진 돈을 □라고 정해야 한다. 그러면 가방의 값은 철수가 가진 돈의 절반보다 60원이 많은 돈이라는 추리가 나온다. 그 다음 □/2+60 원이라는 셈법을 당겨 와야 한다. 그런데 철수가 가방을 사고 남은 돈이 □에서 가방 값 ( □/2 + 60)을 뺀 값이니까, □ - (□/2 + 60)이 된다. 즉 □ -□/2 - 60 = (□ - □/2) - 60원의 공식이 □/2 – 60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계산 방식이 누에꼬리 실밥처럼 줄줄이 이어 나온다. 책값은 남은 돈(□/2 - 60)의 3/4보다 10원 많은 돈이니까, (□/2 - 60) 곱하기 3/4 + 10 = 3□/8 - 45 + 10 = 3□/8 – 35원이 된다.
아, 이제 문제풀이의 바탕은 거의 완성되었다. 빨리 끝내고 마늘밭 매러 가고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나, 바로 뒤에 서서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돌아가는 무용님이 레이저 눈빛을 깜빡 놓친 느낌이다. 아무 상관이 없는 줄 알았으므로 낙서를 감출 필요도 전혀 없었다. ‘색색’ 거친 숨소리로 돌아가던 무용님의 호흡도 무심히 잊으면서 그렇게 하루가 지나긴 했다. 호롱불 앞에서 풀고 있던 문제의 마지막까지 끝장을 내고 싶다. 빨리 끝내야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철수가 가진 돈□에서 가방값 (□/2 + 60), 책 값(3□/8 - 35)을 썼다니 70원이 남게 된다. 이 풀이의 고비만 넘기면 추적이 빨라지면서 해답이 나올 것 같다. 그러니까 70원은 (철수가 가진 돈) - (가방값) - (책값) = □ - (□/2 + 60) - (3□/8 – 35)이므로 □ - □/2 - 60 - 3□/8 + 35 = (□ - □/2 - 3□/8) - 60 + 35 = □/8 –25원이라는 셈법이 나온다. 그럼 70원 = □/8 – 25원이니까 □/8원은 70원 + 25원 = 95원이 된다. 아, 그래서 □ = 95 곱하기 8 = 760원이구나. 딱 맞았다.
이튿날 점심시간, 무용님이 나타나 교실에서 오자미 꿰매던 순임이에게 다가오는 걸 깜빡 놓친 것도 실수이다. 그저 어려운 산수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만 속으로 간직하며 혼자 아, 하는 탄성을 지르는 중인데 무용님이 순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듯 걷어 올리더니.
“네가 낙서한 애냐?”
“……아뇨.”
영문도 모르는 순임이가 무심히 고개를 흔드는 데 아이들이 일순 입술을 꽉 붙이면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이름이 뭐냣? 쌩 까지 말고.”
순간적으로 ‘어라, 왜 목소리가 날카롭지’ 하며 당황하긴 했다. ‘생 까지 말라’는 소리는 스승님답지 않은 깡패 말투여서 더욱 황당하다. 긴장이 되긴 했지만.
“이순임인디유.”
그때까지 침착하게 대꾸한 것 같다.
“이따 봐.”
무용님 ‘이따 보자’고 부를 만한 이유를 도저히 눈치 챌 수 없었다. 부를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승들과의 상담이라곤 기성회비 미납자에 대한 독촉 상담이 전부였으므로 기대감도 당연히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어느 집이나 돈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이봉구 씨는 술만 마시면 큰소리를 뻥뻥 치며 자식들에게 신기루 같은 희망을 주기도 했다.
“공부만 잘하면 6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준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한 위의 3남매 모두 공부를 잘했으니 큰소리 친 걸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순임이는 산수를 잘 풀고 주산을 엄청 빨리 놓았으며 남동생 성이는 그림을 잘 그렸고 그 아래 홍이는 1학년 입학하자마자 전 과목 모두 1등을 차지했다. 자식들이 커가면서 교육에 대한 부담이 커진 것일까. 이봉구 씨는 취할 때마다 사십 줄이 넘은 누나들에게 하소연했다.
“애들한테 큰소리치긴 했는데유 누님.”
담배 연기 속에 한숨을 몰아쉬며.
“솔직히 6남매를 죄다 가르치는 건 불가능해유. 아들 중에 똑똑한 놈 두엇만 딱 찍어서 가르치라먼 몰라두 딸내미까지 죄다 공부가 어지간하니.”
중년의 남동생의 한숨소리에 안타까워진 고모 셋이 순임이 집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밤마실 나온 척 부엉이 고개를 넘더니 열세 살 조카딸을 사랑방에 불러 앉히고.
“네가 중학교만 안 가면 밑에 남동생 모두 상급학교까지 보낼 수 있다. 누나가 양보해야 집안이 일어서고 복도 받는 거여.”
그러나 순임이는 이미 예견했다는 듯 고개를 뙤똑 들더니.
“저는 걸 거유.”
고모들이 숨을 멈추자 문풍지 때리는 바람 소리가 더욱 커졌다.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갈 거유. 백화점이나 은행에 취직하려 해도 얼굴이 이뻐야 한 대유. 나는 주근깨에 노랑머리이니 공부로 쇼부쳐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어유, 중학교만 졸업허먼 산업체 부설학교 야간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성숙이 언니가 얘기했거덩유. 낮에는 일하고 오밤중까지 공부헤서 졸업장만 따면 공무원 시험보고 나중에 교대에 가서 선생님두 될 거유. 고모한테 돈 달라는 것두 아닌데 지가 공부하구 싶다는 걸 방해하진 마세유.”
순임이는 어금니 옹물며 눈시울을 삼켰는데 마음 약한 고모들이 먼저 더 크게 꺼이꺼이 울었다.
“아니다. 우리가 잘못한 거다. 어려워도 구만 리 같은 네 앞길은 스스로 헤쳐 나가라.”
그 후로는 집안에서 상급학교 진학을 막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순임이 혼자 해결해가면 된다. 배운 만큼 조금 더 잘 사는 게 확실한 줄만 알았다.
집안에서는 그렇듯 강하게 반발했으나 학교만 오면 그 기세가 꺾이는 것이다. 이튿날 다시 나타난 무용님이.
“무용실에 가서 무릎 꿇고 있어.”
생뚱하게 던지는 그 한마디에 아주 잠깐 오싹 하는 느낌이 서린 것도 같다. 그러나 다시 어제부터 풀던 고난도 산수 문제를 끝장내고 싶은 마음이 합체되면서 무용님의 경고를 깜빡 잊은 게 문제다. 무용실에 가긴 했지만 어제 풀던 마지막 계산의 정리가 혼란스러워.
‘왜 끌고 오는 거지? 나는 지금 계산 때문에 바쁜데…….’
갸우뚱하는 마음이 더 컸다. 강당 뒤쪽으로 징검다리 타고 건너는 무용실은 넓은 바닥 전체가 양초로 닦은 듯 매끈매끈해서 조금 서늘한 느낌도 들었다. 사위가 짙어지면서 방과 후 아이들도 보이지 않으나 고요, 고요하다.
‘무릎을 꿇고 혼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나?’
한 시간 넘게 무릎을 꿇었는데도 고즈넉할 뿐 아무 움직임이 없다. 종아리가 저려서 다리를 펴고 주무르는데 허벅지 뭉친 근육이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순임이는 주머니의 습자지를 꺼내어 어제부터 골똘하던 산수 문제를 마무리하려 한다.
그러니까 철수는 처음에 760원을 가졌었는데 가진 돈의 절반(760원/2 = 380원)보다 60원을 더 쓴, 440원(380원 + 60원)을 써서 가방을 구입한 셈이다. 이때 남은 돈은 760원 - 440원 = 320원인데 그 돈(320원)의 3/4보다 10원을 더 써서, 320원 곱하기 3/4 + 10 = 240 + 10 = 250원으로 책을 산 걸로 정리된다.
소리 없이 등장한 무용님이 뒤에서 지켜본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그 숫자를 이리저리 넣고 빼면서 이제 막 ‘처음 가진 돈 760원, 가방값 440원, 책값 250원’이라고 적은 다음 모두 끝내려던 참이었다.
“됐다.”
해결된 과제의 기쁨으로 입으로 툭 튀어나온 건데 하필 무용님이 먼지떨이 막대기 두 개를 쥐고 나타난 것이다.
“못 된 것. 되긴 뭐가 돼?”
생머리와 줄무늬 추리닝 그리고 흰 장갑에 바싹 쥔 떨이개의 헝겊자락 두 개가 나풀나풀 흔들렸다.
‘먼지떨이 청소까지 시키려는 건가? 처음부터 얘기했으면 벌써 끝내고 집에 갔을 텐데.’
가장 먼저 염소를 끌어오고 사립문 앞에 쌓아놓은 강낭콩도 까야 했고 아궁이에 부지깽이 쑤셔야 차가운 방이 데워진다. 중학교에 보내기로 했으니 그만큼 집안일도 열심히 도와야 부모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문제풀이와 집안일이 바쁜데 벌 청소가 늦어지는 것만 안타까워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딱.
꿀밤치고는 너무 아파 어리둥절했으나.
“너 재미있는 애로구나. 선생님이 벌을 주려는데, 뭐 ‘됐다’라니, 네가 깡패냐? 겁 없는 년 같으니.”
사태의 불안감을 감지한 찰나 갑자기 뒤통수에 불이 번쩍 났다.
“악.”
무용님이 떨이개로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곧바로 머리, 어깨, 등짝으로 닥치는 대로 연속 가격이 터졌다.
“이름두 거짓말이네. 이순이인데 가짜로 미음자(字)를 붙여놓았어. 완죠니 가짜 뉴스 제조공장이네.”
“진짜 이름인데유. 우리 집에서 그렇게 불러유.”
호적이 바뀐 이유를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틈이 없어서 그렇게 얘기했더니.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아무 데서나 나불나불 연애 소문내는 네 입버릇을 오늘 확실히 고쳐놓겠다.”
“……아아!”
“엎드려뻗쳐.”
엉거주춤 엎드리자.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으니 딱 50대만 때리고 끝내겠다. 네 대는 아까 미리 맞았으니 46대만 더 맞으면 끝나니 재수 좋은 줄 알아. 사람이고 짐승이고 맞으면서 커야 정신이 똑바로 박히는 거야. 무용부 애들도 맞으니까 다리가 귀에까지 쫙쫙 달라 붙이고 빙글빙글 돌리게 된 거야. 발레의 원칙.”
“……,”
“무릎도 안 꿇고 요령도 피우데.”
“종아리 저려서 잠깐 만진 건디유.”
“양심불량이네. 변명할 때마다 두 대씩 추가한다. 히프 들어.”
“진짜유.”
엉덩이를 엉거주춤 들어올리자.
“두 대 추가. 48대.”
몸을 뒤틀면서 얼핏 고개를 드는 순간 창살에 부딪치는 솔 이파리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맞는 대로 세어라. 숫자 하나 빼먹을 때마다 두 대씩 추가.”
퍽.
“하나,”
매를 받는 숫자 소리가 섬찟하게 고요를 뚫는다. 표정이 전혀 없이 모질게 때리는 스승님의 얼굴이 확실히 무서워졌다.
퍼퍽.
“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헤아리는 숫자를 따라잡기가 힘들어진다. 처음 매질은 억울하고 슬픈 감정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고통이 훨씬 더 절박해졌으니 마음보다 몸의 고통이 더 아픈 게 확실하다.
“열다섯, 열여섯 ……흡.”
“열일곱을 놓쳤어. 아플수록 정신을 바싹 차려야지.”
다시 두 대가 추가되어 50대로 늘어났으니……아닌 게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매질 숫자가 더 늘어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서른다섯, 서른여섯."
36대에서 떨이개 자루가 뚝 부러지자 무용님이 벽에 홱 집어던졌다. 나머지 새것으로 바꾸면서 창틀에 탕탕 두들기자 탑새기가 부스스 쏟아지며 눈앞이 흐려진다. 이제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딱 2초라도 쉬었다 맞으면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틈을 주지 않으니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14대 더 남았다.”
때린 데만 계속 때리니까 더 아픈 것이다. 지금은 엉덩이와 종아리 그리고 장딴지까지 골고루 돌아가면서 때려줬으면 하며 요리조리 비틀비틀 매 맞을 부위를 조절하는 중이다. 그러나.
“몸 비틀어서 두 대 더 추가.”
싸늘하게 잘라버린다.
“마흔여덟, 쉰. 아아, 끝.”
“두 대 더. 숫자를 틀리게 세었어. 마흔아홉을 빼먹다니.”
절망이다. 마지막 두 대는 감각조차 사라지면서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이건 네 잘못을 막대기가 응징한 거야.”
“…….”
“울지도 않네. 독사 같은 것.”
실제로 눈물 한 방울 나오질 않는 것이다. 문득 ‘울지 말아야 한다.’라는 그 주문을 외운 거 하나는 성공적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울지 않는 대신 중학교만 들어갈 수 있다면, 그때는 진짜 수학 문제를 열심히 풀겠다, 고 마음만 먹어본다.
지금은 순임이 혼자 염소 끌며 감자밭 두렁을 헤쳐 나오는 중이다. 배고프다. 깜부기 뽑아 피리를 불면서 고개를 드니 콩나물 대가리 같은 악보가 봄 하늘로 흐느적흐느적 번질 것 같다. 구렁이 자국으로 멍든 종아리는 옥도정기 바르고 며칠만 지나면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리니 더 이상 매 맞는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무엇인가? 제발.’
때리니까 무조건 맞는 것이다. 공납금이 1년째 밀렸고 학급비를 내지 못한 건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이다. 설거지가 늦게 끝나서 지각을 다섯 번 했으며 신열이 새도록 잉잉 달아올라 운동장 조회에 딱 한 번 빠진 적도 있다. 국군장병 위문엽서를 못 낸 것도 순임이 잘못은 전혀 아니지만 그런 걸 따진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매를 맞을 때는 울음이 전혀 터지지 않았는데 백화산 너머 노을이 빨갛게 덮이는 순간 눈시울이 젖으면서 울음이 꺼이꺼이 터진 것이다. 둥두렷이 떠오르는 보름달 사이로 기러기 떼가 하늘을 황홀하게 갈랐기 때문이다. 처연하다.
강병철 소설집 『비늘눈』 『엄마의 장롱』 『초뻬이는 죽었다』 『나팔꽃』 발간, 성장소설 『닭니』 『꽃 피는 부지깽이』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발간, 시집 『호모중딩사피엔스』 『사랑해요 바보몽땅』 『다시 한 판 붙자』 등 발간, 산문집 『작가의 객석』 『어머니의 밥상』 등 발간, 교육산문집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등을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