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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한민당)
[연재]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39)-제3부 해방정국(7)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인공에 대항하기 위해 결집한 한국민주당
해방정국의 정치세력을 두고 볼 때 때로는 좌우익의 구분선이 불명확한 지점이 없지 않다. 중도세력의 경우는 좌우를 넘나드는 속성을 갖고 있어서 이념적 우파도 때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등 좌파와 손을 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분단이 현실로 다가오자 온건‧중도 민족주의세력과 김구처럼 이념적으로는 극우에 가까운 세력조차도 통일정부를 위해 좌익과 연합, 합작을 시도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갈등, 대립하던 좌우세력이 확실하게 갈라서는 것은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담 후 신탁통치 분쟁 과정에서였다. 이 과정에서 우익세력은 비상정치회의에서 시작해 비상국민회의와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으로, 좌익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결집하였던 것이다.
해방 직후 최초로 결성된 자치조직인 건국준비위원회는 중앙의 경우 대체로 좌익이 주도하는 가운데 우익세력도 일부 참여했다. 지역의 경우 때로는 우익이 주도하고 좌익이 소수를 이룬 곳도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인공이 급조되면서 중앙의 경우 우익세력이 대부분 이탈하게 되지만 지역 인민위원회는 한동안 건준 등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곳도 있었다. 건준, 인공 등 여러 정치세력의 연합조직 외에도 이념에 따른 정당조직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가장 빠르게 조직체계를 정비한 것은 공산당세력이었다. 여운형은 초기 건준과 인공을 주도하며 해방직후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로 부상했지만 공산당의 조직 활동에 밀려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자 뒤늦게 11월 12일에야 건국동맹세력을 중심으로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다.
그렇다면 우익세력들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 안재홍 등 일부 우익민족주의자들은 건준에 참여하였지만 송진우 등은 독자적인 세력화 방안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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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민주당을 결성했다가 한민당에 합류한 원세훈. 연해주, 중국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벌이고 좌우를 망라해 활동했던 그는 한민당의 비주류로 활동하다가 결국 탈당해 민중동맹을 결성, 중도세력을 형성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원세훈이었다. 원세훈은 일제의 국권침탈 후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에서 이동휘‧문창범‧윤해‧고창일 등과 전로한족중앙회, 대한국민회 등을 조직하였고, 3.1운동 후에는 중국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임시정부 개조파로 활동하였다.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 등에 관여하고 신채호 등의 구출운동을 벌이던 중 1927년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2년간 복역한 뒤, 출소해 잡지 『중앙시보』를 발간, 총독정치를 비판하며 일제 맞섰다. 일제 말기 평택에 은거하던 중 해방을 맞아 서울로 올라와 8월 18일 한학수의 집에서 고려민주당을 결성하였다.(주1) 원세훈은 후에 한민당을 탈당해 민중동맹을 결성, 김규식이 조직한 민족자주연맹에 가담하였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에도 참여하는 등 중도우파 노선을 걸으며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였고,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59년 사망했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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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발기인으로 주류세력의 대표인물 중 한명이었던 백관수.
김병로, 이인, 백관수 등은 애초 건준의 안재홍과 합작해 건준을 개조하여 우익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강력한 민족 대표기관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과 공산당의 반대로 우익의 대거 참여를 통한 개조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건준 참여를 포기하고 새로운 당의 결성을 준비하였다. 8월 28일 신간회 중앙간부였던 김병로‧백관수, 신간회와 수양동우회 출신의 조병옥, 법률가 이인‧김용무, 고려민주당의 원세훈‧박명환‧송남헌, 일제하 조선공산당 간부를 지낸 김약수 등이 참여한 가운데 정당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정당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각종 회고록과 전기에서는 주로 조선민족당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당시 매일신보(매일신보 1945.9.9.;9.17)에는 대한민주당으로 명기하고 있다. 한국민주당으로 통합할 때 한국국민당과 다른 한 당의 명칭을 반반씩 가져와 작명했다는 증언을 두고 볼 때 대한민주당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주3)
한편, 해방 전후 안국동 윤보선 집 사랑에 출입을 자주 하던 구미지역과 일본 등지의 해외유학파 출신을 중심으로 9월 4일 한국국민당을 발기했다. 장덕수, 백남훈, 김도연, 최윤동, 홍성하, 이순탁, 구자옥, 유억겸, 윤보선, 윤치영, 허정, 정노식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건준을 탈퇴한 안재홍도 여기에 참여하였다.(주4)
우익세력은 건준을 주도하는 좌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9월 2일 김병로, 백관수, 원세훈과 장덕수, 백남훈, 정노식이 대표로 회동하여 합동을 결의하고 9월 4일 한국민주당을 새로 발기하기로 결의하였다. 9월 6일 재건파공산당의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였고, 이에 우익세력은 송진우의 주도로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에 송진우, 부위원장에 서상일과 원세훈을 선입하고, 고문으로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을 위촉하고, 총무에 김준연, 외교에 장택상, 조사에 윤치영, 조직에 송필만, 정보에 설의식, 경호에 한남수 등을 결정했다. 좌익의 발빠른 움직임과 미군의 주둔에 자극받은 우익세력은 빠르게 결집하였고, 9월 16일 1,6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천도교 기념관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 결성대회를 치렀다.(주5)
초기 통일된 정치노선을 갖지 못한 한민당
1945년 9월 21일 한민당은 송진우를 수석 총무로 하여 각 지역대표로 김도연(경기), 조병옥(충청), 백관수(호남), 서상일(경북), 허정(경남), 백남훈(황해), 김동원(평안), 원세훈(함경)의 8총무를 선임하였다. 당의 영수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문창범(사망), 서재필, 권동진, 오세창 등이 추대되었지만 이들은 아직 대부분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송진우가 실질적으로 당을 대표하고 이끌었다.(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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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총무로서 한민당을 이끌었던 송진우. 한민당 주류의 실질적인 배후인 김성수를 대신해 표면에서 한민당을 이끌었으나 1945년 12월 30일 테러리스트 한현우에 의해 암살되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유일여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민당 출신의 인물들이 미군정의 주요 요직에 진출하였고, 통역정치로 불리는 미군정과의 밀착관계를 형성한 인물들도 대부분 한민당 출신이거나 한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또한 한민당은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 노선을 수용해 5.10총선을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한민당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여당이 아니라 야당으로 이승만과 권력을 놓고 투쟁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민주당(한민당)→민주한국당(민국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정통야당’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숱한 변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현재의 여당인 민주당과도 일정하게는 맥락이 닿아 있다.
한민당이 결성되었을 때 초기 구성원을 보면 출신 배경과 일제 강점기의 활동 경험이 다양하였다. 구성원들은 하나의 사상이나 노선으로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구심점을 갖지도 못했다. 한민당에 참여한 다양한 인물과 세력은 인공과 좌익의 주도권에 반대한다는 정도의 공통점이 있을 뿐 통일된 정치노선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한민당은 일본, 유럽,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지주 출신이 주류를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 친일 활동을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근본적인 약점을 갖고 있던 한민당으로서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김구)처럼 독립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인물, 단체를 추대하지 않고서는 정치활동을 전개할 명분조차도 찾기 힘들었다.
한민당은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에게 숙소를 마련해주고 매달 15만원씩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등 적극 후원했고 한민당 총재로 취임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연합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몰두하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려 했고 한민당의 총재 취임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한민당은 ‘임대봉대론’을 창당 과정에서 당론으로 정할 정도로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민당은 임시정부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00만원을 만들어 정치자금으로 전달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내에 기반이 전혀 없었던 임시정부로서는 이 돈을 받았으나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받던 한민당에게서 돈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임시정부와 한민당의 관계는 밀착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미군정이 자신들 외에 임시정부 등 모든 단체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자 한민당은 “군정당국이 인정치 않는데 군정 하에서 정부행세를 하는 임정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임시정부 절대지지 노선을 스스로 철회하였다.(주7)
이후 한민당과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소원해졌고, 송진우‧장덕수 암살 사건을 둘러싸고 관계가 험악해졌다. 결국 이러한 갈등 관계는 김구 암살 사건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한민당은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담 후 신탁통치 분쟁 과정에서 정국 대처 방향을 놓고 내부 갈등이 일어나면서 1946년 중반 이후 비주류세력이 이탈하였다. 수석총무였던 송진우 암살 이후 김성수가 당을 주도하게 되면서 토지개혁, 좌우합작 등의 문제를 두고 주류와 비주류가 갈등하면서 원세훈, 김병로, 이인 등이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유학파, 기독교, 동아일보계가 주류 형성
한민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이 대부분 외국유학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연의 ‘한민당 관계자 인명록’을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유학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주8)
일본: 강기문, 고희동, 구자옥, 김관호, 김도태, 김도원, 김동환, 김상규, 김상돈, 김상순, 김상억, 김성복, 김성수, 김양하, 김약수, 김윤식, 김재학, 김종선, 김준연, 나용균, 민영길, 민중식, 박용희, 박해극, 백남규, 백남훈, 서상국, 설의식, 소완규,손진태, 송석하, 송진우, 송필만, 옥선진, 유억겸, 윤실현, 이갑수, 이상돈, 이운, 이정래, 이훈구, 장배근, 장병만, 장용하, 전진한, 정광호, 정균식, 정현모, 조동근, 조헌영, 주기용, 진흥기, 최두선, 최태영, 최태욱, 하상용, 한엄회, 함대훈, 현상윤, 홍성하
미국: 김도연, 김준옥, 박찬현, 백낙준, 서연호, 신현모, 윤창석, 윤치영, 이기붕, 임영신, 장덕수, 조병옥, 한보용, 현정명
중국: 백남기, 백남채, 장흥염, 조영규, 최윤동, 이극로
독일: 안호상, 이극로, 김준연
영국: 장택상
프랑스: 김법린
소련: 문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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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학파 출신들이 주류세력으로 있었던 한민당. 윤보선과 조병옥도 그런 인물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같은 나라에 유학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 중 교포 조직이나 유학생 조직에서 활동하며 서로 인간관계를 맺었다. 유학시절의 친분관계가 밀접했던 경우는 일본과 미국이었다. 일본의 경우 1900년대부터 조선 유학생들이 친목단체에서부터 항일단체, 사회주의 써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메이지대학(조만식, 김병로, 현준호, 조소앙, 정노식, 이인), 와세다대학(최남선, 송진우, 김성수, 신익희, 안재홍, 현상윤, 최두선, 양원모, 김철수, 장덕수, 장택상), 게이오대학(김도연, 김연수), 도쿄제국대학(박용희, 김준연, 유억겸, 김우영, 유만겸, 남궁영) 등 대학별로 인맥을 형성했다. 이들 중 김병로, 이인, 송진우, 김성수, 현상윤, 최두선, 양원모, 김철수, 장덕수, 김도연, 박용희, 김준연, 유억겸, 장택상 등은 초기부터 한민당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인물인데 일본유학시절부터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송진우, 김성수 등 한민당을 주도했던 노장인사들은 일본유학시절부터 인맥을 형성했는데 특히 김성수와 송진우를 중심으로 동아일보와 중앙학교, 보성전문, 경성방직을 중심으로 강력한 유대관계를 구축했다.(주9)
또한 미국유학생 출신들의 경우는 일본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성향을 띠었다. 1910년대를 전후하여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에서 유학의 기반을 닦은 이후 1920년대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교포조직들과 연결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 출신들이다. 장덕수, 윤홍섭, 김양수, 조병옥, 이금증, 최순주, 장이욱 등이 콜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는데, 이들은 이승만 중심의 동지회, 안창호 중심의 흥사단계열의 국민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백관수, 김도연, 유억겸 등은 흥사단계열의 국민회에서, 허정, 이철원 등은 동지회에서 활동했다. 이 두 단체는 경쟁의식으로 인한 반목이 심했다.(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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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의 최대 주주였던 김성수. 김성수는 송진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관여하였으나
송진우 암살 후 수석총무로 선출되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통해 인맥을 형성한 이들은 국내에 귀국한 뒤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김성수가 중심이 된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 계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공통의 정치노선과 활동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던 계기는 종교와 관련된 단체 활동이었다. 1920년대 이후 이들 중 기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동우회’와 ‘흥업구락부’를 결성하였는데 유학 후 귀국한 이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흥사단의 국내지부로서 민족성 개조와 인격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된 동우회는 안창호의 명망과 이광수의 지도력이 결합되어 서북지방 출신의 지식인, 종교인, 자산가를 망라하여 만들어졌는데, 사회주의계열의 민족해방운동에 대응하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주11) 동우회는 1922년 안창호의 대성학교와 조만식 주도의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던 김동원과 김성업이 중심이 되어 만든 ‘동우구락부’와 같은 해 서울에서 이광수가 중심이 되어 만든 ‘수양동맹회’가 연합해 만든 ‘수양동우회’의 소장인사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유학 후 귀국한 조병옥, 이용설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주12)
흥업구락부의 경우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연계를 맺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YMCA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의 주요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흥업구락부의 핵심인물이었던 신흥우와 허정은 이승만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이 단체는 사실상 이승만의 동지회 국내 지부나 다름없었다. 신흥우의 아버지는 이승만의 서당 스승이었고, 집안 간에 매우 절친했다. 또 허정은 뉴욕의 동지회에서 이승만을 추종했던 인물이었다. 신흥우는 미국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나 동지회의 정강, 진행 방침 등에 대해서 들었으며 국내 조직과 관련한 구체적인 활동 전술까지 제시받았다.(주13)
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출신들이 한민당에 다수 참여했으나 동우회 출신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두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 중 한민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들로는 동아일보(김성수, 김용무, 박창희, 백관수, 서상일, 송진우, 장덕수, 함상훈, 고재욱, 김양수, 설의식, 이상돈)와 보성전문학교(손진태, 안호상, 옥선진, 유진오, 윤택중, 장덕수, 홍성하, 현상윤), 경성방직(민태일, 민병도, 방용만, 윤상은, 최승만) 관련자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교육계나 언론계 출신의 인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일본유학 후 기독교계 인사들과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성전문의 지식인들이 한민당의 주도세력이 되었다.(주14)
지주‧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한 친일파 정당
해방 직후 한민당을 결성하면서 동우회, 흥업구락부 등 기독교 계열과 동아일보 계열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들의 실력양성론이나 문명개화, 근대화론 등이 그대로 정치노선으로 연결되었다. 한민당은 미군정과의 협조를 가장 주요한 정책 방향으로 설정하였고, 동시에 지주‧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여 토지개혁이나 중요 산업국유화 등의 주요한 경제개혁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주15)
일제 강점기 근대화론 등 친일적 노선을 걸었던 한민당의 주류는 민족보다는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한태수는 『한국정당사』에서 “한국민주당은 당시 유일한 세력 집단인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反)공산세력이면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포섭하려 하였고, 따라서 여기에 과거 일제시 친일적이었던 세력이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력은 자기를 대중 앞에 내놓을 만한 명분이 없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상해 임시정부를 봉대한다는 간판으로 민중에게 호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미군과 연결하고 그 군정에 협력하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라고 평했다.(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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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시기 통역정치의 폐단이 컸다.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서 수학한 이묘묵은
하지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이란 이름으로 미군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한민당 출신들은 유학 경험과 영어 활용 능력, 친미 지향적 이념 성향 등을 바탕으로 미군정에 대거 참여하고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부응, 협력하였다. 1945년 10월 초 선정된 미군정 고문 9명 중 7명(송진우, 전용순, 김동원, 김성수, 김용무, 강병순, 이용설)이 한민당원이었고, 하지의 특별보좌관이란 이름으로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의 통역이 되었던 이묘묵을 비롯해 미군정 고위인사들 주변에서 통역정치를 펼쳤던 이들도 대부분 한민당이었다. 이들의 추천과 지원 아래 한민당 출신들이 대거 군정청에서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
또한 한민당에는 김성수로 대표되는 지주 및 자본가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한민당은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반대 또는 지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군정 요직을 장악한 한민당 인사들은 미군정의 토지개혁을 저지하는 한편, 친일파 청산에도 반대하는 등 지주‧자본가 정당, 친일정당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한민당에는 해방 후 산업계 중요 기관의 대표가 모여 조직한 조선경제협의회 부회장 김승식, 상무이사 김성호‧민규식, 이사 지중회‧이동제, 평의원 최두선을 비롯한 대한 건설공업 사장 강기문, 동방식산 상무 구연창, 경북영화협회 대표 김용상, 남선무역주식회사 사장 김원규, 성동구 중앙시장 이사 김재학, 대구 신흥공업 중역 김태회, 조선신탁 취체역 민대식, 남선상사 사장 민중식, 대구 동아자동차 사장 박노익, 경남은행 전무 서상호, 부산 장유공장 사장 오이상, 경기도 상공경제회 이사 이현재, 동양인촌취체역 이활, 청주 주조회사사장 이희준, 북삼화학공사 이사장 임성호, 조선피혁 사장 임종섭, 대동고무 사장 장진섭, 동아산업 사장 장현중, 경기도 상공경제회 이사 전용순, 조선전업 소장 정진희, 조선은행 이사 최순주,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 최태욱,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부회장 하상용 등 자본가나 경영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였다.(주17)
이처럼 지주, 자본가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토지개혁과 중요산업 국유화 등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반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민당은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가동되기 시작한 좌우합작위원회가 토지개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실행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이에 반발한 한민당 내에 있던 개혁적인 비주류세력이 한민당을 이탈하게 되면서 한민당의 보수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947년 미군정이 적산을 현금 일시지불 원칙에 의해 불하한다는 결정을 내놓자 각계에서 “많은 자본을 가진 사업가 혹은 간상배 이외에는 도저히 적산을 살 수 없을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한민당은 이를 찬성하는 등 자본가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하였다.(주18)
자본가 정당이었던 한민당은 기본적으로 반공정책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인공을 주도하는 좌익, 조선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 한민당의 출발이었고, 개량주의 노선을 취했던 한민당의 주류세력은 일제시기부터 공산주의, 사회주의 세력과 반목하는 관계였다. 신간회를 통해 좌우세력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해소를 결정함으로써 그 반감이 더욱 커졌고, 일제 말기 황국신민정책과 함께 반공 캠페인이 강화되면서 반공의식이 강화되었다. 해방 후 좌익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을 결집해 출범한 한민당은 ‘친일파 정당’, ‘지주‧자본가 정당’이라는 낙인과 함께 해방정국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으나 신탁통치 분쟁 과정에서 이승만‧김구와 함께 강력한 반공연합을 구축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비주류의 탈당과 한민당의 성격 변화
처음 한민당에는 기독교나 동아일보 등과 구체적인 연관을 맺지 않은 비주류 인사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세훈과 김병로, 이인, 김약수 등이다.
원세훈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러시아 시베리아와 연해주,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등에서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수감생활을 한 뒤 국내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할 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과 함께 활동한 경력이 있고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해방 후 한민당에 가담했다. 그는 1921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과 1925년 일소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김규식, 신숙 등과 함께 연해주에서 추방당한 경험 등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거리감을 갖게 된 것, 그리고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일제 말기 김병로, 이인, 송진우 등과 어울렸는데 이때의 인간관계 등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임시정부 개조파로 활동했던 원세훈은 국내의 기독교계나 동아일보계 등 민족개량주의나 실력양성노선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제시기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었지만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규식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무장투쟁론자였던 이동휘를 비롯하여 여운형, 신숙, 이청천 등과 활동한 경험도 갖고 있었다.(주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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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독립투사의 변호를 맡아 활동한 김병로는 초기 한민당에 참여하였으나 후에 탈당하였다.
김병로와 이인은 일제시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으로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의 재판 변호를 적극적으로 했다. 이들은 1920년대 초반 변호사가 되어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허헌과 함께 ‘조선변호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1925년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9년의 원산총파업 사건과 광주학생사건, 1930년의 간도공산당 사건과 단천농민운동 사건 등을 변호하였다. 1930년대는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는 등 일제 탄압을 받았지만 김병로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변호하였고, 이인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극로, 김도연, 안재홍, 서민호 등과 함께 구속되어 해방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이들은 항일운동가들의 변호 활동과 함께 신간회에도 참여하였다. 김병로는 김약수, 이극로 등과 함께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였던 북풍회에도 잠시 참여하였다.(주20)
이들 외에도 한민당에 참여한 비주류 인사 중에 주목해야 할 사람은 김약수와 이극로이다. 김약수는 1920년대 초반 조선노동공제회, 흑도회, 북성회, 조선노농총동맹 등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를 주도하였고, 1925년 조직된 제1차 조선공산당의 핵심 멤버로 참여하여 6년 4개월 간 복역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고향 절친인 김원봉, 이여성 등과 함께 만주에서 민족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전향했지만 항일운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가입을 거부하다가 구금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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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와 함께 항일운동가 변호에 적극적이었던 이인. 한민당에 참여했다가
이승만 쪽으로 옮겨갔고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다.
이극로는 191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3차 대회에 이동휘의 통역과 경호원으로 대동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독일 유학 중 1927년 이미륵·김법린·황우일·허헌 등과 함께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주간으로서 조선어사전을 출간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단체를 실제로 이끌었다. 그는 1942년 이인, 김약수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주21)
초기 한민당에 가담한 비주류를 대표하는 인물들인 원세훈, 김병로, 이인, 김약수, 이극로는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경험은 없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이들은 특정한 정치노선이나 사상에 관계하지 않고 민족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주의운동 조직이나 민족개량주의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양쪽의 인물들과 모두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다. 원세훈의 민족유일당 운동과 김병로‧이인의 신간회 운동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좌우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일제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 등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아래서도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37년 중일 전쟁 후부터 일제의 민족 압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기독교계나 동아일보 계열 등 민족개량주의노선을 걸었던 인물들 대부분이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사회주의운동 세력 또한 전향공작이 강화되면서 많은 인사들이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단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하거나 소극적인 형태로 은둔생활을 했을지언정 친일단체에는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이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한 것은 정치노선이나 정책의 공통성 때문이기보다는 해방 직전 암울한 상황에서 맺어진 인간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주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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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극로. 해방 후 한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나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조선건민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이극로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 후 북에 남았다.
해방 후 원세훈은 고려민주당을 결성,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다가 한민당에 합류하였고, 김병로와 이인은 건준과의 합작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한민당에 합류하였다. 이극로는 한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지만 기독교계와 동아일보계가 당을 주도하자 사실상 당활동을 중지하였다. 이극로는 1945년 9월 2일 정치운동자후원회를 결성, 정치단체의 통일과 바른 정치가를 돕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10월 14일에는 정당통일위원회를 조직, 정치적인 통일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반면, 원세훈은 한민당에서 활동 입지를 넓혀가며 비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세력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자 정치적 행동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정치세력 간 대화를 진행할 때 원세훈과 김병로가 한민당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1946년 1월 8일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대표들이 모여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결정이 조선의 자유독립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 문제는 장래 수립될 임시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한다는 데 합의한 이른바 ‘4당코뮤니케’를 도출하였다. 하지만 암살당한 송진우를 대신하여 김성수가 한민당의 수석총무로 선출되면서 당내 분위기는 극도로 보수화되었고,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반탁운동연합전선인 비상정치회의에 한민당과 국민당이 참여하면서 4당코뮤니케는 사실상 무산되었다.(주23)
1946년 모스크바 결정을 실현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휴회)된 뒤 좌우합작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세훈이 대표로 참여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합의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한민당 내 주류보수파들이 비토하면서 1946년 10월 원세훈, 김약수, 김병로, 이순탁 등 비주류 세력이 대거 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민당을 탈당한 인사들은 대부분 원세훈이 주도하는 민중동맹에 참여하였다. 원세훈, 김약수, 김병로 등 비주류의 탈당과 함께 한민당은 김성수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구축, 장덕수를 중심으로 단독정부 노선을 통한 권력 장악이라는 현실적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며 그 결과는 5.10단독선거로 이어졌다.(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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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송진우 사망 후 김성수 수석총무 아래서 정치부장으로서 한민당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47년 12월 2일 암살되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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