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21:9-12
어린 양의 아내.....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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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택한자들에게는
체험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체험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지면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란
항상 자기 절대성을 더욱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대단함과 우수함을 점검하고
재차 다지는 차원에서
말씀을 지키려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들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을 우리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현실로서
하나님마저 장악하고자 하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9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신부’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한 신랑처럼
이해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어린양의 신부’의 본 뜻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실천에 옮기자”고 외치는 자가 있다면
악마와 관련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좌절해서
자포자기 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시도를 부추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현실’을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세계에 덮치게 되면
비로소 인간이 생각하는 그 현실이란 뭉개지고
인간이 실천한 적도 없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상황입니다.
즉 자신이 말씀을 실천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은 이미 하나님 말씀으로 점령당한 상태로 돌변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신부’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창세기 2장부터 살펴야 될 문제입니다.
남자 곁에 여자가 생겨난 것은
아담이라는 인간이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이 주는
기쁨의 확장으로 생겨난 일입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남자와 여자는
비록 두 사람이지만
한 몸으로 간주됩니다.
이처럼 결혼이란 시스템은
인간이 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의 즐거움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추방 되기 전에 에덴동산의 즐거움을 위한 시스템입니다.
그 결혼 제도가
아직도 이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까지
잔존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징후요 증상이요 흔적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미 에덴동산의 원리를 파괴했습니다.
악마가 사주하는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 절대성’입니다.
즉 ‘나는 ~의 신부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 대신 ‘나는 나로서만 있어도 족하다.
나는 나의 절대성만으로 완결된 신이다’는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결혼생활이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는 폭력을 행사하고
여자의 아픔 속에서도
남자 이외에 달리 의지할 데를 찾지 못해
매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는
모두 이왕에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자기 절대성 외에
다른 가치를 찾지 않게 됩니다.
남들이 다 죽어도
자기 혼자만이 살아남으면 그만이다는
의식 속에서 움직입니다.
하나님만이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아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절대성만을
힘차게 외치면서 살아갑니다.
즉 “이왕 버린 몸 새삼스럽게 어찌 할 수 없으니
이대로 죽는 날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지”라고 나옵니다.
동전을 잃어버린 처녀가
밤새 동전을 찾다가 마침내 찾아내어서
그 다음날 친구를 불러다가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낙원을 건설코자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원래 있었던 결혼 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즉 ‘어린양의 신부’로서
다시금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신들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의 신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모릅니다.
단지 인간들은 자신의 신됨을 외부로 과시하는데 급급합니다.
즉 “나 말고 다 죽어라!”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도박의 즐거움이나 경쟁의 즐거움이란
딴게 아니라
자기 빼놓고 다 죽는다는 것을 통해
자신만이 절대신임을
순간적이나마 실감하는데 있습니다.
곧 자기 절대성을
매일같이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지옥불에 들어가는 자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옥의 불 앞에서도
자아의 절대성만큼은 포기못하겠노라고,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의 아내라는 식으로 못살겠노라고 다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말씀을 가까이하고 순종하고
실천에 옮기려고 할 때마다
“나 말고 다 죽어라”가
순간순간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즉 말씀 실천을 통해서
‘왜 나는 절대자의 반열에 속할 수밖에 없는가’를
재차 확인하는 수순만 드러날 뿐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 품성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천국을 건설해서
잃어버린 낙원을 세우십니다.
그 방법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부부를 형성한
결혼 시스템을 통해서 진행됩니다.
구약 호세아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부인은 걸핏하면
남편을 버리고 다른 한량의 남자를 찾아 가출합니다.
그 때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값을 지불하고
자기 아내를 데려옵니다.
그러면 얼마 안가서 그 선지자의 아내는
또 바람이 나서 가출해버리고 맙니다.
그럴 때마다 호세아는
그 행실 나쁜 아내를 위하여 값을 치르고
또다시 데리고 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내용으로 성사되는가를
미리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신부’ 곧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피로서 값을 치르고
세상에서부터 데리고 와서
자신의 신부로 만든 자들입니다.
수천만은 대가를
모두 ‘자신의 피’로서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요구되는 값은 없는 것입니다.
어린양이라는 뜻은
그 앞에 ‘죽임을 당한’이 붙습니다.
즉 그냥 어린양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이것은 그 인간도 자진해서
‘자기 절대성’을 철회하고
하나님에게 나오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보석이 박힌 그 에덴동산은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