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욕망을 보는 것이 불교다
불교는 세가지 행복을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 누리는 ‘현세의 행복’과 죽은 후에 누리는 ‘내세의 행복’ 그리고 열반의 ‘궁극적인 행복’이다. 부처님의 출가이유를 표현한 사문유관에서 싯달타는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보고, 남문 밖에서는 병든 이를 보고, 서문 밖에서는 죽음을 보고, 북문 밖에서는 수행자를 보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굳히게 된다. 여기에서 태어나는 아기를 보고 괴로움을 인식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싯달타는 태어남은 문제삼지 않고 늙음, 병듦, 죽음만을 싫어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싯달타는 인간이면 누구나 관심을 갖는 현세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불교를 배우는 불자들은 묻는다. 스님 왜 태어남이 괴로움인가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태어남이 괴로움(生苦)이라는 설명이다. 뭔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오래 살아 볼려고 불교를 찾아 왔는데...태어나는 것이 괴로움이요, 태어나지 않는 길을 찾으라니... 불자들은 아득하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 출가이유는 죽음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삶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무조건 적인 욕망이 길을 찾아 나서게 했다. 죽지 않는 길, 영원히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철학서적을 읽다가 나중에는 교회 성당을 직접 찾아갔다. 믿겨지지 않는 자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복음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절이었다. 출가 이후 나의 출가이유가 부끄러운 적이 있었다.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고작 죽지 않고 더 살고 싶은 욕망에 의한 출가라니...욕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한 것이었다. 나중에 불교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부처님의 출가이유를 보니 마음이 크게 놓였다. 부처님은 출가를 반대하는 아버지 정반왕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을 제게 가르쳐 주신다면 저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위와 같은 싯달타의 말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부처님도 죽음의 문제 때문에 출가하신 것이로구나! 그분도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더 살고 싶어 했고 나처럼 죽기를 싫어했구나! 처음부터 거룩한 진리를 찾은 것은 아니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부처님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싯달타는 처음에 죽지 않으려는 현세의 행복을 추구했지만 그 한계를 알게 된 것이고 끝내태어남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어, 마침내 태어남이 없는 길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내용이라는 12연기의 관찰이다. 맛지마니까야에는 부처님이 마하고윈다라는 이름의 수행자였을 때는 범천의 일원이 되는 것을 가르쳤지만 생사해탈하는 법을 가르치지는 못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삶은 어디서나 항상 무조건 긍정되는 것이었다. 불교를 제외하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태어남을 문제 삼는 종교나 사상이 있을까.
우리는 태어난 아기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생일날 마다 선물을 하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 준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는 가르침과 다시 태어나지 않는 가르침은 생을 찬탄하고 존재를 무조건 긍정하는 인간에게는 쉽게 와 닿지 않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설법하기를 망설인 까닭도 대승불교에서 죽어서 영원히 산다는 극락세계를 말하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구체적인 욕망의 충족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욕망을 버리라는 불교는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인간의 구체적인 욕망과 그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을 직시하는 것은 그대로가 수행이요 상담이요 포교가 된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불교의 자비이다.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그 한계를 알게되어 ‘궁극의 행복’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는 자기 자신에게서 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욕망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