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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년의 詩
- 떨리는 영혼으로 쓰다
마산포
나는 어둠속에서 광란하는 바다를 노려보고 있다
파도가 무섭게 방파제를 향해 달려든다
갈기를 세운 험한 세월이 솟구치다 뒤집힌다
검은 파도 속에 나의 난폭한 꿈이 보인다
방파제가 가끔 젖은 몸을 푸르르 떤다
덜컹거리는 창밖으로 바람 많은 밤이 깊어갔다
바다는 쉬이 잠들지 않았다
밤하늘 낮고 빠르게 흐르던 구름이 터지면
별빛이 어머니 마른 살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 살 속은 장작불이 타는 듯 환했다
별빛이 아니라도 어머니는 스스로 타올라
몸 속속들이 불 밝혔을 것이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속에
아버지의 뼈들이 떠돌고 뼈들의 숨소리는 젊었으므로
뜨거워지는 몸을 식히기 위해 한밤 언 샘을 깨고
뼈 속까지 시린 얼음물을 퍼붓고 나면
어머니 숨결은 소금의 끝처럼 시렸다
해송의 완강한 가지에 걸려든 바람이
밤새 비명을 지르며 방파제에 쓸려와 박히는 소리를
나는 어머니 등뒤에서 들었다
(1993.1.4)
당산리* 사람들
산역을 마친 사람들은 말없이 서서
이내 흐르는 물목을 건너다보고 있다
이내가 엷어지면서 바다 저쪽의
갯벌이 드러나고 둥근 산자락이 나타났다
빠르게 흐르는 물목을 지켜보며 살아오는 동안
낯선 섬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제 노인은 갯바람으로 풍화된 뼈를
땅속에서 익히며 두려움으로 흐른
비밀한 세월을 지켜 볼 것이다
노인은 더는 늙지 않는 몸으로
저 물목을 건너 개풍으로 넘나들며
산자락 사이로 난 젊은 날의 길들을 만나리라
붉은 무덤 위에 자신들의 슬픔을 뿌리며
노인의 친구들이 마른 어깨를 들썩인다
노인의 생애가 이내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 당산리 : 강화도 북단의 마을로 이북의 개풍군 땅과 가장 가깝게 있어 개풍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가슴이 트는 나이
사람이 그리운 날의 산행은
말을 버리기 위한 고행이다
앞서 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색깔의 슬픔을 밀어내며
조금씩 가슴이 얼고 있는 동안
나는 호수에 갇힌 산색을 찢으며
팽팽히 당겨진 너의 말 끊기는 소리 듣는다
소리의 끝은 피멍이 들어
언 살 속을 아프게 달려가며
푸른 침묵들을 건드리고
푸른 침묵들은 끊겨 쓰러지며
또 다른 피멍으로 달려 나간다
소리들이 달려 나간 자리마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상처가 가슴에 남는다
상처는 깊고 푸르러 가슴 속
출렁이는 눈물이 솟아오를 것 같다
한참이나 앞서 걷던 너는
뒤늦게 내 가슴 트는
깊고 아픈 소리 들은 듯하다
가슴이 트는 나이의 산행은
춥고 쓸쓸하다
(1992.2.1)
길의 끝
너는 언 호수 건너 빨강색 지붕 위로 가느다란 손끝의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며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과 어쩌면 꼭 같아요 아마도 우리 가족이 처음 마련한 가슴 벅찬 집이였을 거예요 아버지가 사우디의 열사에 발바닥을 데이며 번 돈을 어머니는 알뜰히 불리셨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저처럼 빨강색 지붕이 있는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우리들의, 아니 어머니의 행복은 짧았죠 아버지가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계가 깨지고 억센 여자들이 아침마다 몰려오고 아버지는 말없이 이사 짐을 싸 용달차에 실었어요 눈발이 이사 짐 사이를 파고들어 장농이며 이불보퉁이들이 우리들보다 더 움추렸던 기억이 나요 이사 길은 멀고 어머니는 길 위에서 처음 울었어요 그 후 어머니는 언제나 길 위에 있었어요
네가 너의 유년을 말하는 동안 나는 언 호수 건너 빨강색 지붕 뒤로 난 숲길을 보고 있었다 길은 몇 구비를 이루며 숲속으로 사라졌다가는 나타나고 있었지만 끝을 숲속으로 사려 넣고 있어 아득한 느낌이었다
누구나 길의 끝에 서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나온 길은 무너지고
아직은 발길 닿지 않은 채 위태롭게 열려 있는 길
그 길을 걷는다
길이 폭포처럼 무너진다
(1993.2.4)
까막까치를 기다리며
우리들은 거두지 않은 사과 밭이였다
까맣게 타들어간 입술이 주렁주렁 매달린
겨울 사과나무였다 사과는 검게 말라 들어가며
까막까치가 오기를 기다렸다 붉고 단단하던 몸에
가득 담아 두었던 햇빛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달고 시원하던 과즙도 무서리 박혀 얼음 심을 타고 빠져나갔다
한 때는 힘이었던, 희망이었던 슬픔이
가슴을 빠져나가고 우리들은 죄인처럼 고개 숙였다
자고 나면 세상은 변해 있었다
바람소리 턱없이 가까워 우리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까막까치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순례자들이 수없이 다녀갔다
아무도 검게 말라 들어간 사과밭에
눈길 주지 않았다 세상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은 우리들이었고 기다림이었다
이제 마른 사과의 가다림은 세찬 바람뿐
바람에 마른 육신을 맡겨
풍장으로 자신을 보내며
날아와 주지 않은 까막까치를 위해
더 실한 사과나무를 꿈꾸는 일이리라
바람은 나를 벌판에 세운다
바람은 나를 벌판에 세운다
마른 풀잎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언 땅은 아주 조금씩 살을 깎아
비명을 일으켜 세운다 비명소리가 달려가다
희득한 눈발과 만나 몸을 섞는다
벌판은 뜨거운 숨소리를 숨겨 저처럼 웅웅대며
슬픈 살들을 바람에 쓸어간다 그 속에 내가 있다
드디어 세상의 뼈들이 앙상하게 남아 깊은 소리로 운다
겨울 햇살 빠르게 벌판을 건너지르고
바람 속에 영혼을 흔드는 마른 쑥 대궁과 억새풀들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다
(1993.2.16)
물푸레나무의 그리움은 뿌리에 닿아 있다
벌목꾼들이 하산하자 물푸레나무는 웅기중기 모여 서서 겨울을 맞았다 벌목의 두려움과 추위로 물푸레나무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산판을 찌렁찌렁 울리며 아름드리 적송이 넘어박히고 전기 톱날에 허리가 잘리는 생목들의 비명에 물푸레나무는 소름이 돋았다 물푸레나무는 꿈꾸지 않았다 언 가지 사이로 눈발이 날리고 분분한 눈발, 가지에 부딪힐 때 마다 불을 당기 듯 침묵을 터뜨리며 눈송이는 계곡으로 굴러 내려갔다 짧은 겨울 햇살은 물푸레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 힘겹게 뿌리에 닿았다 뿌리들은 햇살의 아주 작은 조각까지도 놓아주지 않았다 산새들이 어둠을 털며 숲을 가로지르고 나면 바람은 거친 몸짓으로 산 아래 소식을 부리고 갔다 산판을 내려간 생목들의 불길한 안부이거나 대설의 두려운 소식이었다 소식은 언제나 불온했고 물푸레나무는 허리를 깍지 끼고 웅크렸다 그런 날은 뿌리와 가지들이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는 팽팽히 휘인 톱날 같아서 깊은 쇳소리가 났다 물푸레나무는 뿌리의 그리움을 믿었다 산판을 유린한 얼음 기둥 속에서 뿌리들은 발가락을 은밀하게 밀어 넣어 얼음 결 사이로 길을 내고 달고 시원한 석간수에 이르리라 그리하여 겨울 견디어낸 가지의 끝 끝까지 새 생명을 밀어 올리리라 산판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으므로 물푸레나무의 그리움은 뿌리에 닿아 있다
(1993.2.26)
키 낮은 하늘을 떠나는 겨울 새떼
진눈깨비 그치자 하늘이 낮아졌다
남한강 기슭 상수리나무숲 일제히 팔을 뻗어
키 낮은 하늘 떠 바치며 근육이 뭉치는 날
강기슭에 누워 지난 사십 여년
뼈 속으로 드나드는 물소리며 바람소리
듣고 있을 당신을 찾아 나선다
당신 가파른 생각 사이로 강물은 다투며 흘렀을까
버린 생각들은 낙엽처럼 부끄럽게 물들고
버린 생각들을 타고 오른 가시덤불
당신 육탈된 갈비뼈 기웃거리고 있을
오늘을 일찍이 알고 버렸던 것일까
우리들은 바다를 보았노라고 당신은 썼다
그것이 평양으로 송고한 최후의 종군기
당신이 본 것은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남해 바다
그 같은 크기의 자유였을까
그날은 두려움이었으리
그날은 슬픔이었으리
그날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으리
겨울 새떼 강기슭을 날아오른다
키 낮은 하늘을 차고 오르며 새떼들은
우리들이 함께 가 닿을 수 없는
당신의 아름다운 바다를 본 듯하다
상수리나무숲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기고
그 먼 바다를 향해 새떼들은
힘찬 비상을 시작 한다
(1993.3.1)
멸치의 꿈
마른 몸속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이 한바탕 지나간다
은비늘처럼 파닥거리던 몸뚱이에서 바다가 빠져나가고
꼬리지느러미의 마지막 경련 그대로 굳어진 근육
팍팍한 근육의 섬유질 사이에
사막의 모래 바람이 소금 기둥을 세운다
마른 살 치고 나가는 바람소리가 더욱 거칠고
밤마다 몇 개의 모래 언덕이 몸속에 쌓인다
그런 밤이 지나면 바다가 사무치게 그리워
바다를 향해 애써 머리를 돌려 본다
뼈보다 단단해진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갑자기 아가미 사이로 뜨거운 물이 든다
눈물이 핑 돈다 얼마만인지 모른다
지느러미가 뜻대로 움직여지고 창자 속으로 맑은 물이
서서히 흘러든다 아랫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고
말라붙었던 비늘들이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 한다
몸뚱이가 황홀하게 뜨고 꼬리지느러미에 힘이 붙는다
새로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눈
솟구쳐 오르는 물기둥이 보이고
오색찬란한 공기방울이 수없이 떠오른다
솟구치는 물기둥에 몸뚱이가 가볍게 얹혀
헤엄치기 시작 한다 가속도가 붙은 격렬한 유영
먼저 꼬리지느러미가 부러져나가고
이어서 가슴지느러미가 떨어져나간다
오래도록 익숙했던 짭짤한 바닷물이
아가미 사이에서 격랑을 이룬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남해바다에 이를 수 있겠다
(1993.3.2)
길 위의 저 흰 손
용인 정신병원을 넘는다
겨울비 속으로 병동이 가라앉는다
앞서 가던 네가 보이지 않는다
혹 정신병원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너는 늘 정신 나간 놈이라고
제 정신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헛것의 세상 헛것으로 살아간다고
독백처럼 말해 왔으므로
저 병동의 음울한 어느 병실 너의 젊은 날
웅크린 잠으로 떠돌이 행상을 버리겠느냐
네 고물차가 비안개 속에 보인다 난장에서
난장으로 고단한 행로가 덜컹거린다 가끔
브레이크 등이 낮은 비명을 지르는 걸 보면
너의 정신병원행을 말리는 네 여자가
옷자락을 잡아 앉히는 것일까
유난히 광대뼈가 불그러진 여자
네 여자는 흔들어 파는 옷가지들
시원한 웃음으로 아낙들 품에 안겨주며
골라골라 신바람 너를 뜨게 했으니
너와의 동업도 이제 시들한 끝이 보인다
젊은 여자가 병원 입구에서 손을 든다
병동의 차고 쓸쓸한 어둠 속에
살붙이의 발광을 두고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비탈길을 걸어올라
겨울비에 젖고 있었을까
너도 여자를 본 듯 잠시 멈칫거리다
통과 한다 빗물 듣는 길 위의 저 흰 손
너의 덜컹거리는 길을 보내듯
겨울비에 젖은 내 길을 보낸다
(1993.3.4)
밤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달빛은 눈길을 수없이 미끄러지며
서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
차고 조용한 어둠이
눈뜨고 있을 것이다
달빛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늦은 길을 나선 사람들이
낡은 역사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눈바람은 무거워지는 발걸음 휘감아
벌판으로 내닫고
눈사태 계곡 흘러내리는 소리
우뢰처럼 깊어 달빛 떨게 한다
아직 막차는 오지 않고 있다
밤차를 기다리는 아낙의 등에 잠든
어린 것의 숨소리가
아지 못할 슬픔을
서로의 빈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게 한다
빙판을 향해 마음을 던지다
슬픔처럼 일렁이던 침엽수림
호반을 기웃거리던 흰 구름
여름날 강철처럼 꽂히던 빗줄기
깊게 얼어 있는
호수의 빙판을 향해
마음을 돌팔매질 한다
마음이 빙판을 달려 나간다
쩌엉- 소리를 내며 빙판이 튼다
얼어 있던 침묵들
빙판을 미끄러지는 마음에 부딪쳐
깨어나는 소리 저처럼 깊고 깊으니
늙는 일만이 아름다운 내일이었네
늙는 일만이 아름다운 내일이었네
치욕스런 세월의 긴 통로 끝에는 젊은 아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네
붉은 눈으로 쏘아보던
새벽어둠 이제는 늙은 몸으로
천천히 밀고 나가네
늑골 사이로 실의의 뿌리들
얕은 잠마다 달려들고
슬픔처럼 스미는 안개 새벽 산책길을 막아서네
허리를 짚으면 삭은 기억들 우루루 쏟아져내리고
주먹밥은 허리춤에서 돌처럼 굳어 있네
꿈 또한 저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거벼워진 뼈들과 부딪히며 노인은 홀로 가네
돌아다보면 눈물 나는 저 쓰라린
기억들을 묻어둘 곳이 없네
새벽 강 노인의 가슴을 흐르네
강물은 흐르며 무거워지고
늙어 아름다운 내일이
노인의 가슴에 목메어 잠기네
(1993.3.13)
삼월, 그리고 네가 보인다
숱한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던 철새들이 돌아온다
너는 비로소 내 아픈 말을 지울 수 있겠다
강물이 풀리고 네 가슴 매어 놓았던 생각이 함께 풀려
한 생각이 떠나고 그 자리에 네가 돌아온다
삼월, 그리고 네가 보인다
측백나무의 겨울
겨울은 조심스럽게 왔다 측백나무 묵묵한 모습으로 서 있는 골목을 벗어나면 거친 말들 속에 공구들 어지럽게 뒤섞여 녹슬고 있는 작은 광장에 이른다 젊은 노동자들은 공구를 챙기며 귀향을 서두르고 있다 그들의 어깨 뒤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겨울 하늘이 측백나무를 향해 잔뜩 몸을 낮추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은 악다구니를 퍼붓다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겨울은 측백나무 사이로 깊어 갔다 광장에 남아 있던 젊은 노동자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측백나무 가지에 걸려 비닐처럼 찢겼다 눈이 왔다 눈송이가 측백나무 푸른 침묵에 부딪쳐 작은 불꽃처럼 스러졌다 젊은 노동자들이 마구 찍어 넘긴 곡괭이 자국마다 그들의 시퍼런 가슴이 얼음 날로 섰다 저 가슴에 그들의 여자가 안겨 상처 입으며 꿈꾸고 부끄러움 하나씩 품을 것이다 측백나무는 겨울 하늘을 밀어내느라 검푸른 정맥이 솟는다 측백나무의 푸른 침묵이 조용히 터지며 왁자한 발소리를 앞세워 젊은 노동자들 돌아오고 있다
(1993.4.21)
원정 가는 길
야트막한 생각들이 서해로 달리고
낮은 계곡마다 진달래 지천이어서
가끔 넋을 놓는다 길은 계곡을 돌고
구릉을 가로질러 이미 붉어진 마음
가운데를 간다 이 길 끝에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일까
황토 흙먼지 뿌연 길 위에 신기루처럼
평택화력발전소의 굴뚝이 떠 있다
굴뚝은 불온한 몸뚱이를 버린 무엇이나
불길로 달래어 가볍게 보냈듯이
내 불온한 봄 길을 가물가물
황사바람 속으로 날리고 있다
원정 가면 서해바다 붉게 물들이며
욕망의 불덩이 닫힌 물길 속으로
사직이 무너지듯 무너지는 모습
볼 수 있을까 소멸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길을 가며
마음을 그어 깨우지만
마음은 봄 취해 혼곤하다
봄날 가며 무너질 것이 무너지고
무너지는 것들 속에 내 빈 몸 먼저 무너져
원정에 이르기 전
나는 나의 황홀한 소멸을 본다
(1993.4.26)
봄밤
저무는 강물에 병 깊은 마음을 밀어 넣는다
묵묵하던 산 그림자를 밀어내며 강물은
마음을 받아준다 신음조차 몸에서 쏟아지면
늦은 봄 밤 부드러운 어둠으로 익는다
철쭉 꽂 그늘 건너며 해종일 피를 말리던
소쩍새 울음 강물에 잠긴다
햇빛 있는 카페
커피 한 잔을 앞에 놓는다
낮고 부드러운 그의 말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나는 실내 음악과 그의 말소리를 혼동 한다
젊은 날 이곳에 꿈꾸는 사무실을 갖고 싶었지요
양지바른 이곳은 늘 조용했고 동네 전체가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는 던힐 담배에 불을 붙여 푸른 담배연기를 한 생각처럼 띄우며
젊은 시절을 비밀스럽게 열었다 동아 투위와 문지의 창간과
지금은 평단의 고전적 인물이 된 죽은 친구와
카페라고는 단 하나 흙과 두 남자던가요 우리들은
오기와 절망과 희망을 묻혀 그 카페를 드나들었지요
올해는 그 친구의 전집을 상석에 올려
양수리의 물길에 끌려가고 있을
말없는 눈빛을 건져올려야지요
그의 말에서는 강물소리가 났다
죽은 친구의 호방한 웃음이 강물에 실려
떠나고 있다 나는 커피 향 날으는 카페의 거리를
물끄러미 내다본다 하얀 햇빛이 카페의 벽에서 벽으로 건너뛰는
좋은 날 그는 죽은 친구가 걷던 말들의 풍경을 그리워 한다
소쩍새 울음
소쩍새 울음은 바람을 낳는다
바람의 정처 없는 길을 낳는다
길은 풀 섶의 어둠을 돌아
계곡을 빠져 나간다
안개가 바람의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따라 나선다
길은 먼 영혼을 돌아 필경은
내 몸 속으로 들 것이지만
내 몸 속에는 이미
죽음처럼 빛나는 호수가 누워 있다
마음은 바람을 재우지 못 한다
무성해진 마음 위에 햇빛 쏟아져 내린다
마음은 부풀어 하늘에 뜨고
마음을 매단 욕망의 가지들 휘어진다
마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 씩 계절이 바뀌어
바람 불고 눈 내리고 꽃 피고 새 강 흐른다
마음 위로 해 지고 달 뜨면
마음 젖어 갈대 잎 짙은 그늘 드리우고
강물소리 급해진다
마음이 마음을 떠나고
남은 마음에 물결 인다
마음은 바람을 재우지 못한다
꽃잎도 층층이 밟히고 산다
여자아이가 백일홍 한 송이를 교장실로 가져왔다 백일홍은 며칠째 투명한 유리물컵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나는 층층의 꽃잋 어딘가에 숨어든다 위 층 꽃잎의 발소리가 잠자리에 누운 아래 층 꽃잎을 밟고 지나간다 아래층 꽃잎은 오래도록 잠을 설친다 어느 날은 꿀벌과 내통하고 있는 아랫 층 꽃잎을 밟고 지나간다 아래층 꽃잎은 절정의 순간에 천정을 올려다본다 윗층 꽃잎의 붉고 큰 발바닥이 투명해진 꽃그늘을 통해 보인다 꽃그늘은 소리들이 통과하면서 투명해져 있고 윗층 꽃잎의 모든 움직임이 보인다 윗층 꽃잎은 아랫 층 꽃잎의 생각을 따라다니며 밟아 뭉개고 아랫층 꽃잎은 생각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 층 꽃잎은 문득 그가 밟고 있는 꽃그늘이 투명해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그의 몸이 움직이며 그려나간 궤적을 따라다닌 소리들이 통과하며 투명해진 꽃그늘을 밟고 있는 자신의 붉고 큰 발을 본 것이다
아래 층 꽃그늘을 밟고 있던 위층 꽃잎이 떨어져나가며 누구나 작은 것을 밟히고는 더 큰 것을 밟고 산다고 말하는 소리를 아래층 꽃잎은 들은 듯하다 꽃잎도 층층이 밟히고 산다 나는 이 기막힌 환유의 세계를 여자아이에게 이야기 한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 한다
(1993.7.18)
얼굴
황동규의 ‘알맞게 미소 짓고 있는 해골’을 읽다 섬뜩 해저 내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알맞게 미소 짓지 못한 쓰고 떫은 표정들이 뼈의 굴곡마다 들어 앉아 있다 나는 오랜 후의 내 얼굴을 더듬어 나간다 흙과의 부드러운 경계가 허물어지고 물푸레나무뿌리가 내 얼굴을 기어가고 있다 뿌리들은 실핏줄이 흘렀던 길을 따라 이마를 타고 내려가 눈구멍을 맴돌고 있다 실뿌리들이 뭉쳐 안구를 이루어 뿌리의 눈으로 흙속의 풍경을 보게 할 모양이다 뿌리들에 의해 겨우 지탱되고 있는 나의 뼈들, 가슴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마디들은 갈비뼈 안으로 쏟아져 내렸고 오장육부는 부드러운 흙으로 바뀐 지 오래다 오만스럽던 목뼈는 나의 해골을 받치지 못하고 이탈되어 홀로 외롭다 외로운 것은 목뼈만이 아니다 등뼈마디들은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 기웃거리고 정강이뼈는 퍼렇게 멍든 자국을 뿌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생전에 굴욕스러웠던 발가락뼈들만 얌전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순결한 색깔로 익어가는 뼈들, 저 뼈들을 칭칭 감고 있던 욕망의 살들은 뼈마디 풀어놓고 흙속으로 스며들었다 살들이 풀리며 내뿜던 안개의 말들도 간곳이 없다
(1993.7.5)
청룡사를 오르며
네게 보여준 바우덕이의 돌무덤도 이 쯤 물소리에 기대서면
아련한 풍물소리에 묻혀 그 부박한 생의 아픔 짐작 되지 않는다
네가 따라나선 길은 몇 구비를 돌아 청룡사가 보이는
등성이에 이르고 어느덧 네 길을 따르고 있는 나를 만난다
내 나이를 지우며 내 길 위에서 가당찮게 커버린 널,
바우덕이라 하고 나는 너를 거두는 거사라 하면
차라리 저 청룡사가 보이는 이쯤서
와락 너를 끌어안고 네 파란 길과 헝크러지겠구나
(1993.7.10)
늦은 밤, 숲은 나무의 말들로 가득하다
나무들은 몸을 웅크려 생각을 만든다 생각은 잎들을 흔들어 수런거리게 하고 잠든 줄기를 타고 내려와 뿌리의 뒤엉긴 잠을 깨운다 잠 깬 뿌리들은 땅속의 어둠을 더듬어 나간다 뿌리에서 뿌리로 옮겨 뛰며 생각은 가장 높이 솟은 가지 끝에 별들이 층층이 내리는 소리 귀 기울인다 생각은 별들을 향해 푸르른 나무줄기로 일어서다 옹이에 걸려 옹이의 아픈 말들 맴돈다 생각이 옹이의 말들 맴돌고 있는 동안 잎들은 숲을 수런거리는 말로 채운다 말들은 숲속을 춤추며 날아다닌다 말들은 서로 부딪쳐 쨍그렁 소리를 내며 깨어지기도 하고 서로 껴안고 뒹굴기도 하고 서로를 할퀴어 피 흘리기도 한다 옹이의 말들에 시달리던 생각이 스스로를 풀어 푸르른 나무줄기로 하늘 향해 뻗어오른다 줄기의 끝은 어둠이다 늙은 말들이 떨어져 쌓인다 늦은 밤, 숲은 나무의 말들로 가득하다
(1993.7.25)
굴욕은 아름답다
아우는 큰 몸뚱이를 수술대 위에 버리고
충혈 된 눈을 부릅뜬 채 마취되어 있다
집도의가 가리키는 모니터에 아우의 내장이
속속들이 보인다 담낭이 제거된 자리가
검붉을 뿐 내장은 아름답다 연붉은 간덩이
사이로 흐르는 핏물은 불빛에 놀라
기포를 뱉으며 급히 몸을 숨긴다
집도 의는 내시경을 움직여
내장 이곳저곳을 헤집는다
간 한잎 뒤집으면 나타날 것 같던
만년 순경인 아우의 내심은 보이지 않는다
상사의 모멸과 질타의 말들도 피의자를 다루던
온갖 협박과 회유의 말들도 보이지 않고
서늘한 오기도 찾을 수 없다
내장은 아름다울 뿐 더러운 일상에
물들지 않았다 나는 내 가슴과 배를 쓰다듬는다
내장이 나의 손을 거부한다
담낭이 절개되고 돌들이 쏟아져나온다
강렬한 조명을 받아 돌들은 빛난다
그랬구나 내장 속에서 찾을 수 없었던
너의 내심 가슴에 맺혀
욕스러운 나날들 더욱 단단해지고
그렇게 견디어낸 아름다운 굴욕들
빛나는 돌이 되어 네 몸속 환한
고통이었구나
지구의 장엄한 죽음
아황산의 지구는 아름답다
인류의 욕망이 자라는 동안 산성비 내리고
흰 꽃이 피고 죽음의 뿌리는 공룡처럼 자라
거대한 뿌리를 인류의 가슴으로 뻗는다
대지가 산성으로 녹슬어 부식되는 아황산의 제국들이
지하에 핵 버섯을 기르는 동안
아황산에 취해 꽃들이 시들고 나무들이,
새들이, 뱀들이, 물고기들이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그것들 보다 먼저 인류가 서서히 멸종의 길을 웃으며 가고
지구는 다만 침묵의 무거운 띠를 두른채
아름답게 저물어 갈 때
아황산 저 거대한 독초만 최후의 순간 까지 남아
산성비에 무성해지며 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죽음의 황홀한 줄기를 뻗는다
켜켜한 정적만이 지구를 휘감고 있다
산성의 포자를 키우며 새로운 종의 문명을 가꾸어갈
아황산의 지구 아름다운 재앙
장엄한 침묵이여
내 생각 끝에 네가 서 있다
내 생각 끝에 어둠이 서 있다 너는 어둠이었으니
생각이 멀면 멀리 서 있고 가까우면 가까이 서 있었다
언약은 길을 만들고 길은 어둠과 닿아 있어
네가 기르는 죽음을 볼 수 없었다
밤새 한 마리 내 가슴으로 날아들어
어둠을 흔들어 떨고 네게서 자라고 있는
죽음을 볼 수 있게 했다 너는 나를 손짓했다
내 살을 먹으며 내 피를 마시며
비릿하고 황홀한 입맛을 다시며
나는 밤새를 따라 날아올랐다
날아오르는 나를 네가 보고 있었다
그날 어둠속에서 내가 안고 있었던 것은
황금빛 죽음이었을 것이다
내 뼈들이 네 죽음과 뒤엉겨
발광하다 신음소리를 삼키며 쏟아져 내렸다
너는 내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날 이후 나는 밤새를 보지 못했다
(1993.10.15)
깊이 숨은 향기가 두렵다
시린 바람 들꽃세상 파고든다
들꽃은 우레 속에서 꿈꾸어온 세상 버릴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안다 어느 틈엔가 버석거리게 된 잎들을 바람에 보낸다 잎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메마른 줄기를 놓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며 떠나가는 잎들을 위해 문득 몸을 흔들어 향기를 실어 보내고 싶은 애련한 들꽃, 눈을 감는다 들꽃이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깃드는 하늘, 흔들리면 언제나 순결한 씨방은 불임의 아픔 떠올리며 향기를 안으로 숨긴다
깊이 숨은 향기가 두렵다
(1993.10.18)
아름다운 얼굴*
그는 의부를 사촌아버지라 불렀다 치욕스런 가계 부끄럽지 않은 어린 날, 어머니는 씨 다른 그를 무거워 했으므로 늘 충혈 된 자궁 깊숙히 칠흑의 어둠 배고 다녔다 어머니의 어둠은 그의 양손에 잡힌 칼날이어서 자주 베이고 상처투성이로 부랑의 길을 떠났노라고 말했지만 지금도 그는 떠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한쪽이 보이기 시작 했을 때 스산한 땅 월문리로 어머니와 함께 흘러들어 꿈과 현실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는 흔들리다 가슴으로 붕괴되어 내리고 어머니는 그가 비운 월문리를 어둠으로 채우며 언 땅속에 비로소 따스한 집 한 간을 마련했다 무덤은 출감 후까지 따스하여 눈물 마른 그의 언 몸을 녹여주었다 억새바람이 그의 슬픔을 흩으며 등성이의 잡목 숲을 치고 내달았다 그의 몸이 억새처럼 나부끼며 분말 같은 어둠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얼굴 하나
* 송기원의 자전적 소설
열리지 않는 문
아내의 설렘은
드럼주자의 꿈꾸는 백발에 닿아 있다
감미로운 선율 몇 개를 조심스럽게 건너던 아내가
베토벤의 운명에 발목이 잡힌다
저 운명의 소리는
아내의 어둠을 수없이 두드렸을 것이다
어둠은 열리지 않았거나
더 깊은 어둠으로 길을 냈을 것이지만
아내는 어둠과 몸 섞어 살아오며
기쁜 울음이나 슬픈 웃음 같은 것을
잔잔한 주름 속에 넣을 줄 알았다
그것들은 아내의 몸속에서 익어
노을처럼 서러운 빛이 되었을 것이다
누가 아내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다
왜 서글픈지 알 수 없네
그니들은 춤추네
유람선은 두향이의 무덤 아래
푸른 슬픔의 길을 지나고
그니들은 들썩이며 춤추네
보잘 것 없는 그니들의 늙은 세월은
풀풀 마른 먼지 일으키며 춤이 되네
눈을 감고 무아지경으로
기름기 빠진 엉덩이를 들썩이네
한 시절 젊은 노동자들 들뜨게 했을
엉덩이가 실룩일 때 마다
왜 서글픈지 알 수 없네
조글조글한 얼굴하나가
내게 달려드네
많이 본 듯한 얼굴이네
지친 세월이 춤사위에
들썩이며 떨어져나가고
연지곤지 수줍은 각시 얼굴
산이 잠기네 물길이 잠기네
끝내 내가 잠겨
왜 서글픈지 알 수 없네
나의 추락은 지상에 닿지 못한다
학교 앞 문방구점은 갖가지 꿈들로 가득하다 문방구에서 꿈을 고르다 나온 한 아이가 비누방울을 불어 하늘로 날린다 비누방울은 아이와 문방구와 아이네 학교의 넓은 운동장을 둥글게 담아 하늘로 오른다 비누방울을 타고 오르는 아이는 수업 시작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이의 귀가 비누방울에 갇혀 있다
생각이 수많은 방을 만들고 방속에 내가 있다 방들은 생각의 열기로 둥글게 부풀어 하늘로 뜨고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흐른다 방속의 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다니지 못 한다 방들은 서로를 부르며 떠다닌다 혹 생각이 같은 방끼리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면 두 방은 터져버리고 만다 그래도 방들은 서로를 부르며 손을 내밀다 터져버리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지만 나의 추락은 지상에 닿지 못한다 추락하며 생각이 솟아오르고 생각이 또 다른 방을 만들어 공중에 띄운다 나는 생각의 감옥에 갇힌다 생각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1993.11.8)
내가 나를 건너지 못한다
몸속 모래 기둥을 잡고 맴도는 밤 모래바람
내 몸 가득 채운다 몸은 부풀어 오르고
가슴이 터지며 모래언덕 어둠속으로 쓸려간다
저처럼 거대한 모래언덕을 가슴에 숨기고 살았다니
쓸려가는 모래바람 속에 낙타발자국 선명하다
밤마다 저 모래언덕을 넘었던가 모래의 시간을 씹으며
너덜거리는 육신을 끌었던가
별들은 눈뜨지 않았다 희미한 빛은
사막을 건너지 못한 뼈들의 인광이리
멀리 꽃들의 행렬이 보인다 웃지 않는 꽃
필경 사막을 건너지 못할 꽃들 향기조차 무거워
밀랍 같은 표정으로 모래를 차며 걷는다
저 주검의 행렬 속에 내가 있다 함께 걷던 내가
정강이 뼈를 쏟으며 와르르 무너지고
행렬 잠시 주춤거릴 뿐 묵묵한 길은 계속되지만
몸속 사막을 건너지 못하고 꽃들은
검게 산화되어 내 핏줄 떠돈다
내가 나를 건너지 못한다
달빛에 갇혀
달빛의 비명이 어둠을 찢는다
어둠의 상처는 깊고
정적이 오래도록 어둠을 감싼다
달빛은 포르스름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조봇한 달무리를 만들고
나는 달무리 속에 생각을 남근처럼 밀어 넣는다
달무리가 완강한 힘으로 열릴 때마다
비명이 터진다 비명은
숲속의 모든 가지 끝에서 짧고 깊다
비명에 갇혀 달빛을 빠져나오지 못한 생각들은
스산하고 메마른 경련을 하며 한 계절을 버린다
스무 살 먹기 좋은 냄새가 나는 아이
스무 살 먹기 좋은 냄새가 나는 아이, 장미도 향수도 첫 키스도 받아보지 못하고 성년의 밤을 보낸 아이, 밤늦은 시간 점심에 먹은 김치볶음밥맛으로 한 시간 넘어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아이, 그 아이가 일기를 세로로 세웠다
나는 시 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쓰기는 물론 읽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형도, 허수경, 김지하, 정희성.....
많은 시집들을 가지고 있지만
난 다 읽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 하나 있다
숙제를 위해 뒤부터 읽어간 시집이 있다
최승호의 시
난 최승호의 시는 시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난 모든 시는 감정의 사치라고 느껴진다
시는 자신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시와 일기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
정형을 깨버려야 한다고 했다
허나 다시 그 정형 속에 들어가 버린다
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난 허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로 포장된 시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워 있던 말들을 일으켜 새우면 춤추는 말이 되는 것을 ..... 시를 쓸 수 없어 일기를 세웠다며 쑥스러워 하던 네 스무 살 먹기 좋은 냄새가 시였다
(1993.12.3.)
빈들
침묵이 잡초처럼 자라는 빈들
풀벌레소리 마른 풀잎 뒤로 숨고
별빛 숨차게 흐르던 수로 비어
먼 물소리 잊고 있네
붉어지는 하늘 한 자락 잡아 다니면
흙먼지 풀풀 날리며 누더기 마음 달려오고
마른 들꽃 마지막 웃음 터뜨려 마음을 맞네
제 웃음소리에 놀라 쏟아져 내리는 들꽃
흙먼지 속을 마음보다 먼저 달려오네
온갖 소리와 함께 깃들었던 생명들
한 계절을 비우며 떠나고
빈 들은 안식에 들어 깊은 잠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미세한 떨림을 만날 것이네
풀씨들이 일어서는 소리
물들의 돌돌거림
겨울을 건너가는 애벌레들의 숨소리
빈 들은 뜨겁게 품을 것이네
신호등은 지켜지지 않았다
골조가 앙상하게 드러난 그 건물은 허리를 자르고 지나가는 전조등 불빛에 붉은 뼈대를 웅크리며 음울한 웃음을 내보인다
신호등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 밤 중 차량들이 무서운 속도로 짓다만 건물을 치고나가면 달빛이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렸다
건물은 물렁한 그림자를 지상에 느리고 있다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나 오줌줄기를 시원하게 뿌리고는 부르르 몸을 떤다 사내의 어깨에 걸려 있던 달빛이 진저리를 친다 사내는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뱉고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복지원을 짖겠다던 약속이 생판 거짓말은 아니어서 사정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골조 사이 어둔 공간을 따스한 불빛이 채우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지키지 않은 말들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지켜지지 않은 말들은 어둡고 눅눅한 곳으로 숨어들어 푸른곰팡이와 몸 섞었다 버려진 말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핥으며 일어서기를 꿈꾸지만 짓다만 골조들, 버려져 붉게 녹슨 관절을 꺾어 말들의 출구를 막고 있다 지켜지지 않은 것들이 지켜지지 않은 것들을 저렇게 완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