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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군북면 유현리 평촌마을에 사는 인천이씨 이판기(李判基, 82)씨의 배위 정득순(鄭得順, 82)님이 2023.10.6(금, 음 8.22) 향년 82세로 별세하셨다. 슬하에는 3남2녀를 두었다.
나는 같은 함안 군북 유현리 평촌마을이 고향으로 10월 8일(일) 발인날 하관 의례식을 하며 산소(묘소)를 모시는 장지로 직접 가서 조문했다.
이판기씨는 마을 유현리 유현동 마을 유지로 이장을 15년간 하신 분이고, 고인이 되신 정득순님은 초계정씨(박사공파)로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 축암(소바구)마을이 친정곳이고, 4형제 중의 제일 큰집의 3남2녀 중 차녀로 태어나 출가했다고 한다.
이판기씨는 인천이씨로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명동마을, 평광마을 일원에 선대가 살다가 군북면 유현리로 이주해 살았다. 1남 3녀 중 위로 누님 3분은 이석곤ㆍ이막내ㆍ이덕이며 막내로 독남 외동이다.
함안을 빛낸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 출신 애국지사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 1883(고종 20)~1921(임시정부 3, 일본 대정 10)》선생과 가까운 집안이다.
이판기씨의 부친은 평암(호 : 坪菴) 이태룡(李泰龍)으로 인천이씨 항렬 '태(泰)'도 같다. 전해지기로는 호적부나 족보 상으로 10촌 복내로 보여진다(차후 시간이 나면 촌수를 확인해 볼 예정이다)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기념공원은 몽골 울란바토로에 있고, 함안 애국지사 이태준기념관(개관 : 2021년 11월)은 고향 군북면 덕대리 14-54번지(옛 군북역 자리)에 위치한다.
고인이 되신 정득순님의 하관 장례식 사진을《1》《2》부로 나뉘어 올린다.
※자료수집이 부족하여 더 알아서 추가로 수록할 예정이다.
만고의 진리 풍수지탄(風樹之歎)이란 고사성어가 있다.《한자사전 인용》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子息)이 봉양(奉養)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원문 :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나무가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부모(父母)님을 공양(供養)하고 싶어도 부모(父母)님이 별세(別世)하여 세상(世上)에 계시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이다.
「자식(子息)이 부모(父母)에게 봉양(奉養)하고자 하나 부모(父母)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한 채 부모(父母)를 잃은 자식(子息)의 슬픔을 가리키는 말로 부모(父母)가 살아계실 때 효도(孝道)를 다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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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옛 어머니들은 모성애(母性愛)가 하늘에서 땅만큼이라 할 만큼 강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으로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있다.
농산물 뿐만이 아니라 토종 가축(소, 개, 돼지, 닭, 염소, 당나귀, 말, 토끼 등)들도 몸체는 작아도 새끼를 잘 건사하는(키우는) 우수한 습성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토종닭은 취소성(就巢性 : 알을 품고 키우는)이 대단했다. 토종 가축은 1960년대까지 우리 농촌에서 볼 수 있었고 집에서 직접 키웠기에 목격한 사람(세대)이다.
하늘에서 매(솔개)가 맴돌면 하늘의 매 그림자까지 알아차리고서 병아리를 날개 쭉지에 감추고서 꼬꼬닥~ 꼬꼬닥~ 괴성을 크게 지르면서 방어했다. 그러면 사람이 뛰쳐나가서 매를 쫓기도 했다. 옛날에(1950~1960년대)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1960년대까지 예사로 8~10남매 자녀를 낳아 길렀다. 내 어머니도 9남매를 낳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효도도 제대로 못해드리고 돌아가셨다.
나도 나이(75)가 들고보니, 상기 고사성어 풍수지탄(風樹之歎)처럼 후회스러운 회한(悔恨)으로 길이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대략 1만 년 전부터 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자녀’는 곧 ‘노동력’의 개념으로 인식돼왔다.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十二支)에 자(子, 쥐, 새끼 번식, 다산 상징)가 다른 11개 동물을 제끼고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도 자손중다(子孫衆多)를 최고로 쳤다.
풍수지리학 조상의 명당 길지도 자손 번창ㆍ번성ㆍ번식을 가장 중시했다. 자손이 많아야 그 중에 인물도 난다는 진리이다.
옛사람들은 오복(五福)도 오래 사는 것(수:壽), 부자로 사는 것(부: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한 것(강녕:康寧), 귀하게 사는 것(귀:貴), 자손을 많이 두는 것(자손중다:子孫衆多)을 갈구했다.
우리 부모 세대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고 기를 때, 먹이고 입히는 정도에 그치는 아주 최소한의 양육 행위 정도면 충분했다. 옛날 세대(1980년대까지)는 그러했다.
오늘날에는 잘 키우려고 양육비가 많이 들어서인지, 그렇다고 옛날처럼 잘 키우지 못하면서 출산율이 전 세계 최하위(꼴찌)로 2022년 기준 가임 여성 1명당 0.778명이라서 참 나라의 걱정꺼리다.
인천이씨 이판기ㆍ정득순(고인) 부부 가문은 독남 외동에서 출발하여 3남2녀로 후손이 많아서 장례식이 전체적으로 참 보기 좋았다는 소감을 남긴다. 자녀 3남2녀의 차례는 재운ㆍ재근ㆍ재순ㆍ성호ㆍ경연 순이다. (며느리와 사위 명은 표기 생략함)
상단 묘소 상석문이다. 이판기씨의 선친 묘소이다.
坪菴處士仁川李公諱泰龍之墓(평암처사인천이공휘태룡지묘) 壬坐(임좌) 配孺人靑松沈氏:沈鳳順:雙墳(배유인청송심씨:심봉순:쌍분)
2023.10.6(금) 별세하여 3일장으로 10.8(일) 안장식으로 산소를 모신 정득순 여사의 묘소이다.
상단의 시부모되시는 인천이씨 이태룡ㆍ청송심씨 심봉순의 묘소 아래에 모셨다.
고인 자제들이 산에까지 물을 운반해서 잔디에 물을 주었던 물통 2개에는 남겨진 물이 반쯤 채워져 있었다. 효심과 모정의 상징(옛 시묘살이처럼)으로 보였다.
상기 사진 2장은 2023.10.20(금) 유현리 평촌에 갔다가 조성된 묘소를 찾아 찍은 자료이다.
이 한 장의 사진 : 1993년(30년 전) 청송심씨 심봉순(이판기씨 모친, 초계정씨의 외손녀)와 내 선친 정현락(호 : 유은, 호적명 : 정광식, 당시 82세)의 사진이다.
초계정씨 25세 정연만(鄭演滿)은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子)는 정태규(鄭泰圭)이고, 딸(女) 넷(4)은 배경만(裵敬萬, 분성인), 심상조(沈尙祚, 청송인), 이모(李某, 강양인, 아들 이복준:李福俊), 조복규(趙福奎, 함안인, 아들 조용응:趙鏞應)에게 출가했다.
이판기씨의 모친 청송심씨 심봉순는 군북면 수곡리 늪실의 청송심씨로 부친 심상조와 초계정씨(정연만의 딸) 내외의 딸로 외갓곳 군북면 유현리 평촌마을에 살게되었다.
이판기씨는 모계로는 초계정씨의 후손이고, 이판기씨의 배위까지 초계정씨(박사공파)이기에 이판기씨의 자녀 3남2녀는 초계정씨의 피를 심씨 할머니에 이어 2차례 이어받은 혈통적 인연이 있다.
초계정씨 16세 정설(경충재 재실 정구룡의 독자, 인천이씨의 아들임)까지 합하면 인천이씨지만 초계정씨의 혈통을 3번째나 중복으로 받아 초계정씨와는 남이 아니다.
사는 곳도 경충재 재실 바로 앞집이다. 후손들은 그런 혈연을 대대로 전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 아들ㆍ딸 구분없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가 변하여 오늘날에는 가을 묘사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진다.
청송심씨 심봉순(이판기 모친)의 외조부 정연만의 후손들은 정태규(鄭泰圭, 과동댁, 대목수였음, 정병록의 증조부)의 子로 정응도(늪실댁, 손자 정병록 계열), 정이도(살음댁, 월촌 정재영 계열), 정삼도(부천댁, 목수였음, 정영철 계열)로 청송심씨 심봉순(숲실댁, 이판기 모친)과는 내외종 4촌간이 된다. 이판기씨와 월촌 정재영ㆍ평촌 정영철 등은 6촌간이 된다.
정영철 조부(정태규, 과동댁)와 내 조부(정임도, 사촌댁)는 재종간이고, 정삼도(부촌댁)ㆍ청송심씨 심봉순과 내 아버지 정현락(용산댁) 간에는 8촌이고, 정영철과 나와는 10촌이고, 이판기씨도 모계로 나와 같은 10촌이 된다. 인천이씨지만 나와도 혈통적으로 남이 아니다.
요즈음 세대들은 내외이종 친족간의 촌수를 모르기에 한 번 논거해 보았다.
이 한 장의 사진 : 4년 전인 2019.5.12(일) 부처님오신날 법수면 우거리 흥복사에서 고인 정득순(당시 78세)과 막내딸의 사진이다.
내가 당시에 석가탄신일을 맞아 함안에 내려갔다가 흥복사에 들려서 블로그 글 2편을 남겼다. 그때 들어간 사진 2장 중 하나이다.
37년 전인 1986년 음 2월 28일 유은 정현락(부친) 회혼례(결혼 60주년) 잔치 때의 사진이다.
앞줄 좌로부터 청송심씨 심봉순 숲실아지매(흰머리 측면 얼굴, 이판기 모), 청송심씨 늪실아지매(정병록 조모) 내 2째 이모 조은박, 내 3째 이모 조순희이다.
앞줄 가운데 분은 음식 손님접대 준비(자원봉사)하는 고인이 된 정득순 여사가 보인다.
뒷줄 좌로부터 정영조 2째 사위 김영식, 우거리 안정숙 자형, 미이띠기형수(정병열 모) 늪실 청송심씨로 출가간 유전 정호영 누님, 늪실아지매 (이분도 청송심씨다. 정병록 조모), 울산 정점영(내 사촌형)이 보인다.
좌로부터 정봉영(내), 조복희(어머니), 청송심씨 늪실아지매(이름은 추후 확인 예정, 정병록 조모), 정현락(아버지) 순이다. 약 45년 전 사진으로 보인다.
천제봉 우거리 절 흥복사 법당에서 삼배하는 청송심씨 눞실아지매(머리 하얀분, 정병록 조모), 조복희(어머니) 순이다. 맨 오른쪽 엎드린 사람은 안맹수(큰형수, 정병권 모, 다른 독사진에는 나오지만 미첨부)이다. 약 45년 전 사진으로 보인다.
우리 초계정씨 집안에서는 늪실 청송심씨로 2분(이판기 외조모, 유전 정호영 누님)이 시집가고, 청송심씨 쪽에서 2분(지실아지매 정병우 조모, 늪실아지매 정병록 조모)이 시집왔다.
이 1장의 사진 : 38년 전인 1985년 10월 좌로부터 정갑영 형님(당시 46), 정현락 부(당시 74) 조복희 모(74), 청송심씨 심봉순 숲실아지매(이판기 모), 안맹수(정병권 모, 58), 정봉영(37)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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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전 진한 회상의 청송심씨 심봉순의 중매 스토리텔링
숲실아지매 심봉순(이분도 원래 정이 많으신 분이다)의 언니의 아들(생질 : 조신제, 생존시 100세 내외 세대)이 부산시 중구 영주동 코모도호텔 아래 산복도로에서 당시 목욕탕(당시는 좋은 직업임, 전직은 부산지방국세청 고위 공직자 출신이라 함)을 경영하는 상당한 부자로 살고 있었다.
부산에 중매를 한다기에 부모님의 권유도있고, 숲실아지매(심봉순, 이판기 모친)의 간곡한 권고로 호기심 반 흥미 반으로 숲실아지매(이하 심봉순 표기)를 모시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 지리에 어두운 심봉순이기에 부산진 역에서 심봉순 언니집 주소로 택시로 가다보니(안내 겸 모시다 보니), 부산 영주동 심봉순 언니 집으로 자의반 타이반으로 우쩌다가 끌려서 들어가게 되었다. 본가가 영주동의 하부 산복도로변 2층 슬라브집으로 부산 지리를 알기에 지금도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심봉순 언니분이 함안 시골(군북면 수곡리 늪실에서 가야읍 가야리 함안조씨 가문 출가) 출신이지만, 당시 부산이란 큰 도시에 사시고 개화되어서 인지 인품도 좋으시고 이야기도 철철하시고 사교성의 대화도 엄청 좋았다는 기억이다. 여장부같은 활수 할머니 같았다. 보통할머니와는 달랐다.
정현락 아버지와는 외갓 8촌 간으로 소시적에 외갓집(과동할매가 외숙모가 됨, 정영철 조모) 유현리 평촌을 자주 내왕해서 인지, 우리집이 바로 외가의 옆집이기에 우리 할매 김대금(사촌댁)과 우리집 내용을 너무 잘 아는 사이로 너무 친절했다. 동생되시는 숲실아지매 심봉순(이판기 모친)이 같은 동네에 사시니 내왕도 있을 터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중매한다는 아가씨를 알고보니 자기 친손녀 3녀2남 중에 둘째 딸이었다. 잠시 남포동으로 외출한 손녀 둘(자매, 둘째, 셋째)을 목욕탕하는 아들 내외를 통하여 전화를 하면서 집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모할머니(심봉순)가 소개하는 어느 총각이 집에 와 있다니 너무 놀라서 친구집에 계속 머물며 지연작전을 쓰며 집에 들어올 수가 없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심봉순 자택 2층 언니 방에서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머물다가, 이런 상황을 알아차리고서 수정동 큰형님 댁이나 정갑영 형님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심봉순의 언니가 손녀딸이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자기방에 자고 가라고 계속 붙들어서 나는 엄청 난처했고, 계속 사양 사양하며 10시경까지 붙들여 있다가 돌아온 너무나 진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오늘날까지 새겨져 있다. 순박한 숲실아지매 심봉순이 제3의 장소를 주선해야 할 건데, 직접 처녀가 사는 집으로 대려간 것이다. 아들 내외는 목욕탕 관리로 거기에 주로 있고, 손자손녀는 본가 심씨할머니가 있는 곳에 거주하는 형태였다.
심씨 할머니는 목욕탕 하는 아들 내외를 통하여 손녀의 근황과 전화 호출을 계속했다. 중매하는 둘째(차녀) 아가씨는 결국 집에 들어오지 않아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붙들여서 그 방에서 잤더라며 나의 인생의 행로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잤다면 바로 처가집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송심씨 자매 두분과 작별 인사를 정중히 나누고 그 댁을 탈출하다싶이 나왔다.
심봉순의 언니 청송심씨 할머니가 나를 첫 인상으로 얼마나 잘 보았기에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하니(임시 중학 교사를 하면서 임용고사 합격으로 농업고교 교사 발령 대기 중이었음) 중매를 떠나서 너무 고맙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니 정말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인생사 인연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1975년 봄쯤으로 내가 27세였다. 숨긴 상태로 교제하고는 있었지만 가정 사정으로 결혼을 계속 미루던 진주의 집사람과 그후 28세 때 1976년 1월 25일 황복련과 급진전으로 결혼했다. 아버지ㆍ어머니 2분이 궁금하여 군북역에서 경전선 기차를 타고 사천군(현 사천시) 곤명면 완사초등교를 나 몰래 직접 찾아가는 일까지 벌어진 진풍경의 결과였다. 9남매를 낳으신 부모님의 자식의 성혼 책임 의무와 한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즈음 세대들은 중매 소개(소개팅)를 예사로 대하고 고맙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풍조와 연유인지 노총각ㆍ노처녀로 독신자가 너무 많다. 인연이 성사되든 안 되든 좋은 맞선 추억 스토리 하나쯤은 간직함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