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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제공 :교보문고
- 책소개
19세기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 쇼펜하우어의 일대기『쇼펜하우어 인생론』. 대문호 괴테가 극찬하고 철학자 니체를 탄생시킨 독일 최고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생철학을 담은 책이다. 인간의 근원적 가치에 대해 던지는 심오한 고뇌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세계의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해탈은 개체성을 초월한 플라톤의 이데아를 체득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지만 본질적인 해탈은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소위 열반에 의해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목차
쇼펜하우어의 생애와 사상
1. 철학과 그 방법에 대하여
2. 우리의 참된 존재는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
3. 존재의 허무에 대하여
4. 삶의 괴로움에 대하여
5. 자살에 대하여
6. 살고자 하는 의지의 긍정과 부정에 대하여
7. 종교에 대하여
8. 지성에 대하여
9. 사색(思索)에 대하여
10. 독서에 대하여
11. 여성에 대하여
12. 인생의 세 가지 근본적 규정
13.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에 대하여
14. 인간이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15. 인간이 표상(表象)하는 것에 대하여
16. 늙음에 대하여
17.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18. 철학적 단장
19. 비유와 시
나의 반생(半生)
연보
추가 정보
상세이미지
19세기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 쇼펜하우어의 일대기!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평생을 두고 읽을 만한 책!
대문호 괴테가 극찬하고 철학자 니체를 탄생시킨 독일 최고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인생철학.
인간의 근원적 가치에 대해 던지는 심오한 고뇌의 철학서.
쇼펜하우어의 근본사상은 칸트(kant)의 인식론(認識論)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론 베다(Veda)의 범신론(汎神論) 및 염세관의 결합이다.
그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그의 철학의 근본 원리로 삼았으며 이 세계는 미망(迷妄)과 투쟁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세계의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해탈은 개체성을 초월한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체득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지만 본질적인 해탈은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소위 열반(Nirvana)에 의해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상(現象)의 세계는 우리의 표상(表象 : Vorstellung)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만물의 근원은 살고자 하는 의지(Willed)이다. 이 의지야 말로 인생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므로 이 의지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염세 철학의 근본 사상이다.
쇼펜하우어의 사상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칸트(Kant)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칸트의 후계자들, 특히 헤겔(Hegel)을 허수아비로 경멸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칸트의 견해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칸트가 인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물자체(物自體, Ding ansich)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칸트의 현상(Phenomena)과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인식되고 있는 세계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지성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물자체(物自體)는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며 그것은 곧 의지인 것이다. 그는 ‘세계는 나의 표상(Mein Idea)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이데아’를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데아를 갖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이 ‘나’의 존재를 절대적 필연성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현상’세계는 ‘참된’세계가 존재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이로 만일 우리가 우리들 자신 즉 이‘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 인식은 우리가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인식은 이데아(Idea)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지만, 자신에 대한 인식은 직접적인 실재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자신에 대한 인식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으며 마치 다른 모든 현상을 시간과 공간속의 대상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들 자신을 시간과 공간속의 대상으로 알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육체적 존재로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주관적으로도 알고 있으며 우리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 의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감정과 욕망을 갖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 내적 세계를‘의지’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즉 우리는 또한 우리들 자신을 의지로서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나의 육체와 나의 의지는 하나이다.’라는 ‘유일사상’이 생겨난다. 나의 육체는 나의 의지의 현상적 형태이며 나의 의지는 나의 육체의 본체(本體)이다.
즉 나의 육체는 ‘현상’이며 나의 의지는 물자체(物自體) 인 것이다. 만일 의지가 나의 육체의 참된 모습이라면, 그것은 또한 모든 다른 물체, 즉 모든 다른 ‘현상’의 참된 모습이다. 나는 나 자신을 의지와 표상(Idea)으로서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개의 돌멩이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우리와 돌멩이 사이의 유일한 차이이다. 즉 한 개의 돌멩이는 본체(本體)인 동시에 현상이며 물자체(物自體)인 동시에 현상이며 의지인 동시에 표상(Idea)인 것이다. 즉 돌멩이의 육체와 의지는 하나이며 다만 그 의지는 인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식의 형태로서 오직 현상의 단계에만 즉 본체의 단계에만 속해있는 세계의 시간적 공간적 존재의 물자체라는 ‘참된 세계’는 동일하다. 따라서 돌멩이의 내부에 있는 의지와 나의 내부에 있는 의지는 동일한 의지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이중적이다. 즉 ‘표상(Idea)으로서의 세계’는 외부세계로서 그것은 물질적 세계 · 시간의 영역 · 공간과 인과율(因果律)· ‘현상’, 칸트의 현상 세계이다. 그리고 ‘의지로서의 세계’는 내부 세계로서,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형태에 종속되어 있지 않는 주관적 세계이며 단일체이며 ‘실재’이며 칸트의 본체(本體)의 세계이며 물자체(物自體)인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은 독자들에게 말해 둘 필요가 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이다. 특히 독자들은 세계가 의지와 표상(Idea)의 이중성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만일 여러분들이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이 책을 읽음에 있어 때때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각 개인을 구체화된 의지로 보고 있다. 여기서의 의지는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 ‘ 각 개인은 구체화된 의지이다.’ 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물론 재산의 소유권을 포함해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이기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투쟁이 생겨나며 그 투쟁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뒤따른다. 그 고통은 인생의 불가피한 상태이며 행복은 그 고통이 감소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은 소극적인 것이다.
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오직 의지를 부정하는 것, 즉 그 투쟁에 끼어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은 밝은 지성(의지의 본질과 의지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파기할 수 있는)에 의해 얻어진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유일한 참된 선(善)은 사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세계, 즉 표상(Idea)으로서의 세계는 무(無)라는 것을 인식하고 오직 절멸만이 삶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참된 치료방법 이라는 것을 긍정하고 마침내 절멸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생애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1788년 2월 22일 발틱(Baltic)해 연안의 도시 단찌히(Danzig)에서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Heinrich Floris Schopenhauer)와 상인의 딸인 어머니 요한나 헨리에테(Johanna Henriet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네덜란드 혈통의 집안이었으나 십칠 세기 말부터 십팔 세기 초 사이에 독일의 상업 도시인 단찌히(Danzig)에 정착했다. 그의 집안은 수 대(代)에 걸쳐 천성적인 사업 수완으로 커다란 부(富)를 이룬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안드레아스 쇼펜하우어(Andreas Schopenhauer)는 네덜란드계의 단찌히 여성인 안나 레나테 소에르만(Anna Renate Soermann)과 결혼했는데 쇼펜하우어 집안에 병적인 요소가 유전되기 시작한 것은 이 부인으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병적인 요소는 그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H. F. 쇼펜하우어 삼형제에게도 심한 증상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H. F.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여 지나칠 정도로 자유를 좋아했다.
아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아버지 H. F. 쇼펜하우어(Heinrich Schopenhauer, 1747~1805)는 교양 있고 유능한 상인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요한나 헨리 에테(Johanna Henriette, 1766~1838)는 H. F. 쇼펜하우어보다 약 이십 세 연하(年下)의 여성으로 왕성한 지식욕을 가진 쾌활하고 태평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저작 활동을 하는 등 매우 특이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특히 파티를 열거나 파티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여행을 좋아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는 H. F.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H. F. 쇼펜하우어는 아내 요한나를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을 여행하는 도중 아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를 임신한 요한나가 몸의 상태가 좋지 않자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단찌히(Danzig)에서 그를 낳았다.
H. F. 쇼펜하우어는 그를 상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아투르(Arthu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Arthur라는 이름은 어느 나라에도 있는 이름이며 철자도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결혼 전에 이미 마련해 놓은 농장과 할아버지 안드레아스(Andreas)의 집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가 5세 때인 1793년 5월, 자유 도시 단찌히가 프러시아에 병합되었다. H. F. 쇼펜하우어는 수 대(代)에 걸쳐 살아오던 정든 단찌히를 떠나 자유를 찾아 막대한 재산을 버리고 가족들과 함부르크(Hamburg)로 이주했다.
이즈음부터 어린 쇼펜하우어에게는 평생토록 고통스러운 운명이 될 발작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과 특정한 위험에 대한 공포심으로부터 오는 발작이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그를 현실에 밝고 유능한 상인으로 만들어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쇼펜하우어는 그의 여동생 아델레(Adele)가 태어나던 해인 1797년(당시 그는 9세였다)에 프랑스의 루 아브르(Le Havre)에서 상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인 그레그와르 드 블레지메르(Gr?goire de Blesimaire)의 집으로 보내어졌다. 그것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상인에게 필요한 프랑스어를 익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레그와르는 아들 안딤과 똑같이 그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는 안딤과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2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이 2년 동안을 그의 소년 시절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온 그가 프랑스어를 익힌 것을 보고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다. 하인리히는 함부르크의 상인 양성 학교 중에서도 명문교인 룽게 사립학교에 그를 입학시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모든 과목에 걸쳐 학교의 수업을 능가했다.
그는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그가 가난한 학자의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그에게 김나지움에 입학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과 함께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떠날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했다. 물론 장기간의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후에는 상인의 길을 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여러 나라로 데리고 다니면서 상인에게 유익한 견문을 넓혀 주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여행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가 십오 세 때인 1803년부터 2년에 걸쳐 그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작센, 시레지아, 프러시아 등을 여행했다. 후일 그는 이 여행을 회고하면서,
“만일 그 오랜 기간의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2년 동안의 청춘을 고전 학습과 고전어를 공부하면서 보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그 시간을 완전히 헛되이 보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행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직관과 인상과 직접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는 습관을 일찍부터 익혔다. 그것은 손실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행을 한 그 2년 동안의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 버렸다고 후회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가 여행 기간 중 쓴 일기에는 여러 나라 국민들의 어리석음과 일반적인 인간의 약점 및 결점 등에 대해 느낀 인상을 조숙한 비판적 평론과 염세적 고찰로 기록하고 있다.
1805년 초 여행을 끝내고 함부르크(Hamburg)로 돌아온 후,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상인의 길을 가기 위해 평의원(評議員)인 예니쉬(Jenisch)의 상점에 점원으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학문에 대한 내적 욕망이 강했던 십칠 세의 소년 쇼펜하우어는 상점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그 시기는 고통의 시기였다.
그 즈음 아버지는 집안의 유전적 징후인 심한 우울증과 함께 히스테리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1805년 4월, 운하(運河)에 떨어져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친척들과 가족들은 그가 자살한 것이라고 믿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에 대해,
‘선량한 아버지는 평생을 고독 속에서 살았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로해 주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사랑 방법이었다.’
라고 쓰고 있다. 이 신랄한 비판은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학문의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자식으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아버지의 상점을 정리하고 영원히 함부르크를 떠나 바이마르(Weimar)로 갔어도 그는 그토록 싫은 예니쉬(Jenisch)의 상점의 점원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고뇌와 상심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격심한 발작이 그를 더욱 실의(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며 그의 영혼은 절망에 휩싸였다.
예기치 못한 하인리히의 죽음은 아내인 요한나에게는 해방을 의미했다. 바이마르에서의 그녀는 사교적 재능과 문학에 대한 강한 흥미로 인해 문예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살롱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녀가 경영하던 살롱에는 때때로 괴테와 다른 작가들도 드나들었으며 그녀가 직접 몇 권의 소설을 써 명성을 얻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마르에 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자신의 실의와 절망 상태를 호소했다. 그녀는 아들의 편지를 문예 클럽에서 알게 된 친구 칼 루트비히 페르노(Karl Ludwig Fernow)에게 보여주었다. 페르노는 쇼펜하우어에게 편지를 보내어 용기를 북돋아 주며 학문의 길을 갈 것을 권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편지를 읽고 용기와 희망을 얻어 마침내 예니쉬 상점을 떠나 학문의 길을 갈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요한나는 비사교적이고 인간을 혐오하는 쇼펜하우어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1807년 6월,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고타(Gotha)에 있는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고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나지움의 우수 반에 편입된 그는 교장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데링(Friedrich Willhelm Doering)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라틴어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문 세계로의 최초 인도자인 데링의 호의를 그는 한 편의 풍자시로 저버리게 되었다. 그것은 데링 교장이 학교 교수들 중의 한 사람을 풍자시로 빈정댔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해 십이 월, 그는 김나지움을 떠나 다른 학교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로 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다. 그들은 곧 심한 말다툼을 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항상 너에게 말해 온 바이지만 너와 함께 지내는 것은 심한 고통이며 옆에서 너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나의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현재의 너와는 함께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너의 좋은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며 또 너의 심성이나 인품 때문도 아니다. 나를 너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너의 견해와 판단, 그리고 너의 습관이다. 표면으로 나타나는 감각의 세계에 관해 어느 것 하나도 너와는 맞지가 않는다. 네가 2, 3일 다녀가기만 해도 이 지경이다. …… 네가 하숙하는 집이 너의 집이다. 나의 집에서 너는 손님일 뿐이다…….’
그녀는 쇼펜하우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이는 벌어졌으며 끝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바이마르에서 김나지움에 다니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지 못했다.
그는 바이마르의 김나지움에서 특히 고전어 학습에 힘을 기울였다. 1809년 성년이 되자 아버지의 유산 중 그의 몫을 물려받았다. 그해 시월, 2년간의 김나지움 과정을 마친 후 괴팅겐(G?ttingen) 대학에 입학하여 1년간 의학과 과학을 공부한 후 중지하고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특히 플라톤과 칸트의 작품들에 심취했으며 논리학 · 심리학 · 해부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공부했다.
1811년 가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에서의 2년 동안의 생활을 마치고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다. 그것은 오로지 철학에 매진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곳에는 피히테(Fichte) ·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등의 대가(大家)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의 자아의식은 이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으므로 그 두 대가의 가르침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두 철학자의 본질적 성격은 그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즉시 반발하고 그들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존경심은 혐오로 까지 변했다.
“철학과 종교는 서로 상대방이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종교적이 아닌 인간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
라는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종교적인 인간은 결코 철학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한 인간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인간은 결코 종교적 이어서는 안 된다. 철학하는 자에게 안락은 없고 위험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게 걸어간다!”
라고 반박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에 머물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1813년 나폴레옹(Napoleon)이 독일을 침공하여 베를린이 위험해지자 그는 베를린을 떠나 드레스덴(Dresden)과 바이마르(Weimar)를 거쳐 루돌슈타트(Rudolstadt)로 갔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충족 근거율(充足根據律)의 네 가지 근원(根源)에 대하여>라는 학위 논문을 완성하여 예나(Jena)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았다.(1813년 10월)
이 논문의 최초의 독자 중에는 괴테도 있었다. 자신의 사색과 생생한 직관을 기초로 하는 이 젊은 학자의 태도는 괴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 위대한 현자와의 교제는 쇼펜하우어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그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와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또 다시 어머니와 다투고는 1814년 5월에 바이마르를 떠났으며 그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 몇 개월 동안 바이마르에서의 생활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마지막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떠나 드레스덴(Dresden)으로 가서 181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는 그의 가장 풍요로운 창조적 표현의 시기이었으며 무한히 솟아나는 천재적 사고 활동의 시기였다. 그는 그곳에서 천재적 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면서 과거의 모든 경험 · 관찰 · 사색 · 사상의 과정 등을 정리하여 그의 철학적 체계를 세웠다. 그가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를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우파니샤드를 통해 인도의 철학을 알게 되었으며 우파니샤드는 그의 염세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드레스덴(Dresden)에 머무는 동안 그의 주저(主著)인≪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 초고(初稿)를 완성했다. 이 책은 1818년 말에 출판되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1818년 9월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1년에 걸쳐 베네치아 · 프러시아 · 보로니아 · 로마 · 나폴리 · 밀라노를 여행한 다음 다시 베네치아를 거쳐 바이마르(Weimar)로 향했다. 그가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 밀라노에서 누이동생 아델레(Adele)의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와 자신의 전 재산을 맡긴 루트비히 아브라함 무르 상회의 도산(倒産)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거의 전 재산을 그 상회에 예금하고 있었던 쇼펜하우어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나누어 줄 것을 승낙했다.
귀국 후 그는 강사직을 얻기 위해 베를린 대학에 이력서를 제출했다.(이 이력서는 <나의 반생>이라는 제목으로 책 뒤에 실었음을 독자들에게 일러둔다.) 1920년 마침내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정신에 대한 학설에 대하여>라는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주(週) 5회의 강의 시간을 헤겔(Hegel)이 강의하는 <윤리학과 형이상학>시간과 의도적으로 일치시켰다.
그의 패배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그의 철학 상의 업적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헤겔은 이미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청강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는 다음 학기에도 강의 시간을 발표했지만 역시 강의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파멸적인 실패였다.
그즈음 예나(Jena) 문예신문에 베를린 대학의 무급(無給)강사인 F. E. 베네케(Beneke)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평론이 실렸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청강한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평가인 그는 쇼펜하우어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해 그 책을 왜곡 인용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무책임하고도 부당한 혹평을 했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동안 그에게는 두고두고 화가 치미는 사건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1821년에 그는 그곳에서 방을 빌렸다. 그의 방에 인접해 있는 작은 방에는 카룰린느루이제 마르쿠에트(Caroline Louise Marquet)라는 사십칠 세의 침모(針母)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집 주인의 먼 친척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방에는 로비가 달려 있었는데 물론 그 로비는 통로로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라운지로 사용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쇼펜하우어는 그 라운지에서 그녀가 다른 두 사람의 부인과 함께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불청객들에게 물러갈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녀가 응하지 않자 쇼펜하우어는 억지로 그녀를 문 밖으로 밀어냈다. 그녀가 완강히 저항하자 그는 약간 거칠게 다루었다. 그러다가 세파에 찌들대로 찌든 그녀와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의사로부터 상해(傷害) 진단을 얻어 그를 상해죄로 고소했다. 재판 결과 쇼펜하우어는 패했으며 재판 비용과 함께 그녀에게 위자료로서 종신토록 매년 얼마씩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이 사건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부당한 소송사건으로 간주했다.
이 소송사건과 철학 강사직에 대한 좌절로 인한 초조감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순조롭게, 즉 자신의 철학 체계를 자세히 강의할 수가 없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프러시아의 수도인 베를린에 대한 그의 큰 기대는 환멸로 변했다. 그리하여 1822년 그는 베를린 가정 재판소에 자신의 유언장을 맡기고는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스위스를 거쳐 밀라노 · 베네치아 · 피렌체 등을 여행했다. 그것은 생(生)의 기쁨으로의 여행이기도 했다. 1823년 5월 여행으로부터 돌아오는 도중 뮌헨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약 1년간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극도의 우울증이 그를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 한 발짝도 방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뮌헨에서의 이 1년은 그에게는 생애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을 것이다.
이때 그의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북부(北部) 바이에른 지방의 나쁜 기후를 피해 카스타인의 온천장으로 갔다. 그곳 요양원의 방명록에서는 ‘쇼펜하우어 1824년 5월 29일부터 동년 6월 19일까지 이곳에 머무름’이라는 그의 기록을 지금도 볼 수 있다. 끊이지 않던 귀의 통증이 조금 가시자 9월쯤 그는 드레스덴(Dresden)으로 갔다.
1825년 4월말 그는 드레스덴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왜냐하면 드레스덴은 과거 그가 수년간 머무르면서 위대한 창작에 몰두했던 때와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즐거웠던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 자신의 사상 생활을 위해 무엇을 얻었는가는 그의 친구인 프리드리히 오잔(Friedrich Osann)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그 편지에서,
“나는 경험이 풍부해졌으며 더욱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독서와 학습을 위해서는 견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나는 고귀한 사람들의 생활도 가까이에서 보면 실제로는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또 권태가 얼마나 그들을 괴롭히는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민족은 내게 주목해야 할 많은 소재들을 제공해 주었으며 나는 피렌체의 모든 예술 작품들을 연구했습니다.”
라고 쓰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그의 저서에 기록했다. 그는 그것이 직관의 가치와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 자기가 보고 들은 것(혹은 독서에서 얻은 것)들을 쌓음으로써 차츰 견해를 넓혀 주었으며 그의 사상의 기초에 항상 새로운 실증의 자료와 확증의 자료 · 논증의 자료를 공급했다고 보았다. 이것은 또한 그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는 그 편지에,
“나는 이런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상은 삼십 세 늦어도 삼십오 세까지의 세계에 대한 인상에 의해 생겨나므로 그 이후의 모든 것은 그 시기의 사상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엘베티우스(Helv?tius)의 말은 사실이라고 말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인간 혐오의 철학자이며 삶의 세계에 대한 위대한 관찰자인 쇼펜하우어의 사상의 바탕은 그의 혜안과 파악력에 의한 직관과 축적되는 경험에 의해 점점 살찌워졌다.
베를린에서의 그의 생활은 3년 전 베를린에서의 그의 생활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불명예스러운 베를린 대학의 강의를 계속했다. 그는 한때 결혼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보다 높은 사명을 지향하기 위해, 정신과 정력을 모든 결혼 생활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희생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서민적 안주(安住)에 대한 발작적 동경을 떨쳐 버렸다. 그는 ‘권리를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를 두 배로 증가시키는’ 결혼 생활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불명예스러운 베를린 대학 강사직에 종지부를 찍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보람 있는 활동을 하기를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831년 8월 콜레라가 베를린을 습격할 때까지 그 강사직을 참고 견디었다. 콜레라는 베를린에 심하게 퍼졌으며 그해 십일월에는 헤겔(Hegel)이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로 갔다. 그곳의 기후는 그에게 적합했으며 콜레라로부터 보호될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우울증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다시 악화되었으므로 그는 만하임(Mannheim)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약 1년간 머문 후, 1833년 6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되돌아왔다. 그는 세인(世人) 속의 이방인으로서 은자(隱疵)의 생활을 즐기며 독창적인 고독 속에 창작 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
그가 최종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정주(定住)한 것은 그의 나이 사십오 세 때의 일이었다. 즉 그는 일반적으로 최고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십 대 중반의 나이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이십칠 년 동안의 생활은 판에 박은 듯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목욕을 한 후 아침 식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책상에 앉아 점심때까지 저작 활동을 했다. 오후에는 1시간 반 동안 플루트(Flute)를 연주한 다음 밖에 나가 점심 식사를 했다. 점심 식사 후 그는 집으로 돌아와 4시까지 독서를 했다. 4시부터는 아무리 날씨가 나쁘더라도 두 시간 정도 산책을 했으며 6시에 도서관에 들러 타임지(The Times)를 읽었다. 저녁에는 극장이나 음악회 관람을 한 후,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 후 밤 9시에서 열 시 사이에 집으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십칠 년간 이와 똑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저작 활동에 있어서 먼저 그의 주저(主著)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충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독서에 있어서는 특히 플래톤 · 아리스토텔레스 · 세네카와 같은 위대한 고전 작가들의 저서를 통독했으며 셰익스피어(Shakespeare), 괴테(Goethe), 칼디롱(Calder?n), 바이론(Byron), 페트라르카(Petrarca), 번즈(Burns), 뷔르거(B?rger) 등의 시인들의 작품과 세르반테스(Cervantes) 의 ‘돈키호테’ · 루소의 ‘신(新) 엘 로이즈’ ·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등의 소설들도 애독했다.
1836년 그는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대하여>를 저술했으며 1840년에는 <도덕의 기초>라는 논문을 썼다. 그리고 이듬해 이 두 논문을 묶어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라는 제목으로 간행했으며 1844년 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 2부를, 그리고 1851년에는 오늘날까지도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가장 많이 애독되고 있는 ≪여록(余錄)과 보유(補遺), Parergaund paralipomena≫를 간행했다. 실제로 그의 명성은 이 저작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858년 칠십 회 생일을 맞았을 때에는 세계 각지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의 고독한 생활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생활의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가사를 도와주는 사람이 바뀐다거나 애견(愛犬)이 바뀌는 것뿐이었다.
1860년 9월에 갑자기 호흡곤란이 오더니 그는 폐렴에 걸렸다. 9월 21일 아침, 마침내 위대하고 성실했던 철학자는 세상을 떠났다. 9월 26일 그의 시체는 시립 중앙 묘지에 안치되었다. 묘비에는 ‘Arthur Schopenhauer’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 그 이외에는 날짜도, 생존연대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묘지를 어디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무데라도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볼 테니까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유언장에는 친구·가사를 도와준 사람에게 상속하는 유산 내용과 함께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희생된 프러시아 병사들의 유족과 부상자들에게 유산의 일부를 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벨리사리우스(Belisar)에게 약간의 은혜를 베풀라!”
였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 연구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전설상의 비잔틴(Byzantine)의 총사령관 벨리사리우스의 운명을 상기시킨다.(로마 신화에서 배은망덕한 유스타니아누스 대제는 벨리사리우스의 공명과 공훈을 질투하여 그를 내쫓아 걸인이 되게 했다.)
연 보
1788년
ㆍ 2월 22일 독일의 단찌히(Danzig)에서 부유한 은행가인 아버지 Heinrich Floris Schopenhauer(1747~1805)와 작가인 어머니 Johanna Henriette 사이에 태어났으며 3월 3일 성 마리아(Maria) 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1793년(5세)
ㆍ 단찌히가 프러시아(Prussia)에 병합되자 아버지 H. F Schopenhauer는 자유를 찾아 막대한 재산과 고향을 버리고 함부르크(Hamburg)로 이주함.
1797년(9세)
ㆍ 여동생 아델레(Adele)태어남.
ㆍ 프랑스어 학습을 위해 프랑스의 르 아브르(Le Havre)로 감. 그곳에서 아버지의 동료 상인인 그레그와르 드 블레지메르(Gr?goire de Blesimaire)의 집에서 2년간 행복하게 지내면서 그레그와르의 아들 안딤과 친교를 맺음.
1799년(11세)
ㆍ 함부르크의 룽게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함.
ㆍ 김나지움(Gymnasium)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지만 자신을 상인으로 만들려는 아버지에게 고전 연구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음. 결국 아버지의 제안에 따라 장기간의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함.
1800년(12세)
ㆍ 프라하를 여행함.
1803년~1804년(15세~16세)
ㆍ 네덜란드 ㆍ 영국 ㆍ 프랑스 ㆍ 스위스 ㆍ 오스트리아 ㆍ 프러시아(Prussia) 등을 여행함.
ㆍ 1803년 7월부터 9월까지 영어 학습을 위해 영국 윔블던(Wimbledon) Eagle House에 머무름. 그는 전(全) 여행 기간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에는 고상한 것에서부터 저속한 것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일상들이 기록되어 있음. 일기에는 초기 그의 염세적 감정과 비판이 나타나 있다.
1805년(17세)
ㆍ 함부르크로 돌아와 상인으로서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예니쉬(Jenisch)라는 사람의 상회(商會)의 점원으로 들어감.
ㆍ 4월 20일 아버지 H. F. Schopenbauer 죽다.
ㆍ 이미 전부터 어머니의 인품과 태도에 대해 갖고 있던 비판적 태도가 격렬해지다.
1806년(18세)
ㆍ 9월 아버지의 회사가 해체된 후, 어머니 요한나와 누이동생은 영원히 함부르크를 떠나 바이마르(Weimar)로 가게 됨으로써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혼자 남다.
ㆍ 상인으로서의 길을 계속 갈 것이냐 학문의 길을 갈 것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
1807년~1809년(19세~21세)
ㆍ 학문의 길을 갈 것을 결심하고 바이마르(Weimar)로 가 고타(Gotha)의 김나지움(Gymnasium)에 입학함.
ㆍ 성인이 되어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유산 중 그의 몫을 상속받음.
ㆍ 어머니와의 심한 말다툼으로 사이가 벌어짐.
ㆍ 2년간의 김나지움(Gymnasium) 과정을 마친 후 괴팅겐(G?ttingen) 대학에 입학.
1809년~1811년(21세~23세)
ㆍ 대학에서 1년간 과학을 공부한 후 철학을 공부함. 그의 스승이며 철학자인 G. E. Schulze의 권유에 따라 플라톤과 칸트를 연구함. 그 이후 플라톤과 칸트는 그의 정신의 인도자가 됨.
ㆍ 1811년 베를린(Berlin) 대학으로 옮김.
1812년~1813년 (24세~25세)
ㆍ 베를린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함.
ㆍ 그곳에서 피히테(Fichte),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의 강의를 듣고 나서 그들에 대한 이제까지의 존경이 혐오로 변함.
1813년(25세)
ㆍ 나폴레옹(Napoleon)의 침공으로 베를린이 위험해지자 루돌슈타트(Rudolstadt)로 감. 그곳에서 학위논문 <충족 근거율(充足根據律)의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를 씀. 이 논문의 독자 중에는 괴테도 있었다.
ㆍ 예나(Jena)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이마르(Weimar)로 감.
ㆍ 괴테와 교제를 시작함.
ㆍ 프리드리히 마이어(Friedrich Majer)를 통해 고대인도 철학과 바라문교 ㆍ 우파니샷드(Upanishad)를 알게 된 후 그의 염세적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14년~1818년(26세~30세)
ㆍ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다시 말다툼을 하고 나서 바이마르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감. 그 이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됨.
ㆍ 문학자들의 모임에 나아가 교제함. 드레스덴의 미술관과 도서관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연구함.
ㆍ 1815년 논문 <시각(視覺)과 색채에 대하여>를 완성하여 이듬해에 간행.
ㆍ 주저(主著)≪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초고(初稿)완성.
1818년~1819년(30세~31세)
ㆍ 베네치아 ― 로마 ― 나폴리 ― 로마 ― 베네치아 ― 밀라노의 경로를 따라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함.
ㆍ 다시 독일의 바이마르에 돌아와 괴테와 만나다.
ㆍ 베를린 대학의 강사직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
ㆍ 1819년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했으나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았다.
1820년(32세)
ㆍ 3월 베를린 대학에서 <네 가지 상이한 원인에 대하여>라는 시험 강의를 하다. 이어 대학 강의로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정신에 대한 학설에 대하여>를 강의함. 쇼펜하우어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강의를 헤겔(Hegel)의 강의 시간과 일치시켰지만 청강자들이 없는 그의 강의는 결국 실패함.
ㆍ 예나(Jena)문예신문에≪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실리다.
1822년(34세)
ㆍ 스위스 ㆍ 밀라노 ㆍ 베네치아 ㆍ 피렌체 등을 여행.
1823년(35세)
ㆍ 5월 독일로 돌아옴.
ㆍ 뮌헨에 머무는 1년여 동안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림. 우울증이 계속되었으며 오른쪽 귀의 청력 악화로 더욱 심해지다.
1824년(36세)
ㆍ 요양을 위해 5월 29일부터 6월 19일까지 가스타인에 머물렀다.
ㆍ 9월에 드레스덴 (Dresden)으로 돌아옴.
1825년(37세)
ㆍ 4월 다시 베를린으로 옴.
1831년(43세)
ㆍ 8월 콜레라가 베를린을 덮치자 베를린을 떠나 Frankfurt로 감. Hegel이 콜레라로 죽음.
1832년~1833년(44세~45세)
ㆍ 1832년 7월부터 1833년 6월까지 만하임(Mannheim)에 머무름.
ㆍ 1833년 6월 Frankfurt로 돌아온 후, 이곳에서 186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살게 됨.
1835년~1836년(47세~48세)
ㆍ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대하여≫를 저술하여 간행함.
1837년(49세)
ㆍ 칸트 전집 편집에 노력함.
1838년(50세)
ㆍ 어머니 요한나(Johanna) 죽음.
1839년(51세)
ㆍ <인간적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가 노르웨이 과학원의 현상논문에 당선.
1840년(52세)
ㆍ <도덕의 기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씀.
1841년(53세)
ㆍ 위의 두 논문을 한 권으로 묶어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라는 제목으로 간행.
1843년~1844년(55세~56세)
ㆍ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 2부 완성.
1847년(59세)
ㆍ 학위논문이었던 ≪충족근거율(充足根據律)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제 2판 간행.
1849년(61세)
ㆍ 누이동생 아델레(Adele)와 마지막으로 만남. 그 후 그녀는 곧 죽음.
1851년(63세)
ㆍ <생활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Aphorisms)>을 주로 한 ≪Parerga und Paralipomena≫를 완성하여 간행함.
1852년(64세)
ㆍ 유언장 작성(1859년 2월에 보완됨).
1858년(70세)
ㆍ 베를린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추천되었으나 이를 사퇴함.
1860년(72세)
ㆍ 9월 9일 급성 폐렴에 걸려 21일 금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나다.
ㆍ 9월 26일 시립 중앙 묘지에 안장되다.
/ 출처: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