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經世遺表)》의 원래 이름은 《방례초본(邦禮艸本)》으로 되어 있었다. 우선 저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별호는 사암(俟菴)인데, 선생의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이 편찬한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보면 1817년(순조 17) 다산의 56세 되는 해에 “《방례초본》의 저술을 시작했는데 끝내지는 못하였다. 살피건대 이 책은 또한 《경세유표》라고도 한다.”라고 서술해두었다. 이름을 달리하는 두 책은 사실 동일한 책인 것으로서 아무래도 《방례초본》이 그 처음의 제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문집에는 〈방례초본서〉라고 하는 서문이 실려 있는데, 이는 그가 《경세유표》의 모두에 서문으로 얹어둔 〈인(引)〉의 내용과 온전히 동일한 문자이다. 더구나 서문의 내용을 보면 그가 이 책의 원래 제명을 《방례초본》으로 하였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 논하는 것은 법(法)이다. 법인데도 이름하여 예(禮)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선왕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인도하였다. 그런데 예가 쇠퇴하게 되자 법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며 백성을 인도하는 것도 되지 못한다. 천리(天理)에 비추어보아 합당하고 인정(人情)에 시행해도 화합한 것을 예라 하며, 위엄으로 두렵게 하고 협박으로 비통하게 함으로써 이 백성들로 하여금 벌벌 떨며 감히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 이른다. 선왕은 예로써 법을 삼았으나, 뒷날 임금들은 법으로써 법을 삼았으니 이것이 같지 않은 바이다. 주공(周公)이 주나라를 경영할 때에 낙읍에 있으면서 법 육편을 제정하고는 이름하여 예라 하였다. 그것이 예가 아니었으면 주공이 어찌 예라고 하였을 것인가.
즉 옛날 주공이 주나라를 경영하기 위하여 제정한 《주례(周禮)》를 궁극의 이념으로 하면서 다산은 우리나라를 새로이 경영하기 위한 ‘방례(邦禮)’를 논한다고 그 자신 모두에서 분명히 말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례는 천자의 예인데, 우리나라는 제후국이니 제도를 모름지기 작게 만들어야 한다.”(《經世遺表》 天官吏曹 第1)라고도 하여 주례와 대조되는 ‘방례’를 저술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같은 ‘방례’를 저술하면서 그는 왜 그것을 ‘초본(艸本)’이라 해두고 있었는가. 그것도 그는 같은 서문에서 밝혀두었다.
초본이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초(艸)하는 것은 수정과 윤색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식견이 얕고 지혜가 짧으며, 이력이 적고 견문이 고루하며, 거처가 궁벽하고 참고할 서적이 모자라니, 비록 성인이 지었다 하더라도 불가불 뒷사람에게 수정 윤색하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수정하고 윤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초가 아닌가. (중략) 그 고루한 것은 양해하고 고체(固滯)한 것은 공평하게 되도록 수정하고 윤색할 것이다. (중략) 이것이 초본이라 이름하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주례》의 이념을 따라 거기 대비되는, 우리나라를 새로이 경영할 국가제도를 초함으로써 수정과 윤색을 기다려 후에 길이 운용되도록 한다는 뜻에서 다산은 이 책의 제명을 《방례초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경세유표》로 제명을 바꾸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다산은 환갑이 되는 1822년(순조 22, 壬午)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었는데, 거기에는 그가 평생 동안 저술한 저서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덧붙여두었다. 바로 이 묘지명〔集中本〕에 “《경세유표》 48권은 미졸업(未卒業)이요, 《목민심서》는 48권이며 《흠흠신서》는 30권이다.”라고 하여 《방례초본》을 그 자신이 《경세유표》로 제명을 바꾸어서 기록해 두었다. 《방례초본》의 자술이 1817년(순조 17) 그가 강진에 유배 중인 때였으니, 그로부터 5년 사이의 어느 때인가 그는 스스로 제명을 《경세유표》로 고친 것이었다.
‘경세(經世)’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며 또 ‘유표(遺表)’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는 같은 묘지명에서 ‘경세’의 뜻을 스스로 풀이해둔 바 있다. 즉 “경세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관제(官制)ㆍ군현제(郡縣制)ㆍ전제(田制)ㆍ부역(賦役)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거제(科擧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모든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운용에 구애받음이 없이 기본 골격을 세우고 요목을 베풀어 그것으로써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해보겠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국가개혁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표’의 ‘유’는 죽으면서 남긴다는 뜻 그대로이며, ‘표’라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도 환갑을 맞게 된 다산은 자신의 저술을 점검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 구방을 새롭게 해보겠다.’는 이 국가개혁론이 국왕에게 전달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죽어서나 혹시 올리게 될’ 개혁론이라는 뜻으로 《경세유표》라고 개명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자찬묘지명의 다음 구절도 그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육경사서(六經四書)’를 가지고서 수기(修己)를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를 가지고서 천하 국가를 다스리고자 했으니, 본ㆍ말이 구비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이미 적고 꾸짖는 사람은 많으니,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비록 한 무더기 불 속에 던져 태워버려도 괜찮겠다. (중략) 나는 건륭 임오년(1762, 영조38)에 태어나서 지금 도광(道光) 임오년을 맞았으니, 한 갑자 60년이 되었다. 죄 많고 후회스런 세월인지라 지금까지의 인생을 총결하여 한평생을 다시 돌이켜 가려고 한다. 금년부터 정결하게 몸을 닦고 실천하여 하늘이 주신 밝은 명(命)을 살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한다.
다산은 환갑을 맞아 ‘지금까지의 인생을 총결하여 한평생을 다시 돌이켜’ 정리하면서, 새로운 삶의 자세로 살아갈 결심을 피력하였다. 18년 먼 유배생활로부터 돌아온 지 4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다. 그리고 ‘일표이서’에 대해서도 그는 다시, “성인의 경전에 근본을 두고 시의(時宜)에 알맞도록 힘써 서술해 두었으니, 없어져버리지 않는다면 혹 이를 취해 쓸 자가 있을 것이다.”(자찬묘지명 壙中本)라고 하여, 언젠가는 세상에 널리 쓰여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 심정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목민심서》와 《흠흠신서》의 두 책은 일상 목민의 실정에 직접 도움이 되는 책이므로 사실상 그후로도 널리 전사(轉寫)되고 활용되어가기에도 이르렀다.
그런데 국가체제의 기본 제도와 그 운용 전반에 관한 개혁론으로 저작한 《방례초본》을 두고 말하자면, 그 같은 기대는 매우 실현성이 희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상 그 개혁론이 당로자에 의해 쓰여질 날은 이미 기약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래서 그것을 《경세유표》로 다시 명명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