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신(1736~1801.4.4일;음력 2월 22일)
생애>
1736년 경기도 양근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남인계 대학자로 호는 녹암, 당호는 감호,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이다. 1801년 대박해 때 순교하였다. 증조부인 지 권흠은 갑술환국 사건으로 관직을 잃고 양근으로 낙향하였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권돈이다. 아버지 권암과 어머니 홍씨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권철신은 맏아들이다. 큰 딸은 이총억(李寵億)과, 둘째 딸은 성호 이익의 외손자인 이윤하와 결혼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사망한 권일신은 그의 동생이다. 1801년 박해에 순교한 복자 권상문(바스티아노)은 권일신의 친아들이며 권철신의 양자(養子)이다.
학문적 영향>
권철신은 어린 시절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나 과거를 포기하였다. 장성하여 성호 이익(1681~1763년)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호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 학인들이 권철신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시대 학자들은 주로 사변에 치우치고 실천적인 면에 소홀하였다. 그러나 권철신은 학문뿐 아니라 특히 그 실천이 곧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에 힘썼다. 그뿐만 아니라 귀한 음식이 생기면 적은 양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상류층 문벌 자제들을 문하생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제자로는 이벽, 홍낙민,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이총억.이존창,홍낙민, 윤유일 등이 있다. 서교(西敎, 천주교)에게 빠지기 전에는 일반 유학자와 마찬가지로 경학을 탐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학문 방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하여 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학문사상의 바탕 위에서 서학에도 관심을 갖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입교>
당시 조선에는 중국으로부터 한역 서학서가 많이 유입되어 학자들 사이에 관심이 높았다. 권철신은 1779년 겨울에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을 개최하여 지도하였다. 여기에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권일신, 이승훈, 김원성, 이윤하, 이총억 등 남인계 학자들과 그 자제들이 참여하였다. 본래는 경학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늦게 이 소식을 들은 이벽 세례자 요한이, 서학 소개와 연구를 알릴 목적으로 참석하여, 천주실의 칠극등의 서적을 놓고 천주(天主)의 존재, 인생의 기본문제 등에 관해 연구하였다. 이때 권철신과 강학 회원들은 이벽의 해박하고 명쾌한 서학에 대한 지식과 명쾌한 논증을 통하여 천주교 교리를 대강 알게 되었다. 또한, 강학 기간 일부 천주교 계명을 적용하여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벽을 제외하고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벽은 최초의 조선 천주교인이며 창설자로 가장 열심하였다. 그는 1783년 겨울 동지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하는 이승훈에게, 북경 천주당을 찾아가 자세히 배우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최초로 교리와 세례를 받고 1784년 봄 귀국하였다. 이후 이벽과 이승훈은 공동으로 '명례방 공동체' 라는 신앙모임을 결성하며 전교에 힘썼다. 이벽은 선교로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렇게 말했다. “감호(권철신)는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니, 그가 따른다면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벽은 당시 학덕으로 명망이 높은 ‘권철신·권일신’ 형제를 영입하여 천주교 초석을 굳힐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벽은 이러한 의도로 1784년 9월(음) 양근 마을 권 씨 형제들을 찾아가 10여 일간을 머물면서 토론을 겸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권철신은 신중한 태도로 교리의 여러 내용을 연구한 후에 ‘암브로시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주보 성인으로 모신 암브로시오(339~397) 성인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다. 암로시우스는 그리스어서 유래한 이름으로 ‘불멸’을 뜻한다. 4세기에 활동한 서방 교회 4대교부(아우구스티누스,예로니모,그레고리우스 1세)중 하나이며 밀라노 주교로 활약하였다. 성서와 신학을 연구한 교회 박사이다.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성직과 전례를 개혁하였다. 이단에 빠져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회심시키고 세례를 주었다. 신생 천주교회의 지도자인 권철신에게 잘 어울리는 주보이다. 과연 명망 있는 대학자 권철신의 입교와 세례는 많은 제자들과 선비들로 하여금, "스승과 그 형제가 믿는 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종교"로 확신하게 함으로써 이벽의 선택과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 권일신은 열렬한 지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드러나게 적극적으로 신앙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박해>
1785년 명례방 사건 직후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어 배척과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점차 가중되던 중, 1791년에 윤지충의 진산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동생 권일신이 모진 형벌과 참혹한 고문으로 귀양 길에서 순교하였다. 권철신은 평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으므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 권철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그 또한 동생을 비참하게 잃은 고통과 슬픔으로 문을 닫아걸고 10여 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1795년에는 배교자 한영익이 중국인 주문모 사제의 밀입국과 사목활동을 밀고하여 박해가 일어났다. 이 사건 직후에도 정적들이 상소가 들끓었으나 정조임금의 비호로 무마될 수 있었다. 1797년에서 1799년까지 충청도 남부지역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정사박해) 1799년 여름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정약전을 천주교인들의 괴수로 지목하여 다시 상소하였다. 그러나 정조임금은 상소를 올린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천주교 사건 거론 조차 금하였다.
1800년 6월 28일 정조임금이 급사하였다. 정국과 교계 사정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정조임금의 국상(國喪) 이후 권철신을 천주교 우두머리로 엮어 해치려는 무리들이 양근과 한양에서 발 빠르게 호응하였다. 대제학 이만수의 반교문(頒敎文)에 “권철신이 사는 고을과 그의 친척들이 이 모두 서교(西敎)에 빠졌고…….”라고 하였다. 양근에 사는 김모(金某) 등이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권철신의 집안 4대 신주(神主)를 훔쳐다가 없앤 뒤 사학(邪學)의 죄를 덮어 씌우자는 모의(謀議)를 하였다. 이희사가 그 사실을 듣고 권철신에게 은밀히 알려주어, 권철신은 신주를 벽장 속에 안치한 뒤, 집안 사람들을 시켜 잘 지키게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과연 도둑 두 명이 사당에 들어 신주를 찾았으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주를 못 찾은 도둑이 돌아가서 모사꾼들에게 그 상황을 전했다. 모사꾼은 권철신이 이미 신주를 태워 없앤 것으로 생각하고, 온 고을에 권철신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1801년(신유년) 봄에 군수(郡守) 유한기(兪漢紀)가 사람을 보내 조사하니, 벽장 속에 4대의 신주가 온전히 봉안되어 있었다. 진사(進士) 조상겸(趙尙兼) 등이 통문(通文)을 내어 거짓임을 밝혔다. 그런데 정치 판도가 바뀐 조정에서 군수 유한기가 그 사건을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죄목으로 파면하였다. 새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와서 통문을 돌린 조상겸 등을 잡아들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50여 명이 죽거나 유배되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모사꾼이 신주를 훔치려 한 죄는 묻지도 않았다.
순교>
1801년(순조 1년) 정순 왕후와 노론 벽파의 집권으로 대박해가 일어나자 권철신은 정씨 가문의 형제들과 이가환, 이승훈 등 남인계 학자들 천주교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다수의 신자들이 같이 체포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옥사(獄死)가 시작되자, 권엄이 권철신을 해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권철신은 바로 사악한 역적인 권일신의 형입니다. 그에게 만일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권일신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응당 통렬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몹시 꾸짖어 예전에 물들었던 죄악을 반성하여 자신부터 먼저 마음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완악스럽게도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 자식에게까지 가르쳐 요망한 사설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였습니다. 그 죄로 이전에 벌써 포도청에 잡혔고 이후에 다시 고을의 옥에 갇혔으니, 이처럼 흉악스럽게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권엄은 천주교 최초 창설자로 급사한 이벽 세례자 요한의 장인이다. 권엄의 이러한 상소는 죽을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권철신의 운명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였다.
권철신은 연로한 나이에 극심한 고문과 매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침착하게 신문에 임하였다. 1801년 2월 11일(음력) 심문 중에 금부도사 박조원이 “너는 교주(敎主)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 세력이 심히 걱정스러운 것에는 사학(邪學)보다 급한 것이 없다. 이를 금지하는 방도에 어떤 계책이 필요하겠는가? 너는 이미 사학의 이 면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계책도 알 것이다.” 하고 묻자, 권철신은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정조임금도 이미 말한 바 있다. 권철신이 말하는 ‘정학(正學)’은 종래의 경학(經學)일 수도 있고, 천주학을 뜻하는 정학(正學)’일 수도 있겠다. 또 이런 국문도 있었다. “네가 양근 마을 사학(邪學)의 우두머리냐?” 그 무렵 천주교에 관한 전파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권철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투어 교리를 듣고 입교했다. 본인은 “아니다.”라고 했으나, 조정과 교회 측 모두 권철신을 ‘신부(神父), 대부(大父),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다. 신앙인으로서 권철신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그러했을까. 정약용이 권철신을 위해 지은 묘지명을 읽어 보면 절로 수긍이 간다.
도리(道理)의 차이로 말하면
털끝까지 다투는 법인데
경전이 쇠하고 위서(緯書) 일어남에
선기(禪機)까지 슬며시 나타났네.
마융(馬融)을 계승하고 정현(鄭玄)을 받들어
더욱 훈고에 빠지고 말았다네.
공은 그렇지가 않아서
주공과 공자만을 모범으로 삼았네.
대세가 이미 기울자
이에 침묵을 지켰으며
우리 친족들 보호하려고
형틀에 올라서도 담소했다.
모두 공을 원수라 하면서도
외려 공의 효우(孝友)는 인정하였네.
하늘은 시운(時運)을 저절로 알아
어진 인재를 내셨으나,
참소하는 무리 몹시 모질어
이 어진 분 죽이고 말았도다.
공의 덕스런 용모를 생각하니
온화한 봄 날씨 같았도다.
백대(百代)의 뒷날에
더 이상 공을 알아줄 이 없겠기에
변변치 못한 나의 글을 무덤에 묻어
하늘의 뜻을 기다리노라.
국문에서 권철신을 아무리 신문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자 어떤 자가 이렇게 말했다. “을묘년(1795)에 죽은 윤유일이 본래 권철신의 제자였으니, 천주교와 관련하여) 내밀한 사정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의금부는 이 말을 근거로 권철신을 참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기 전 이미 극심한 매와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깊어 1801년 2월 22일(음) 66세로 비참하게 순교하였다. 그러자 반대자들은 2월 25일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걸기로 하였다.
권철신의 천주교 신앙 여부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있다. 권철신이 주도한 1779년 천진암과 주어사 강학의 목적은 일반적인 유학과 양명학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 강학회는 이벽 세례자 요한와 천주학에 대한 연구와 실천으로 천주교 창설의 단초가 되었다. 그는 이벽의 전교로 ‘암브로시오’라는 교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세례 초기에는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준수하였다. 권철신의 학덕과 명성에 천주교 창설과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직접적인 선교는 아니었으되 그 자신의 의지와 투신에 상관없이 천주교 창설과 발전에 암암리에 기여했다. 것이다. 이런 연고로 권철신은 천주교 공동창립자로 천진암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동생 권철신은 천주교 초기부터 창립 멤버이며 적극적으로 신앙활동을 증거하다 1791년(신해) 진산사건으로 순교하였다. 권철신의 제자 윤유일은 1795년 주문모 사제 밀입국 사건과 활동에 주모자로 장살되어 깊은 밤중에 강물에 버려졌다. 황사영은 백서안에서 권철신이 순교할 때 그 죽음이 착하였는지 아닌지(배교)를 잘 알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황사영이 1801년 체포와 심문과 죽음의 과정만 언급한 것이다. 정약용은 권철신의 묘지명에서 그가 ‘주공과 공자’만을 모범으로 삼았는데 억울하게 사학(邪學)죄인으로 몰렸 죽었음을 넌지시 주장하였다. 즉 천주신앙에 배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권철신의 1785~1801년 신앙여정 전체에 대한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인터넷 사전(두산, 한민족문화 대백과)’에서는 배교를 하지 않고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굿 뉴스’에서는 국문 중에 배교를 하고 죽었다고 한다. ‘조선 교회사’를 쓴 달레(1829-1879)는 황사영 백서에 근거해 그를 순교자로 보고 있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신앙편력에 대해 세세하게 따져가며 순교와 배교를 들이대는 작업이, 신앙을 크게 빚지고 있는 후손의 입장에서 과연 마땅하고 옳은 처사일까? 그는 체포에서 죽음까지, 인격과 목숨을 위협받는 모진 형벌과 뭇매의 경각에 있었다. 이때 신앙과 관련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침묵’ 이나 ‘부정’의 배교적 언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천주 신앙여정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특히 죽음은 신앙과 연루된 명백한 순교이다. 그러니 기림을 받아야 하고 공경을 받아 마땅하다.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현재 ‘하느님의 종’ 시복(諡福) 심사에 올라있다.
저서>
홍유한에 대한 『추도문』, 『시칭(詩稱)』 2권, 『대학설(大學說)』 1권 등이 있다. 또한 홍유한과 교유한 여러 통의 친필 편지가 남아 있다.
참고
정약용,권철신 제문;황사영, 백서;송란희,천주교 평신도사도직 협의회 자료; 천진암백과;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입력(최 마리 에스텔, 2021년 12월 23일 PM 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