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관찰사가 관할하는 감영과, 토포사(진영장)가 관할하는 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전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공주로 끌려왔으며, 숱한 심문과 고문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였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신자들은 옥에서 교수형이나 장사(杖死)로 순교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처음으로 참수형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보름 후 청주에서 체포되어 온 이종국이 참수되었으며, 5월경에는 문윤진, 7월경에는 이국승 바오로가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후 공주에서는 1812년 장대원 마티아와 황 바오로가 참수된 기록이 있고, 1839년 기해박해 때에도 전 베드로 등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옥사한 것으로 보아 참수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공주에는 또다시 내포 지역을 비롯하여 인근의 전라도 북부와 충청북도, 경기도 일부에서까지 신자들이 체포되어 끌려왔다. 지금까지 기록상(1866∼1873) 당시 박해로 공주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866년 109명, 1867년 56명,1868년 12명, 1869년 이후 16명 등 총 193명으로,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공주, 해미, 홍주) 순교자 334명의 57.8%를 차지하는 아주 높은 비율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 몇 명이나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미에서 체포된 이 가롤로나 연산에서 체포된 김윤지 등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듯하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 연장자는 남상교(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 계층도 다양하였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황새바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 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 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김영수> ▒
꿈이 있는 사람이
비밀 들여다보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황홀한 노래 있을까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랑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랑
그 설렘 속에서 촛불 하나 당기면
나의 세상은 우주의 맨 끝자리에서부터
눈물 깊은 음향으로 무너지는 것입니까
비밀처럼 하늘의 물가로 떠났는지
황새들은 보이지 않고
나는 먼 종소리를 들으며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늘의 길 따르는 기도이기를
낙엽밭에 꿇어 숨결을 씻습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고백보다
더 황홀한 노래 있을까요
■ 순교자
◆ 순교자 이국승 바오로 (1722∼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이국승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철저히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 땅으로 권일신을 방문하여 교리를 배웠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하였다.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이를 피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옥에 도달하였을 때,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자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태어난 곳이며,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 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 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 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248위 >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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