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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경산 불굴사 - 팔공산 갓바위와 마주보는 음택(陰宅)의 도량
普願 추천 0 조회 53 16.06.23 18: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팔공산 갓바위와 마주보는 음택(陰宅)의 도량, 불굴사


 

 

 

 

 

불굴사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대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의 말사이다.

690년(신라 신문왕 10년) 경산 압량 출신의 원효대사가 정진하여 득도한 곳에 암자를 세운 것이 시작이지만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옥희(玉熙)스님이 주석하던 당시에는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레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1723년(경종 3)에 중창하였으나 1736년(영조 12)에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퇴락되었다가, 순천 송광사의 한 노승이 현몽하여 이곳으로 와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 뒤 1860년(철종 11년)에 유혜(有惠)·쾌옥(快玉)스님이 중창하였고, 1939년에 은해사의 백현(伯鉉)스님이 다시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약사보전·독성각·산령각·요사 등이 있다.

그 밖에 원효대사가 득도를 하였으며, 김유신장군이 화랑시절 삼국 통일에 대한 원을 세우고 기도하며 수련하다가 선인을 만나 검을 받고 선술을 배워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는 석굴 안에는 홍주암(紅珠庵)과 독성전이 있다.

 

1976년에 석굴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상 1점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불굴사 삼층석탑-보물 4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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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하기 전의 삼층석탑

적멸보궁의 석단 아래에 있는 불굴사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9세기의 작품이며 보물 제4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743㎝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이다.

특히 장대석을 이용한 탑구와 지대석, 하층 기단에 각 면 3구씩 장식되어 있는 안상, 과장된 옥개석 처마면의 반전 등은 9세기 석탑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소형화와 장식화 경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층기단

 

하층기단의 안상부늬

 

 

기단부는 탑구, 지대석, 상 하층의 이중기단으로 구성되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하층기단은 면석받침과 면석이 한 돌로 갑석이 한 돌로 처리되었으며 특이하게 우주와 탱주를 별도로 모각하지 않고 각 면 3구씩의 안상을 음각하여 좌우측으로 우주와 탱주를 새겨넣은 것 같은 효과를 내었다

상층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3층으로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옥개?침 상단부와 처마의 간격이 넓고 안똑으로 물끊기홈이 있다. 처마면에 풀탁공은 없으며 옥개석 상면에는 모두 2단의 탑신받침을 두었다.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는데 모두 상하로 찰주공이 뚫여있다. 노반은 육면체이며 상단에 2단으로 내밀었고 복발은 중앙에 띠무늬가 둘려져 있으너 일부 파손이 심하고 균열이 있다 

 

 

 

돌의 마무리에서 정연함을 보이고 있어 탑 전체적으로 뚜렷한 비례가 돋보이는 탑이다. 그러나 탑의 규모가 작아진 점이나, 지붕돌의 치켜올림이 지나치게 큰 점, 각 부분의 밑에 새긴 괴임돌의 표현을 강조한 점 등에서 형식적인 면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의 탑으로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2011년에 해체 수리하였다

 

 

적멸보궁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으로 불굴사 적멸보궁에는 불상 대신 탑을 안치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88년 원조스님이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적멸보궁을 지었으며 적멸보궁 안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삼층석탑과 후불탱화·아미타탱화·칠성탱화가 있다

 

작멸보궁 내에 있는 석가모니 진신사리탑

 

불상이란 부처님의 형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지만 사리탑은 부처님의 육신에서 열반 후에 거두어 들인 영롱한 사후 결정체이다. 따라서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으므로 불상이 필요없는 것이다.

근래 들어서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에 많은 적멸보궁이 생기고 있는데, 이곳 역시 근래에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소원성취를 비는 불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적멸보궁에 있는 탱화

 

 적멸보궁 석단 앞의 괘불대

 

적멸보궁의 소맷돌

 

 

약사보전과 약사여래입불상-문화재자료 제401호

 

 

약사보전

 

약사보전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로서 불굴사 경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안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약사여래입상은 1736년에 내린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된 것을 순천 송광사의 노스님이 현몽하여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약사여래부처님의 얼굴부분과 왼쪽 손 부분은 보면 복원 한 흔적이 있는 데 발굴 당시 파손이 심해서 부분 수리한 것이라고 한다 .

 

 

 

 

 

약사여래입상은 상호의 표정과 신체의 표현, 그리고 대좌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팔공산 갓바위부처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곳에서 가까이에 있는

갓바위 부처님은 남성적인 모습으로 갓을 쓰고 있으나 불굴사의 약사부처님은 머리에 쪽두리를 쓴 여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서로 음양의 조화에 의하여 안치된 지형적인 특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불굴사의 음지와 갓바위의 양지는 음양의 이치에 맞추어 조성되었으며 제작기법이 동시대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갓바위 부처님과 불굴사 부처님 사이에 있는 동네 이름도 음양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자들 사이에는 갓바위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를 한 후 불굴사의 약사여래에게 기도를 하면 완벽한 성취를 이룬다 하여 소문난 기도 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불상은 땅 위에 있는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이다.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네모난 형태이며 각면에 안상을 새겨 놓았고, 윗단은 둥근 형태로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석불입상의 규모는 전체높이 233㎝, 어깨폭 75㎝, 머리높이 53㎝이며 머리부분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앞으로 향한 모습이고 왼손은 보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나 발굴 후 보수하였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약사여래입상의 자연석 받침돌

 

불상의 자연석 받침대는 살아있는 용의 형태로 머리는 약사보전의 벽 아래로 꿇고나가 약사전 남쪽 바깥에서 머리를 쳐들고 있다. 따라서 약사여래는 꿈틀대는 용의 등에 서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불굴사 석등

 

 

  

약사전 앞에는 한 기의 석등이 서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나 이 자리가 원위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양식을 보면, 방형 기단 위에 8엽의 복련을 넣었고 그위에 비교적 높은 호형과 나지막한 각형등 3단의 괴임을 두어 간주석을 바치고 있다. 간주석은 팔각으로 장식없이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데 상면의 옆에 8옆의 앙련을 새겼다. 상면에는 기단과 마찬가지로 호형과 각형의 괴임을 마련하여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어 있는데, 네면에 화창이 있으나  장식은 없다. 팔각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평하고 얇으며 합각석이 뚜렷하고, 전각에 반전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현재 상륜부 부재는 없어지고 보주형태의 다른 석재를 올려놓았다.

석등 옆에는 배례석 1기가 놓여있다

 

 

 

홍주암(紅珠庵)

 

 

 

불굴사의 요사채 사잇길을 따라서 십 여분쯤 올라 가다 보면 절벽처럼 우뚝 선 바위가 잎을 가로막고 한쪽 옆으로 철제 계단이 시작되는데 그곳에 홍주암이라는 붉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계단을 따라 오르면 휘어진 큰 소나무가 가로 막아 허리를 숙이고 지나야 한다. 이 나무를 하심(下心)나무라 부른다. 마음을 비운 채 여긴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올라가긴 힘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면 좌측 바위굴 안에 약수터가 있는데 일명 장군물이라고도 한다.

바위면에는 '아동제일약수(我東弟一藥水)'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이 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하며  약수로서의 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아동제일약수(我東弟一藥水)

 

 

근래에 조성된 석굴내의 석가여래불

 

 

 

그 옆에 굴 안에 석조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얼마전 이 부처님이 방광을 하는 사진이 찍혀 입구에 사진과 사연이 걸려 있다. 계속해서 위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편평한 곳에 다다르는데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독성전이 있다. 원체 소원을 잘 들어주기로 유명한 분이라고 소문이 나서 치성을 드리러 오는 불자들이 많다

풍수지리적으로도 팔공산 갓바위 약사여래부처님이 양택에 계시고, 불굴사 약사여래부처님이 음택에 계셔서 서로간의 기운이 통하여 기도가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홍주암 독성전과 나반존자상

(사진은 독성전 재건립 전의 모습입니다)

 

신라때, 원효스님과 김유신장군이 수련하던 장소가 이곳 홍주암(紅珠庵)이라고 하는 데 홍주는 태양을 말하기도 하고, 몸 속의 단(내단)을 말하기도 한다.

이곳은 불굴사에서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김유신 장군이 사흘 기도를 하여 신인으로부터 삼국을 통일 할 수 있는 비법을 얻었다고 하는 곳이며, 원효대사가 최초로 수행을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해가 빨리 뜨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공부의 성취를 이룬 정도를 뜻한 것일 수도 있다.

김유신 장군이 중악(팔공산)굴에서 기도했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데 그 장소가 실제로는 현 불굴사의 홍주암이라고 지역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미륵불

 

홍주암에서 바라본 미륵불

 

약사보전 좌측으로 100m 쯤 올라가면 불굴사의 맞은 편 산 중턱에 근래에 새로이 조성된 미륵부처님이 있다. 미래 용화세계에서 같이 출현하시려고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을 기다리면서 말세 인간의 복전이 되어주고 특히 소원성취를 이루어 주시려는 원력을 세웠다는 나반존자의 홍주암 독성각과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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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사의 쇠락에 얽힌 이야기

불굴사의 쇠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불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스님들도 일반 백성들에게도 멸시를 받았다 지나가는 과객들도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밥 해달라 뭐 해달라며 큰 소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덮어놓고 스님들을 때리기 일쑤였지만 과객에게 항거할 수 없었다.  

불굴사 역시 이러한 폐단이 깊어졌다.

마침내 스님들은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마침 한 점잖은 과객이 불굴사에 들르자 스님들은 이 같은 폐단을 털어 놓고  절에 손님이 적게 오는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과객은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하나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버리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절의 스님들은 과객들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그 말을 듣고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 그러자 청천 하늘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고 비가 쏟아지더니 결국에는 산사태가 나서 절이고 암자고 다 묻혀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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