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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6:1-12
찬송가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때도 있고 반대로 경험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경험될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일하심이 경험되지 못할 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때론 하나님을 향해 비난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섭리’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라서 6장 1절에서 12절 말씀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에서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의 상소를 받은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발견된 고레스의 명령(1-5)
(1-5)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금, 은 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하였더라
1절에서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의 조서를 찾기 위해 바벨론의 보물전각을 조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조서는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한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고대 왕국에서는 중요한 법령과 조서를 서면으로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이나 중요한 사건을 후대에 전하고 법적인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메다는 바벨론보다 높은 고도에 있어서 날씨가 건조하고 좋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들은 바벨론의 혹독한 여름 날씨를 피하기 위해 악메다에 별장을 지어 놓고 여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악메다는 메대제국의 ‘여름 수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성전 재건 명령을 내리기 전에 바벨론을 떠나 이 곳 악메다로 가서 여름을 났었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악메다 궁성에서 두루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레스의 조서를 찾으라고 하는 명령과 또 그 명령 뒤에 조서를 찾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이 발견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던 고레스 왕의 명령은 단순한 건축 명령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신앙과 신앙문화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성전은 유다 백성에게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및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레스는 1장에서 유다의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이러한 성전의 재건을 허락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기는 하였지만 우상을 섬기는 문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할 성전을 단지 제사를 드리는 장소 정도로만 생각한 가운데 성전 재건을 허락했었을 것입니다. 3절과 4절이 이러한 추정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면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으로 건축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높이 30규빗, 넓이 20규빗, 길이 60규빗이었던 것보다 길이만 빼고 더 큰 규모로 건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고, 4절에서는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고 하였지만 그 이후에 건축된 성전이 과거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는 것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할 것을 권면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고레스가 실제로 성전 건축 비용을 모두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이 건축 가능하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셨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성전이 건축되길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5절에서 고레스 왕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갔던 성전의 금, 은 그릇들을 되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되돌려 주는 것을 넘어서서 돌아간 성전의 기구들이 원래의 위치에 제대로 배치되도록 명령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고레스 왕이 유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린 명령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외형적인 회복만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신앙적,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또한 성전의 기구들은 예배와 제사에 사용되던 중요한 도구들로, 그것들이 원래의 자리를 회복한다는 것은 유다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1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과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정확하며 또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내 생각의 의지를 주님의 일하심과 섭리 가운데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오늘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다 백성을 위한 보호와 지원(6-12)
(6-12) 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 곳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고레스 조서에 대해 보고 받은 다리오 왕은 곧바로 밧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부하들에게 회신을 보내서, 자신도 고레스 왕의 과거 명령을 그대로 따르겠으니 유다 백성의 성전 재건을 방해하지 말고 도리어 돕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6절 하반절을 보면 ‘그 곳을 멀리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공사 구역 접근 금지’ 명령인 것인데 이 명령은 유다백성들 스스로 성전 재건 사역을 주관하도록 하는 동시에 페르시아 관리들이 성전 재건 사역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좀 더 쉽게 말하면, 돈 주었다고 참견하려 들지 말라는 명령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8절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의 조서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게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유다 귀환민들의 성전 재건을 위한 새로운 지원 내용을 담은 자신의 조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유브라데 강 서편 지역에서 거두어지는 세금 중에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한 재정 지원을 하고 또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제물을 지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라의 재정이 투입되다보면 보면 성전 재건을 위해 투입된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페르시아 관리들 확인하려고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런 구실 저런 핑계로 성전 건축이 방해되거나 공사가 늦어지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6절과 7절을 통해서 다리오 왕은 재정은 지원하되 성전의 재건은 유다 총독과 유다의 장로들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면서 지역 총독이나 식민지 관리들이 성전 재건 사역을 방해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 봉쇄함으로써 성전 건축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역사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 또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우리의 삶과 연결지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신앙 행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언제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우리 자신 안의 내적인 두려움이나 불신일 수 있고 또 외부적인 압력이나 유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러한 방해 요소들을 제거하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한 제거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져야 함을 고백하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인도하심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면 앞선 내용에서 다리오 왕이 세금으로 성전 재건 비용을 지원토록 하였다면 9절에서는 성전 재건 비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전 재건 이후 드려질 제사의 제물까지도 제공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9절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김없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로 솰루’는 ‘부족함이 없이’입니다. 즉 우리말 성경에서는 제물의 지급이 잘되도록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번역하였다면, 원문은 제물의 ‘충분한 공급’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오 왕이 이렇게 제물의 충분한 공급까지 명령하였던 것은 당시 고대 페르시아 지역의 사람들의 인식속에는 특정한 신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신이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종교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여러 민족들에게도 동일한 지원을 말하며 각각의 민족들이 원하는대로 제물을 받칠 수 있도록 하였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다리오 왕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라는 기도 요청의 내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다리오 왕은 페르시아의 신 오르무즈드라는 우상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하나님께...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라고 했던 것은 그가 중보기도의 힘을 알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신이든지 간에 자신의 노력이 알려져서 자신의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길, 속된 말로 어디 한 신에게서라도 얻어 걸리길 원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간혹 신앙이 없으신 분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프실 때 또는 자녀나 가족들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때 기도를 많이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런 요청을 받을 때면 신실한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 요청을 하시는 분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굳게 믿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다리오 왕과 비슷한 마음으로 기도를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 누군가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길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헛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럴지라도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자신과 왕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구한 다리오 왕은 11절에서 자신이 내린 명령을 누구든 어길 경우 그에 따른 처벌을 경고합니다. 이 경고의 내용은 당시 페르시아 제국에서 반역자들을 처벌하였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리오 왕은 바벨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에 반란에 가담하였던 3천명을 죽일 때 11절에 있는 내용대로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11절 내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전을 허무는 자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내리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에서 조금 특이한 내용은 저주를 내리는 주체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라는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신명기 12:21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울 성전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리오가 이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리오가 구약의 토라를 알고 있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기 보다는 이스라엘 종교에 대해 정통한 관리나 이스라엘 사람중 누군가가 다리오 왕의 조서를 쓰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이 조서의 내용을 들을 유다백성들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 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섭리 가운데 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또다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렇기에 그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지금 놓여 있는 현실이 주님의 뜻을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상황이고 그래서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흔들리는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리오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구약의 토라를 인용하여 조서를 내림으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을 깨닫게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섭리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를 통해 또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고백할 수 있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들리는 삶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주님의 섭리하심을 기대하고 신뢰하며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감으로 우리를 주님의 자녀삼아 주신 그 뜻을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서 조금은 더딜지라도 이루어가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언제나 섭리하고 계시며 일하고 계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짓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유다백성들이 그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따라오길 원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희도 주님께서 저희들의 인생 행로 가운데서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감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의 삶으로 나아가오니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 과정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 가운데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는 자세를 갖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아 전쟁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은 그들이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가정, 사회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지금 현재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주변과 어떤 협력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작성 : 성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