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강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화완옹주의 삶’ 강의를 듣고/안성환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 제445강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주 명예교수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자매들의 삶을 통해 조선 왕실 여성의 가족관계와 혼인, 정절, 그리고 정치적 운명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강의는 먼저 영조의 가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영조는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서 2남 7녀란 자녀를 두었으며, 5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으니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긴 세월 왕좌를 지키며 수많은 영광과 비극을 겪은 영조의 삶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세상의 온갖 일을 두루 겪은 군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강의의 중심인 화순옹주의 삶이 소개되었다. 화순옹주는 1720년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 무렵에는 친오빠 효장세자마저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잇따른 상실을 겪었지만 유순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화순옹주는 열세 살 무렵 경주 김씨 김한신과 혼인하였다. 궁중의 예법을 익히며 왕의 딸로 성장한 그는 혼인 후 오늘날 ‘추사고택’으로 알려진 충남 예산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김한신 역시 왕실의 여러 일을 맡으면서도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라 불릴 만큼 부부의 금슬은 각별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758년 김한신이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깊은 슬픔에 빠져 음식을 끊었다. 아버지 영조가 직접 찾아가 음식을 권하고 간곡히 타일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열사흘 만에 뒤를 따랐다고 한다.
당시 신하들은 이를 남편에 대한 절개를 지킨 행위로 높이 평가하며 정려를 청했다. 그러나 영조는 딸의 정절은 인정하면서도 늙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효가 아니라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한편에는 정절을 숭상하던 시대의 가치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어떤 명예보다 딸이 살아 주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애끓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783년, 정조는 고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려 예산의 집 앞에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정려문과 부부의 합장묘는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이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고 기려졌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화순옹주가 살았던 집은 양자로 이어진 가계를 거쳐 훗날 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박 교수는 화순옹주뿐만 아니라 영조의 다른 딸들의 삶도 함께 들려주었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화평옹주는 사도세자를 아끼고 도왔으나 젊은 나이에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협옹주 역시 젊은 나이에 홍역으로 생을 마쳤으며, 훗날 무덤에서 발견된 화장품과 거울 등의 유물은 당시 왕실 여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막내 화완옹주는 어린 딸과 남편을 잃은 뒤 양자 정후겸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옹주의 지위마저 잃게 되었다. 그의 삶을 통해 왕의 총애를 받던 왕실 여성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갈등과 권력의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나는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어떤 눈으로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화순옹주의 죽음은 당시에는 남편을 향한 정절의 상징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이름 뒤에 감춰진 한 여성의 깊은 상실과 슬픔도 함께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특히 영조가 딸의 정려를 허락하지 않았던 데에는 군주의 판단만이 아니라 딸이 끝까지 살아 주기를 바랐던 한 아버지의 마음도 담겨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시대와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를 단순한 칭송이나 비난의 잣대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화완옹주의 삶 또한 단순히 ‘왕의 딸’이라는 신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도 누군가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며, 가족 안에서 기뻐하고 아파했고, 때로는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정치의 한가운데에 놓여야 했다.
이번 강의를 통해 내가 새긴 교훈은 옛사람의 삶을 오늘의 기준으로 쉽게 재단하지 않되, 어떤 명분이나 가치보다 그 속에 살아 있었던 한 사람의 생명과 아픔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 인물의 이름과 오래된 유적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이 누렸던 영광만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까지 함께 헤아릴 수 있다면, 역사는 더 이상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될 것이다.
2026년 9월 29일 안성환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