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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1)- 놔리샤
연해주 원동의 어업전진기지인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돌아온 날 밤,그는 블라디보스톡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배정된 5층은 로얄층으로로 하룻밤에 미화 40불을 받았다. 러시아 물가로 따지면 턱없이 비싼 요금이었지만 외국인에게 적용하는 요율이라 달리 도리가 없었다. 현지인에겐 공식환율로 5불 미만이었고 중국인은 예전 공산주의 동맹국의 호의로 20불 정도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사할린으로 가기 위해 그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비행기표를 파는 여행사는 2차 세계대전 승전탑이 있는 레닌광장 근처에 있었다. 달러를 지불하는 외국인 전용창구를 찾아갔지만 매표시간의 알림판은 2시간 뒤였다. 하늘은 어눌한 빛이었고 나뭇가지에는 온통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침내 나타난 여행사 직원은, 사할린 영공에 안개가 심해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별 수 없어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바닷물과 합수되는 아무르 강의 하구는. 꽁꽁 얼어 있었다. 시간이나 때울 생각으로 그는 호텔을 나와 언덕 아래의 얼어붙은 바다를 향해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구멍을 파고 낚시를 드리운 강태공들 곁으로 다가가 얼음의 두께를 살폈다. 그 두께가 60센티가 넘어 보였다. 바다에 엎드린 강태공들의 수가 어림잡아 300명쯤이나 되었을까 몰라. 낚시에 걸려드는 고기는 대구새끼와 나와가(대구와 명태의 잡종),정어리,시샤모 등이었다. 강태공들의 면면은 사업장 단위로 자립경제로 전환된 후 조업률 감소와 자금난 등으로 감원되는 바람에 실업자들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은 그가 명태쿼터를 사려고 방문했던 2년 전보다 세월은 더 황량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강태공들 외에도 주말을 이용해 가족들을 이끌고 낚시꾼들을 기웃거리며 빙해(氷海) 위를 산보하는 사람들로 작은 바다는 붐볐다. 저들도 사람들이었고 가슴은 한결같이 따뜻했으므로 이방인인 그는 안심했다.
그가 호텔로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오리털 파커 덕에 오한은 없었으나 귀와 발이 꽁꽁 얼어 스팀기운에 더워진 방에 앉아 있자니 가려움이 돋아났다. 귀를 덮는 털모자와 구두보다는 가벼운 겨울용 등산화가 필요했다.
식당으로 내려가기가 싫어 쁘레오브라쟈니예에서 얻어온 연어알 통조림과 빵,임연수어 절여 말린 것으로 저녁을 때웠다.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가방에서 조정래의 태벽산맥을 꺼내 읽었다.
밤 열시쯤 난데없이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웬 전화인가 싶었다. 전화기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뜻밖으로 여자였다.
" 미스터 황, 만나고 싶은데 방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사무적인 어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험사 아주머니들같이 상대가 누구든 작정하고 안겨드는 어투는 더욱 아니었다.
" 저 ...누구신지? 저를 아시는 분이예요? "
" 호 호 호! 만나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럼 잠시 후 뵙겠습니다. "
첫 마디에 러시아 여자임이 분명했다. 여자의 영어는 어눌하고 느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가 그의 성을 호칭하였으므로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옷을 챙겨 입었다. 곧 노크소리가 울렸고 문을 열자 중키의 금발머리를 한 여자가 불쑥 들어왔다. 여전히 궁금해 하는 그를 여자는 싱글거리며 바라보기만 하였다.
" 뭐 마실 거라도...? "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무적인 일로 방문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일 터였다. 그는 꼬마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의자를 권했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는 그녀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 저는 802호에 투숙하고 있어요. 이름은 놔리샤. 담배도 있으세요? "
그 순간 그는 어렴풋이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저없이 뜯지 않은 빨간색 말보르 한 갑을 가방에서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조그만 응접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맥주를 한 입 홀짝 들이 마신 후,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내뿜더니 잠시 허공을 향해 침묵했다. 생각에 잠겨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며 그는 한국에서 본 ‘인터걸’이라는 영화를 머리에 떠 올렸다. 창녀인 여주인공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는 스웨덴 남자의 느려터진 러시아말과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사용하는 영어 말투가 어딘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양이 너무 수수하여 마피아가 끌고 다니며 드러내놓고 호객하는 그런 천박한 타입은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도 짙은 화장을 하지 않은 탓인지 여염집 여자와 다를 바 없었다.
“외롭지 않으세요?”
마흔 즈음의 그에겐 외롭다는 말이 조금 생소했다. 외롭다는 감정은 생각할 그 무엇이 아무것도 없을 때 찾아오곤 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짧은 미소로 얼버무렸다.
“당신은 나랑 즐길 생각이 없군요.”
그 말의 톤이 너무 무미건조하여 그가 소리내어 웃자 그녀도 곧장 따라 웃었다.
그녀는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후 덤으로 담배 한 갑을 선물로 얻고는 그냥 돌아갔다. 그녀의 나이는 30살. 우크라이나에서는 치과의사였다는데, 궁핍을 면하려고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3개월 전 친구와 둘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손님이 그들의 방으로 찾아올 경우 다른 한 명은 추운 복도에서 무작정 떨고 섰거나 아니면 염치불구하고 로얄층의 아무 방에나 내려온다고 했다.
그 해 4월까지 ,그는 블라디보스톡 호텔에서 3개월 동안 장기투숙을 했다. 놔리샤는 그 후로도 종종 그의 방으로 전화를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은 바깥 날씨처럼 싸늘하게 식어 전혀 성욕을 느낄 수 없었다. 엘리베이트에서, 일층의 스낵바에서 종종 마주치며 눈인사를 건넨 적은 더러 있었으나 그녀를 정식으로 그의 방에 초청한 적은 끝내 한 번도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2)- 조선 모란봉 식당
러시아의 정통기독교는 그리스정교가 그 바탕이나 예배양식이 러시아식으로 조금 변형된 것이 특징이다. 크리스마스는 1월 7일로 정해져 있으나 싼타 할아버지격인 ' 데드 모로즈(Ded Moroz ; 엄동설한의 할아버지란 뜻. 굴뚝대신 대문으로 출입함.)는 신년이 오기 전날 밤에 나타나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러나 1월은 더디게 지나갔다.
연 사흘째 삭풍이 불었다. 오리털 파커를 입고 길에 나서면 바람을 안은 돛처럼 옷이 그를 뒤로 밀어 걸음을 떼어 놓기조차 힘들었다. 다행히 오소리 털모자를 100불 주고 사 쓴 덕에 얼굴만 숙이면 칼바람은 두렵지 않았다. 그나마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나돌아 다닐 일이 없었다. 오전 내내 창가에 붙어 서서 아무르강 하류의 얼어붙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아침 안개가 아직도 바다 위에서 미적거리고 있어 얼음바다의 끝자락에 물려있는 청옥(靑玉)의 물빛은 볼 수가 없었다. 멀리 안개 속에서 무적(霧笛)이 울렸다. 그 무렵 러시아 땅이 낯설어서 창가에 서면 늘 아프리카로 향하는 계절풍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 땅은 척박하고 황량하며 외롭고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그는 차라리 역풍과 맞서며 돌아서고 싶었다.
낮에 K 사장으로부터 방문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는 해양대 출신으로 호주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지난 해 북한을 다녀온 후로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상주하며 북한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아파트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는 북한동포들이 그의 집에 한 번씩 놀러오곤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K 사장의 집에서 그들과 조우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의 눈길을 피하는 바람에 말을 붙여 보지는 못했다. 남조선 사람과는 절대 만나서도 얘기를 나눠서도 안 된다는 당의 지령이 있는데다가 파견 나온 보위부 사람의 감시 때문이라고 했다. 다들 사십대 초반의 동년배들이었으나 영양부족으로 얼굴들이 초췌했고 주름이 많아 그보다 나이가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이미 용도가 폐기된 상태여서 도시의 여염집 여자들이 길거리 창녀로 나서고 있는 마당에 굶주린 백성의 등을 탄 북한의 교조주의는 여전히 태연자약이었다.
K 사장과 그는 호텔에서 나와 동쪽바다를 향해 언덕길을 조금 내려가다 역전(驛前)과 마주하는 길모퉁이의 '조선 모란봉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단 처녀들이 주문을 받았다. 남자들과 달리 여성동무들의 살빛은 뽀얗고 붉었다. 군만두와 삼색나물(세 가지 나물),닭곰탕과 밥 한 그릇, 김치 한 종지, 마지막으로 200그램들이 인삼곡주 한 병을 시켰다. 도합 3,200루불이 청구되었다. 공식환율로 미화 1불이 493 루불일 때였으므로 외국인에겐 싼 가격이었으나 러시아 현지인들에겐 부담스런 가격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기사의 월급이 5,000루불('92년 6월 당시)이었으니 말이다.
K 사장은 여성동무들과 안면이 많았다. 저녁에는 노래 부르는 가무단도 등장한다는데 이들이 낮에는 교대로 홀 써빙도 하는 눈치였다.
" 여성동무! 얼굴 많이 예뻐졌수다."
" 아-이.김 선생님은...오늘 저녁에 곡주 드시러 오시기요. 내래 노래봉사 하갔시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 목소리가 청아했다.
K 사장은 너털웃음을 쏟으며 200루불을 팁이라며 계산서 위에 얹어 주었다.
블라디보스톡의 추억들(3)- 타냐
自由. 사르뜨르는 자기의 뜻에 따라 유추하여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정의했다. 한 동안 추워서 서울에 두고 온 아이들과 어머니 생각을 잊고 지냈다. 잡다한 집안 일과 살가운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에 가슴을 부대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작심한 것은 아니었다. 추위가 그런 상념들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뒤집어엎으려고 쿠테타를 일으킨 공산당과 KGB와 군부의 두목들이 밤새 술에 취해 지휘능력을 상실한 것도 다 추위 때문이었다. 머리로 올라가는 피가 차가울수록 생각은 소멸되고 건조해진다. 그래서 그도 짐승처럼 한 동안 자유로웠다.
타냐는 매우 고독한 여자로 보였다. 아마도 아이를 하나 둔 젊은 이혼녀일 것이다. 그녀는 어제저녁에도 호텔로비를 혼자 서성거렸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매일 저녁 그녀를 화장시켜 길거리로 내몰았을 것이다. 키는 175센티미터 가량,늘 붉은 곰 가죽으로 만든 모자에 짙은 갈색털의 코트를 입고 있었으며 계란형의 얼굴은 언제나 붉고 화사했다. 애기로만 듣던 백계 러시아 여인들의 특징이엇다. 그녀의 눈은 가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나른하거나 혹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아 있었다. 한 마디로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나 왠지 그 얼굴엔 늘 고적운(高積雲)이 흐르는 듯 했다.
동네깡패인 세르게이는 세르게이대로,8층의 놔리샤는 놔리샤대로,지금 타냐처럼 소속 없이 부랑하는 여자들은 또 저들대로 저녁이면 호텔로비에서 또는 복도에서 저들의 사업을 은밀히 펼치고 있었다.
로비에서 타냐는 자주 그와 얼굴이 마주쳤다. 그녀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잡화점 주인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처음에는 늘 호텔 한 구석에 붙어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1월도 훌쩍 지나간 어느 날, 그녀는 모처럼 그에게 다가오더니 명함을 한 장 건넸다. 8층의 놔리샤는 하루 1,000 루불(약 2.5불)에 방을 빌렸다고 했다. 손님에겐 50불을 받는다니 공일이 없으면 대단한 돈벌이를 하는 셈이었다. 세르게이는 100불을 받아 그의 아가씨들에겐 30불을
떼어 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타냐는 하루 저녁에 얼마나 받을까?
오전에 한국의 강원도에서 왔다는 C사장이 사무실로 찾아와 노쓰 쿠릴(North Kuril)의 생명태 상담을 제안했다. 단구에 살집이 넉넉한 ,그러나 얼굴은 멧돼지처럼 생긴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속초에 명태 필렛공장을 운영하고 목동의 45평짜리 아파트에 살며, 자가용으로 벤츠와 쏘나타 승용차 두 대를 굴리고 젊어서 종합상사 무역부에 근무했으며, 수산업계엔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시키지도 않은 제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불행하게도 그가 나열한 유명인사들을 그는 한 명도 기억하지 못했다.
밤이 되자 C사장이 그의 호텔로 찾아와 여자를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뚜쟁이 노릇은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러시아에 초행인 그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네깡패 세르게이는 아직 출근 전이었다. 놔리샤는 멧돼지 같은 그의 취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놔리샤 대신 타냐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마침 집에 있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C사장은 무스탕 코트의 허리춤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시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침을 삼켰다. 물끄러미 그런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못생긴 얼굴을 무너뜨리며 해해거렸다.
" 좀 드려요? 여자를 안으려면 먹기는 먹어야 돼요."
C가 넙쭉 삼킨 알약은 로얄제리 정제였다. 무척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흐 흐 흐...남자가 거시기 못쓰면 돈도 안 빌려줘요. 나는 아직도 매일 그거 하고 싶걸랑요."
사내들이 흔히 하는 얘기였지만 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세르게이가 찾아와 장사가 안돼 재미없다고 울상을 지어 마지못해 50불로 깎아 여자를 방에 들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제 손으로 훌러덩 옷을 벗더니 또 제 맘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나 잡아먹으쇼.’ 하는 바람에 바지도 벗지 못하고 돌려보낸 적이 있었다. 여자의 나신을 보았으니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여자를 보낸 뒤 한 동안 기분이 찜찜해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남자가 두 명인 것을 알고 먼저 그에게 눈으로 물었다. 셋이서 해요?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래 그것도 재미있겠군. 타냐가 품속에서 얇고 짧은, 납작하게 생긴 술병을 꺼내 한 모금 입을 다셨다. 여자들이 즐기는 브랜디라 짐작했다. 오늘은 좀 힘들겠군.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아니면 용기를 내기 위함이었을까? 그는 C 사장을 턱으로 가리키며 얼마냐고 물었다. 그 때였다.
" 아-황 부장 ! 나 저 여자와 안 해, 안 한다고 말해요. "
저게 뭔 소린가 하고 타냐가 그를 바라보았다. 타냐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깨끗한 몸일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온순하고 수줍은가.
" 아니 왜 그래요? 저만하면 훌륭한데 왜 그래요?"
" 저런 여자하고는 못해요. 나 그만 카지노에나 놀러 갈래 ."
그 말을 끝으로 C 사장은 말릴 틈도 없이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와 타냐는 서로 마주본 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다시 브랜디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 타냐! 미안해요. 대신 나하고 놉시다. 좀 전의 일은 잊어 버려요."
오-케이! 술병을 탁자위에 내려놓더니 그녀는 느린 동작으로 외투를 벗고 또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틀어 묶은 머리핀을 뽑았다. 치렁한 머리칼이 어깨선까지 흘러내렸다. 머리를 푼 그녀를 보자 비로소 그의 몸이 반응했다. 잠자리에서 여자가 머리를 푸는 이유를 실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타냐는 그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가라고 하지 않아서 고마워요.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불현듯 지구의 깊은 내부에서 펄펄 끓던 마그마가 휴화산을 뚫고 용솟음치듯 갑자기 뜨거운 불길이 그의 온 몸을 감싸왔다. 단순하면서도 진정이 깃든 그 눈빛 하나가 그의 몸을 한껏 충혈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바지를 벗겨 내리던 그녀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아닌가.
" 오친 볼쇼이! "
다음 날, C 사장은 그에게 미안했던지 그녀가 마약환자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註) 오친 볼쇼이: Much gr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