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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21코스 역방향
영해버스정류장-죽산마을-용동마을-원용암마을-하묘마을-신촌마을-용동마을회관
20221012
1.드뷔시의 달빛 선율과 사도세자의 원혼 동암묘
지난해 가을의 절정,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 펼쳐지고 고구마 수확 시기이던 10월 12일, 서해랑길 무안 2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했었다. 탐방 체험을 기록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 쏘다니다가 다치기도 하고 병원 신세도 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새해를 맞이하고 벌써 10일이 지났다. 탐방을 마치고서 3개월이 지나서야, 새벽의 어둠 속을 헤매다 태양이 솟아오른 해안길을 걷던 그날의 추억을 되살린다.
새벽 4시 35분 영해마을에 도착하여 가로등불이 환하게 비치는 영해마을 쉼터정자로 향하였다. 기둥에 서해랑길 22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는 쉼터정자에서 서해랑길 22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헤드랜턴 불빛을 비추며 영해 버스정류소 옆 영해마을 표석을 거쳐 영해로를 따라간다. 영해마을은 예전에는 섬이었다가 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하동 정씨가 이 섬에 입도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어 영해마을은 하동 정씨 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영해로를 걸으며 방향 감각을 잡아 어둠 속에서 서쪽과 동쪽 방향을 살피지만, 초행의 미지의 길, 그것도 어둠 속에서 위치를 분명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트랭글 지도를 보면서 서남쪽 방향 불빛 반짝이는 곳은 도원선착장과 김대중대교, 동쪽에 불빛 반짝이는 산봉은 도대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영해로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꺾어 간척농지 농로를 따라겨면 앞쪽에 불빛 보이는 곳은 성내마을과 실루엣 산봉은 대박산, 서북쪽 불빛 환하게 반짝이는 곳은 운남면 면소재지일 것이라 어림한다. 간척지 농로를 서쪽으로 따라가다가 북쪽으로 꺾어 진행하여 가다가 농로 전봇대에 붙은 오른쪽 방향 표지를 놓치고 직진하여 400여m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와 방향을 제대로 잡아 죽산마을 방향으로 들어섰다.
양배추밭 양배추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양배추 친구들이 어둠 속에서 도란거린다. 저 길손은 밝은 대낮에 걷지 않고 왜 어둠 속에서 미친 듯 헤매돌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을 어찌 막을 수 있겠소? 양배추들의 대화가 어둠을 밝힌다. 동쪽의 불빛 반짝이는 도대봉은 길손의 나침반이 되어 방향 감각을 잡아준다. 광산 김씨와 여산 송씨의 세거지인 죽산마을을 거쳐 신기마을로 넘어가는 언덕의 밭에는 양배추에 더하여 메주콩이 넓게 재배되고 있다. 무안 지역의 특산품이 양파인 줄만 알았는데, 양배추, 메주콩, 두부콩, 팥 등이 주요 농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신기마을 입구의 가로등 앞에서 동쪽 방향으로 길을 잡아 언덕을 오른다. 하늘에는 음력 9월 17일의 새벽달이 길손의 마음을 흔들며 달빛을 쏟아내린다. 폴 베를렌의 시 '하얀 달'이 환각처럼 울린다. "하얀 달이/ 빛나는 숲속에서/ 가지마다/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흐르는 목소리// 오, 사랑하는 사람아// 깊은 겨울/ 연못에 드리운/ 버드나무의/ 검은 그림자는/ 바람에 흐느끼네// 아, 지금은 꿈꾸는 때// 별들이/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에서/ 크고 포근한/ 고요가 내려오는 듯// 아득한 이 시간" 길손 또한 오직 기쁨으로 가쁘게 달빛을 맞이하는 행복에 젖어들 뿐이다. 그 행복 속으로 드뷔시의 피아노곡 '달빛'이 애잔하게 흐른다. 아내여, 그대는 지금 혼곤히 잠에 빠져 있겠지. 나는 먼 남쪽 땅 무안 지역을 새벽 달빛 속에 걸어가며 달빛 상념에 빠져 들었소. 그대의 사랑에 나는 언제나 감격한다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아서 멀리멀리 비쳐주세요." 백제의 어느 여인이 남편의 무사안전 귀가를 바라는 염원이 달빛을 타고 간절하다. 그래요, 서해랑길 탐방을 무사히 끝내고, 안전하게 귀가하리다. 콩밭 너머 동쪽에서 변함없는 도대봉이 동트는 아침빛에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며 길손의 다짐을 격려해 준다.
용동마을회관 앞에 이르니 동이 터서 어둠이 가신다. 게들이 구멍에 들어가 산다고 하는 간척농지 '농게들'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용동마을을 내려보며 원동암마을로 들어갔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원동암마을 앞 활짝 열린 바다와 해안이 어둠 속에서 갑갑했던 가슴을 뻥 뚫어준다. 동쪽 하늘이 불그스레해지더니 태양이 솟았다. 원동암마을에서 해돋이를 감상하며 햇빛의 한가운데로 행진한다.
동암묘, 서해랑길 안내도에 적힌 동암묘 입구를 지나면서 주저하다가 멍청하게도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왜? 동암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또 일행들이 한참을 앞서간 데다 더 늦을까 봐 초조함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도 동암묘를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탐방을 마치고 알아 보니, 동암묘는 영조의 장자이자 정조의 부친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사자의 사당이었다. 그런데 사도세자 사당이, 사도세자의 출생이나 죽음과 관련이 없는, 먼 남쪽 땅 무안과 섬 임자도에 두 개나 있는 것이 괴이하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이 이곳까지 알려지면서, 이를 애통해 한 민중이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랬다는 것으로밖에 이해가 안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가족의 비극이요, 왕이 세자를 죽인 왕조의 비극이 민중의 가슴에 뜨겁게 사무쳤을 것이다.
동암리 원동암마을 끝 젖섬을 바라보면 해안길을 왼쪽으로 돌아간다. 농게들 방조제를 건너 용등잔등이라 어림한 마을을 지나 운남면 동암리와 하묘리를 이어주는 방조제를 건너 하묘리로 넘어갔다. 운남면 하묘리는 지형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하묘리(荷苗里)라 했다고 하며, 두곡, 둔전, 팔학, 하묘, 신촌 등 5개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하묘리의 하묘마을과 신촌마을은 동쪽 청계만에 면해 있고, 두곡, 둔전 팔학마을은 서쪽 탄도만을 면해 있는데, 서해랑길 21코스에서는 하묘리의 신촌마을과 하묘마을을 관통하고, 두곡마을은 그 입구를 거쳐간다. 그리고 팔학마을은 동암리-하묘리 방조제에서, 둔전마을은 두곡마을 입구에서 각각 마을을 가늠할 수 있다. 하묘리는 운남면 면소재지 북쪽과 동쪽 지역을 감싸고 동서쪽 해안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두곡마을-둔전마을의 하묘리 능선에 고인돌 여러 개가 있다고 한다.
하묘리에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고 하는 원하묘마을 언덕을 넘으면 신촌마을이 나오는데, 신촌마을은 '점등', '새몰', '하능골' 등 세 개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서해랑길 21코스 역방향은 원하묘마을 언덕을 올라 신촌마을의 '새몰'마을, 언덕을 내려가 '하능골'마을을 거쳐간다. 하묘리 지역은 한우농장과 콩과 팥 재배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신촌의 '점등'이 어디일까? 아마도 새몰마을 아래 해안 쪽이 점등이라고 추정하였다.
하묘리 북쪽 지역은 국도77호선 두곡교차로와 운해로의 두곡삼거리가 이어지고 있어 길손에게는 탐방하기가 복잡해 보였다. 두곡교차로를 거쳐 두곡삼거리로 나가 운해로를 따라 망운면 송현리 방향으로 길을 들어야 하는데, 운해로를 따라가지 않고 서쪽 해안을 바라보는 두곡마을 위쪽 길로 진행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 길은 23코스 탐방로로 이어지는데 길손은 도중에 국도77호선 공항로 지하보도를 통하여 동쪽 운해로로 나와 21코스 탐방로를 제대로 찾아들었다.
21코스 탐방에서 아름다운 풍경은 어디였는가? 말해 보라. 동암리 신기마을 언덕길의 달빛 흐르는 황홀한 풍경, 용동마을회관 앞에서 바라본 농게들 위에 자리한 용동마을의 동트는 풍경, 원동암마을 해안에서 바라본 청계만과 젖섬의 아침빛 풍경, 바다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하묘리 원하묘마을과 신촌마을을 통과하며 동쪽으로 바라본 청계만, 창포만 톱머리해안, 무안국제공항과 레이더센터, 신촌마을 북쪽 언덕에서 내려본 해안과 들녘을 모두 품은 풍경, 두곡삼거리와 두곡마을 윗길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탄도만 조금나루와 섬들 풍경,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가슴을 덥혀준다. 길손은 이들 풍경에 도취했다. 또한 길손의 마음을 밝혀 준 양배추, 쪽파, 메주콩, 두부콩, 팥 친구들에게도 그리움을 보낸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밤 거리 : 13.59km
전체 소요 시간 : 3시간 24분
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4리 영해마을 쉼터정자 기둥에 서해랑길 22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서해랑길 22코스 시작점 표지를 배경하여 기념 사진을 찍고 서해랑길 무안 21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21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 영해촌길 쉼터정자와 영해마을을 뒤돌아보았다.
영해마을 입구에 서해랑길 무안 21·22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영해마을은 무안군 운남면 동암4리에 속한다.
"동암리(東巖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3,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다. 동암, 신기, 죽산, 영해, 용동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진 동암리는, 원래 무안군 현화면의 지역으로 큰 바위가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이라 부른다. 하지만 또 다른 '동암(東巖)'의 지명 유래는 1874년, 사도세자 사당을 세우고 사당 이름을 마을 동쪽 바위산 위에 있다 하여 '동암묘(東巖廟)'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호구총수에는 전좌리(田佐里), 하전좌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전좌리는 민촌을 말하는데 지역의 주민들은 전좌리라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무안군 현화면 동암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리,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을 합하여 망운면 동암리로 묶여졌다. 이후 1983년 망운면과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가 되었다." - 무안문화원
영해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해도(永海島)라고 불렸다.
"永海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감태미(하전자리), 자막골, 영해촌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김씨, 서씨들이 들어와 복합 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영해마을은 행정구역 상 동암4리에 속하며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영원히 바다에 있는 섬마을'이란 의미로 영해(永海)라 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며 다른 기록도 없어 확실치 않다. 마을의 입향조인 하동 정씨 족보에는 영호(永湖)라고 나오는데 간척을 하기 전 물이 들면 마을 안쪽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이것을 보고 永湖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 무안문화원
영해로를 따라 직진으로 이어간다.
왼쪽길은 운남면 성내리 성내마을 가는 길이고 서해랑길은 직진한다.
영해로 서쪽 길가에 하동 정씨 세장산碑와 영해공원 방향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영해공원은 22코스 방향에 있다. 세장산碑는 영해(永海)마을이 하동 정씨 세거지임을 증거한다.
영해로에서 서남쪽 운남면 성내리 방향을 조망했다. 중앙 왼쪽 불빛 반짝이는 곳이 도원선착장과 김대중대교가 맞을까?
영해로에서 동북쪽 운남면 동암리 일대를 조망했다. 불빛 반짝이는 산은 바다 건너편 청계면 도대리 도대봉, 무안국제공항의 비행기 이착륙의 안전을 위해 산에 등대를 세운 것 같다. 도대봉은 서해랑길 20코스와 21코스 탐방에서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된다.
왼쪽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은 영해로와 헤어져 간척지 농로로 진입한다.
영해마을 0.8km 지점으로, 간척지 농로로 진입하여 이어간다.
앞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운남면 성내리, 검은 산봉은 대박산이라고 가늠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공기변실이 무슨 기구일까? 서해랑길은 왼쪽 양곡지선 공기변실44호 방향으로 이어간다.
드넓은 간척지 들판에 벼들이 자라고 있다. 아직 수확시기가 아닌 것 같다.
앞쪽에 전봇대가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죽산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직진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앙 뒤쪽에 불빛 반짝이는 곳은 운남면 연리 면소재지일까?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죽산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직진하여 갔다가 잘못을 알고 되돌아왔다.
정면 중앙에 불빛 반짝이는 곳은 망운면 피서리 무안국제공항일 것이다. 이 길에서 왼쪽 불빛 방향 죽산마을로 이어간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죽산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불빛 반짝이는 곳은 죽산마을회관, 서해랑길은 그 오른쪽 골목길 양금로를 따라 죽산마을을 통과한다.
서해랑길은 죽산마을회관 옆 양금로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아래 불빛 반짝이는 죽산마을회관 왼쪽 골목길 양금로 365를 따라 올라왔다.
"죽산마을은 동암3리에 속하는 마을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中村’으로 나온다. 마을유래지에 중촌은 동암리의 중간에 있다 해서 부르는 이름이라 하나 동암이란 지명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형성된 이름이다. 추정컨대 中人들이 사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주변에 전좌리, 하전좌리 등의 민촌에 해당하는 마을 지명이 있었던 것이나 이후에 지명을 바꾼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반촌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나온 지명이 '竹山'이다. 이 마을은 원래부터 대나무가 많이 있었던 자리다. 이 마을 입향조로 여겨지는 광산 김씨 김남중(金南重, 1595~)의 호가 '竹菴'이었으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마을 주변이 개발되기 전에는마을을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듬성듬성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긴 하다. 일제강점기 때 지명의 변경을 시도하면서 대나무가 많은 특성을 살려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것이다. 자료에도 1912년에는 현화면 죽산리로, 1917년엔 망운면 동암리 죽산리로 나온다." - 무안문화원
왼쪽에 광산김씨세장산碑가 세워져 있다. 광산김씨세장산碑를 거쳐 언덕을 넘어 내려간다.
죽산마을 입향조가 광산 김씨 죽암(竹菴) 김남중(金南重, 1595~)씨라고 하니, 죽산마을은 광산 김씨 세거지인 듯. 또 여산 송씨 송충명(宋忠命, 1625~1670)씨가 광산 김씨보다 약간 늦게 나주 금안동에서 입향하여 여산 송씨 세거지이기도 하다고 한다.
불빛 비치는 곳이 운남면 동암리 신기마을인 듯. 메주콩밭과 양배추밭을 거쳐 신기마을 입구로 이어간다.
출발지에서 3.5km, 목적지까지 8.4km 지점. 서해랑길은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용동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신기(新基)는 동암2리에 속한 마을로 새로이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7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경술국치 때에 '신규'로 고쳐부르다가 '신기'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 주민은 마을의 지형이 마치 기(基)자 형국이어서 신기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웃담터, 아랫담터, 서촌, 떼집, 주막너머 등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담터라고도 불려지는 이 마을은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목장 안터라 부르기도 했다. 목장을 둘러싸고 있는 긴 담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담터'라 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떼로 만든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떼집'이라 했으며 죽산마을 서쪽에 거주한다 해서 '서촌', 신기저수지 주변의 주막 부근에 있다 해서 '주막너머' 등으로 부르는 마을들이다." - 무안문화원
하늘에는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2일)의 새벽달이 밝게 빛난다. 이 지역에 메주콩밭이 넓게 분포한다.
동쪽으로 보이는 청계면 도대리 도대봉이 이번 코스의 기준이 되어 준다.
언덕길 왼쪽에 양배추밭이 있고 언덕을 올라 마을집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영해로와 만나다.
오른쪽에 감나무 농장이 있고, 언덕 위에 주택들이 있다.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나가면 간선 영해로와 만난다.
이곳이 신기마을의 '웃담터, 아랫담터, 서촌, 떼집, 주막너머' 중 웃담터마을일까? 영해로593-26 주택을 돌아나간다.
영해로 건너편 왼쪽에 용도마을회관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용도마을회관 앞에서 오른쪽 원동암길로 이어진다.
"용동(龍東)은 동암5리에 속한 마을로 10여 년 전에 원동암에서 분리되었다. '궁게들'을 중심으로 탑동, 색교, 어장골, 용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탑동은 용동 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 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골이라 불려졌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 동암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목포에다 이 탑을 팔았다고 한다. 탑은 지금도 목포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한 절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많은 기와조각들이 나온다고 한다. 색교 또는 새터는 새로 조성된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장골은 용동잔등이라 부르는 지역 주변에 있는데 예전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다. 특히 용동잔등은 쪽두리잔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 늦게 마을로 들어오는 배들에게는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용동은 용골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형이 용을 닮았고 마을에 물이 잘 나오는 샘이 있어 마치 용이 머물고 있는 마을처럼 여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무안문화원
영해로 맞은편에 용동마을회관과 용동마을 버스정류소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원동암길로 이어진다.
원동암길을 따라 내려가면 동암어민회관을 거쳐 원동암마을 앞 해안으로 이어진다.
아래는 '궁게들'을 중심으로 탑동, 색교, 어장골, 용동으로 이루어진 용동마을일 것이라 어림한다. 건너편 해안은 무안군 망운면 피서리 톱머리 해안, 바다 건너 불빛 반짝이는 곳이 무안국제공항이다.
건너편에 청계면 도대리의 톱머리방조제가 보이기 시작한다. 저 해안을 무안문화원에서는 '청계만'이라 이르고 있다.
탐방 기준이 되어 준, 건너편의 도대봉 아래 청계면 도대리에서 강정리와 구로리로 이어지는 청계만 해안이 펼쳐져 있다.
"원동암 마을은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가는 도중 운남면 소재지 못 미쳐서 좌측으로 돌아 4km쯤 가면 나온다. 마을 앞에는 청계만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배산임해(背山臨海)의 마을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동암1리 원동암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보면 “원래 마을 이름은 '전좌리(田佐里)'였으나 이후 동쪽으로 바위층이 펼쳐져 있어 ‘동암’으로 부르다 지금은 '원동암'으로 부른다"고 했다. 원래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모래산이 오른쪽으로는 상투머리라는 부리가 있어 전후좌우가 잘 짜여진 마을이었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는 2㎞가 넘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 무안문화원
원동암마을에 이르니 동쪽에 해가 돋아오르기 시작한다. 앞의 동그란 섬은 유도(乳島), 건너편 해안은 망운면 피서리 톱머리해안(왼쪽)과 청계면 도대리 해안(오른쪽), 청계만이라 이르는 해안이다.
새벽에 출발한 운남면 동암리 영해마을은 중앙에 돌출한 구릉 뒤쪽에 있을 것이라 가늠한다. 왼쪽 해안은 청계면 강정리, 구로리, 남성리, 복길리로 이어지는 해안이다.
왼쪽에 낮은 산봉은 중근봉, 중앙의 산봉이 도대봉, 청계면 도대리, 강정리, 구로리로 이어지는 청계만 해안이 펼쳐져 있다.
운남면 동암리 원동암마을에서, 동쪽 망운면 피서리 톱머리해안 쪽에서 떠오른 태양을 감상했다. 건너편은 망운면 피서리(왼쪽)에서 청계면 도대리로 이어지는 청계만 해안이다.
일행들은 한참 앞서 갔다. 망설이다가 어리석게도 동암묘에 들르지 못하고 그냥 통과한다.
"무안 운남이나 신안 임자는 사도세자의 출생이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곳에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묘가 세워졌을까? 무안문화원에서 발간한 각종 책자(무안의 옛이야기)에는 동암묘가 생기게 된 배경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777년(정조 1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에 이 마을의 촌로(村老)인 성(成), 이(李), 박(朴)씨의 꿈에 한 귀인(貴人)이 나타났다. 마을 앞에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를 보러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세자이니라. 원한이 뼈에 사무친 채 나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느니라.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 영혼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그리 알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주민들이 모여서 서로 지난밤 이야기를 하던 중 세 사람의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몰라 궁금해 하면서 헤어졌다. 밤을 맞은 세 사람에게 또 다시 세자의 혼령이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모인 세 사람은 똑같은 현상에 놀라워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바다에 뭐가 떠내려 온다’는 주민의 외침에 가서 살펴보니 까만 궤(櫃) 하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제야 이틀간의 현몽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정성스럽게 모셔와 제단을 쌓고 모시니 이것이 동암묘의 첫 번째인 단이었다. 그러다 폐서인이 되었던 세자가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서 복위되고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일시 제단을 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가 다시 촌로들의 꿈 속에 나타나고 마을에 재액이 생기자 인근 유림들과 함께 다시 사우를 세워 제사를 모시니 고종11년 1874년이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인 제단이다. 그리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단을 훼철했다. 이후 다시 1918년 사당을 세워 면민들이 모시니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인 사당이다. 1971년 현재의 모습으로 동암묘를 중건하여 군수가 제주(祭主)가 돼 모셔오다 현재는 마을 주민만의 제사가 되니 이것이 네 번째의 변화이다.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오석(烏石)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또한 묘실 좌우로 동암묘 중수기 등 4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우 입구에는 수령 10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두 그루 있고 좌측에 ‘장조황제동암묘비’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산 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당제’, 또는 ‘당제’라 해서 제를 모셔왔는데 먼저 동암묘에서 제를 지내고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에 가서 다시 제를 지냈었다. 현재는 당산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관계로 동암묘에서 사도세자 당제만 지낸다."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운남면 동암리 원동암마을 동쪽의 작은 섬 젖섬이 앙증스럽다. 건너편은 망운면 피서리(왼쪽) 창포만과 청계면 도대리(오른쪽) 청계만이다. 무안문화원에서는 이곳을 넓게 청계만이라 이르는 듯하다.
무안의 운남면, 망운면, 현경면, 해제면, 신안의 지도읍이 에워싼 탄도만이 낙지의 고장임을 알게 되었다.
서해랑길은 해안길에서 언덕 위의 운남면 동암리 용동잔등마을로 이어진다. 언덕 위의 마을은 '어장골', '쪽두리잔등'으로 불리는 '용동잔등'마을인 듯. 밤 늦게 고기잡이를 마치고 오는 배들의 등대 역할을 한 마을이라고 한다.
건너편에 망운면 피서리 톱머리 해안이 펼쳐져 있다. 중앙 뒤쪽에 무안국제공항과 레이더센터가 보인다.
동암리 원동암방조제 제방길을 따라가다 간척지 '궁게들(구멍 속에 게들이 있는 들판)'로 내려가 용동잔등마을로 올라간다.
일제시대 간척된 동암리 궁게들이 펼쳐져 있고 용동마을에 속하는 작은 마을, 용동잔등마을이 언덕에 있다.
간척지인 궁게들 건너 중앙 언덕에 용동마을회관이 가늠된다. 저곳에서 원동암마을을 돌아서 방조제로 나왔다.
용동잔등마을로 가다가 뒤돌아 보았다. 궁게들 간척지와 방조제 뒤에 유도(젖섬), 오른쪽 뒤에 청계면 도대리 도대봉이 보인다.
봄에 남쪽 해안을 걸으며 멀구슬나무 꽃 향기에 젖었고, 가을날 해안의 멀구슬나무 푸른 멀구슬을 보며 추억에 젖는다.
중앙에 乳島, 왼쪽 뒤에 창포호가 가늠된다. 창포호 앞의 톱머리방조제와 청계만이 펼쳐져 있고, 도대봉이 오른쪽에 우뚝하다.
동암리 용동잔등에서 북쪽 동암리해안으로 내려간다. 해안 건너편에 하묘리 원하묘마을이 가늠된다.
바다 건너편 무안군 망운면 피서리 청계만 해안 너머로 무안국제공항과 레이더센터가 가늠된다.
동암리 해안을 내려가며 하묘리 원하묘마을(왼쪽 앞)과 맞은편 해안의 하묘리 신촌마을을 가늠한다.
동암리해안 방조제는 건너편 하묘리 해안으로 이어진다. 왼쪽 뒤 마을은 하묘리 팔학마을인 듯, 중앙 앞 마을은 원하묘마을이다.
"마을의 형국이 학과 관련이 있는 마을인 팔학(八鶴)마을은 운남면소재지에서 77번 국도를 따라 망운 방면으로 1km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다. 행정구역명은 운남면 하묘3리 팔학마을로 도림동, 팔학, 참삯골로 이루어졌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모양이 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해서 '팔학동'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도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아름드리 참솔나무가 울창히 자라고 있었는데 그 소나무 위에 학이 살고 있어서 팔학동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앞이 학의 목, 마을 중앙이 학의 몸통, 마을 동쪽과 서쪽 주변이 학의 날개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 8마리의 학이 날아와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영광군 고잔면에 속해 있을 때는 팔학교라 했다가 무안군 망운면으로 편입되면서 팔학동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오른쪽 뒤의 마을은 하묘리 팔학마을인 듯하고, 더 오른쪽 뒤로 둔전마을이 있을 것이라 어림한다.
"하묘리(荷苗里)는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방면으로 1㎞ 가량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하묘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소속이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두곡, 둔전, 팔학, 원하묘, 신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에 두곡리, 둔전촌, 하묘촌이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자료와 1917년의 자료에는망운면 두곡리 하묘리, 팔학동, 도림동, 금산리, 둔전동 등이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운남면 하묘리 두곡, 둔전, 팔학, 하묘, 신촌으로 나온다. 두곡마을 입구와 배나무정 등 하묘리 능선의 전체에 여러 기(基)의 고인돌이 있으며 둔전마을에 김해 김씨 제각인 경헌재가 있다. 한국전쟁을 앞두고 운남과 망운은 커다란 갈등과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두곡마을을 포함한 하묘리 일대에서는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두곡마을에 김해 김씨 열부비가 있다." - 무안문화원
갯벌 건너 용동잔등 뒤에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되는 청계면 도대리 도대봉이 솟아 있다. 태양이 떠올라 눈부시다.
건너편 동암리에서 하묘리를 잇는 방조제가 조성되어 있다. 왼쪽 용동잔등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방조제 제방길을 따라왔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신촌마을로 내려간다.
"원하묘는 하묘4리에 속하는 마을로 하묘리에서 처음 형성된 마을이라 원하묘라 했다. 地名의 역사를 보면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하묘촌으로 처음 나온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무안군 망운면 하묘리, 1917년엔 망운면 하묘리 하묘마을로 그리고 1987년엔 운남면 하묘리 하묘마을로 나온다. 현재의 이름처럼 하묘 앞에 '원'을 붙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하묘(荷苗)라 부른 것은 마을의 지형이 연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무안문화원
언덕 너머 동암리 용동마을 방조제를 건너서 하묘리로 들어와 언덕을 넘어 원하묘마을을 거쳐 왔다.
원하묘마을에서 언덕을 넘으면 신촌마을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하묘리 신촌마을은 '점등', '새몰', '하능골' 세 개의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앞의 마을은 새몰마을이다.
신촌마을 가는 길에 동쪽 바다 건너편의 청계만을 바라보았다. 청계만의 톱머리 해안과 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하묘리 신촌마을의 '점등', '새몰', '하능골' 세 지역 중 새몰마을이다. 서해랑길은 운남신촌1길을 따라 새몰마을을 통과하여 언덕을 내려가 신촌마을회관 앞으로 이어간다.
메주콩밭을 지나 길 오른쪽의 신촌마을회관 앞을 통과하여 내려간 뒤 왼쪽으로 꺾어 왼쪽 뒤 언덕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 하묘리 새몰마을을 거쳐 매주콩밭 언덕을 내려와 신촌마을회관 앞을 지난다.
하묘리 신촌마을은 점등, 새몰, 하능골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앞에 보이는 지역은 하능골 지역인 듯.
"신촌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으로 가는 4km 지점에서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청계만을 바로보고 바닷가에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점등, 새몰, 하능골, 부수막골로 이루어졌으나 사람이 사는 곳은 점등을 포함한 새몰과 하능골이다. 예전에 점등마을은 옹기를 굽는 동네였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현대화된 그릇 제작 기술이 들어오면서 경쟁력을 잃어 자기 굽는 사람들이 떠나면서 점등마을은 자연 소멸되었다. 이곳에 새롭게 마을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옆 마을인 새몰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건너와 정착하면서 지금의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능골이란 지명은 새몰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란 주민들의 말처럼 하능골, 하롱골, 하능골 등으로 불려졌다고 하나 확실한 마을 이름을 알고 있는 주민은 없었다. 그러나 마을유래지에는 '하늘골'로 표기되어 있어 하늘골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추정해 볼 수는 있다. 하묘리(荷苗里)란 마을 이름이 연을 닮은 마을의 모습을 보고 붙인 것이라 했을 때 여기에 견주어 하능골, 하롱골의 지명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荷)란 연꽃과에 속하는 수생 식물을 나타내며 롱(弄)이 마을이나 동네를 나타내기도 해 하롱(荷弄)골로 불려졌지 않나 여겨진다. 즉 연(蓮)이 자라는 마을이란 의미다. 물론 롱(隴-고개이름, 땅이름을 뜻하기도 함), 롱(壟, 언덕을 나타내기도 함)의 한자도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한 주민이 어렸을 때 마을 앞 방죽에 연꽃이 많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 4개의 큰 고랑이 있어서 그곳에서 뛰어 놀았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연이 자라고 있는 언덕이란 의미의 하롱골, 또는 하능골이 원래 이름이 아닌가 한다. 일부 주민은 하능골도 옆 골짜기인 부수막처럼 부를 때는 골짜기란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 무안문화원
신촌마을 하능골 입구에서 왼쪽 길로 진입하여 이어간다.
오른쪽 뒤 새몰마을 언덕을 내려와 중앙 오른쪽의 신촌마을회관을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내려와 왼쪽으로 틀어왔다.
언덕길을 올라가 마을 밖을 오른쪽으로 돌아 운남신길로 나가서 국도77호선 두곡교차로 앞으로 이어간다.
하묘리 신촌마을이 조망된다. 왼쪽 마을이 하릉골, 오른쪽 마을이 새몰마을이라 추정한다. 건너편의 도대봉은 요충지이다.
국도77호선 도로 가드레일 옆 농로를 따라 운남신촌길 방향으로 이어간다.
운남신촌길로 나가는 도중 국도77호선 두곡교차로 방향을 살펴보았다. 맨 왼쪽 뒤에 두곡마을이 보이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국도77호선 횡단보도를 건너서 건너편 왼쪽에 보이는 운해로 삼거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미소드림노인요양센터 앞으로 이어간다.
"두곡(頭谷)마을은 하묘1리에 속하는 마을로 두곡과 샘건너, 꽃회사 마을로 이루어졌다. 두곡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남과 망운의 경계지점으로 망운에서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머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머리실(頭谷)'이라 붙인 이름이다. 두 번째는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동각골, 양각골(兩角洞) 등 소의 뿔과 관련된 지명이 있으며 옆 마을인 둔전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와우정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와 관련이 깊은 마을들이기 때문이다." - 무안문화원
중앙 왼쪽 길을 올라와 중앙의 농가를 돌아서 국도77호선 옆 농로를 따라 이곳으로 왔다.
운남신촌길에서 두곡교차로를 건너 두곡삼거리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미소드림노인요양센터 앞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건너편 가드레일 뒤 신촌마을 언덕 위 농로를 따라와서 왼쪽 끝 운남신촌길로 나와 두곡교차로를 건너왔다.
출발지에서 9.7km, 목적지까지 2.2km 지점이다. 미소드림노인요양센터 앞쪽 운해로를 따라 진행한다.
운해로 두곡삼거리 두곡마을 입구에서 뒤돌아보면 오른쪽 뒤에 멀리 하묘리 둔전마을이 가늠된다.
"둔전마을은 하묘2리에 속하는 마을로 운남면소재지에서 망운면 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은 동아실, 산중, 새터, 둔전, 와우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지형은 태극혈로 물과 산이 태극 모양으로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며 돌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이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살지 않고 남원에서 살던 김해 김씨 김상경(자-익충, 호-수진제. 1574-1646)씨가 부친의 묘지를 이곳에 잡으면서 김해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 무안문화원
중앙에 바다로 돌출한 조금나루선착장, 그 뒤에 탄도섬이 보인다. 23코스에서 바로 아래 해안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앞에 노란 건물은 운남농협저온저장고이다. 서해랑길 21코스는 오른쪽 국도77호선 항공로 동쪽 운해로를 이어가야 하는데, 잘못하여 서해랑길 23코스 탐방길을 따라가게 되었다.
서해랑길 21코스는 왼쪽에 보이는 국도77호선 공항로 아래를 통과하여 동쪽의 운해로를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잘못 알고서 서해랑길 23코스를 따라가고 있다.
뭍에는 메주콩밭, 바다에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바다 오른쪽에 조금나루선착장이 보인다. 앞의 섬은 이름이 무엇일까? 바로 앞 해안은 서해랑길 23코스 탐방길에 속한다.
동쪽 운해로를 따라가야 하는데 국도77호선 항공로 서쪽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이 길은 서해랑길 23코스 탐방길이다.
서해랑길 23코스는 오른쪽 언덕길로 이어간다. 이곳에서 국도77호선 항공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운해로로 건너간다.
반대편 길에서 지하통로를 통하여 운해로로 나와 서해랑길 21코스 탐방길로 제대로 들어왔다.
운해로가 서해랑길 21코스 탐방길인데 이 길을 놓치고 국도77호선 공항로 서쪽길을 따라오다가 이곳으로 나왔다. 운남면 하묘리에서 망운면 송현리로 넘어왔다.
바다 건너편 망운면 피서리 해안에 무안국제공항과 레이더센터가 보인다. 서해랑길 20코스에서 탐방하는데 21코스를 먼저 탐방하고 뒤이어 20코스 저곳을 탐방하게 될 것이다.
오른쪽에 '두메산골' 풍천민물장어 음식점이 있다.
망운면 송현리 두메산골 풍천민물장어 음식점 입구에 광산 김씨 묘지가 있다. 그렇다면 음식점 사장이 광산 김씨일까?
운해로 송현리사거리 도로표지판 아래에 서해랑길 이정목과 서해랑길 무안 20·2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용동마을회관 입구에 서해랑길 이정목과 서해랑길 무안 20·21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거리 11.9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쉬움으로 적혀 있다. 주요 지점은 영해 버스정류소, 동암묘, 용동마을회관이다. 실제로 걸어 보니 잘못 걸은 길을 포함하여 13.59km, 3시간 24분이 걸렸다. 동암묘를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조금나루길을 따라가면 국도77호선 공항로의 송현교차로와 만난다. 그곳에서 직진하여 조금나루길을 계속 따라가면 송현보건진료소 앞에서 23코스 탐방길과 만난다.
망운면 송현리 용동마을회관 입구 전봇대에 서해랑길 21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21코스 역방향 탐방을 끝마쳤다. 뒤에 보이는 용동마을회관 정자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서해랑길 20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