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정신을 찾아서- 황순모와 황병학 의병장
백운산 의병부대의 두 주역
황순모는 가족 만나려 하산하다 일군에 체포돼 처형
일제 간담 서늘케한 황병학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지금은 광양(제철소를 포함)이 공업지역이지만, 백운산을 배경으로 해 전남 광양에서 활약했던 의병장은 황병학(1876~1931)이다. 선봉장은 황순모(1873~1908)이다. 황순모와 황병학은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으나 작은 숙부와 조카 사이였다. 이들은 일제가 고종을 겁박해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백성을 억압하는 것에 통분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든 일본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황순모와 황병학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들은 1908년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울 것을 다짐했다. 1908년 7월26일, 백운산 묵백에 200명 정도의 의병들이 모였다. 전남 동부 경남 서부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의병모집을 주도했던 황순모는 선봉장에, 지략과 담력이 남달랐던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됐다. 황순모는 군자금 확보하기 위해 광양읍은 물론 인근의 구례와 하동, 순천, 여수 등을 다니며 유지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원당의 최진사, 골약면 중골의 정행원, 지접의 김서임, 장잣골의 유문행 등이 쌀과 현금, 무기 등을 모아 황순모에게 건넸다고 전해진다.
군자금을 확보한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은 총을 확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총이 있어야 하고 총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모아 의병으로 참여시키기로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만들어냈다. 백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의병들의 근거지로 알맞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 묵백계곡의 임방골에서 훈련을 하면서 쇠를 녹이는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 직접 무기를 제작했다.
1999년 순천대박물관의 학술조사를 통해 백운산 억불봉 아래 진상면 황죽리 생쇠골과 매봉아래 진상면 어치리 2곳에 용광로가 남아있음이 확인됐다. 이들은 어느정도 무장이 되자 가장 먼저 망덕포구의 일본인 어부들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인 어부들은 망덕포구와 일대 바다를 장악하고 조선 어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활동은 일본어부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의 적극적인 조선이주정책에 따라 옮겨온 일본어부들은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를 사용해 어장을 싹쓸이 하기 시작했다. 일본배가 훑고 가면 조선어부들은 건질게 없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어부들은 안아무인이었다. 조선어부들을 무시하고 윽박질렀다. 일본어민들은 일본 헌병과 경찰의 비호아래 어장 어업권을 삐앗아가기 시작했다.
황병학의병부대가 첫번째 공격목표로 망덕항 일본어선과 어민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광양어민들의 불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병들을 일본어민들의 횡포를 응징, 광양어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본어부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황병학 의병부대의 기습공격으로 망덕항 일본어민과 일본인들이 큰 피해를 입자 일본군은 곧바로 광양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황병학 의병부대 토벌에 나섰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광양 옥곡원의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황병학 의병장의 부상은 의병부대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고만다.
황의병장은 광양 옥곡면 뒷산 원등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개의 부대로 나눠 독자적으로 활동케 한 다음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며 다친 다리를 치료 받았다. 일제는 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의병가족들에게도 온갖 폭력과 협박, 고문을 자행했다. 일제는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촌 마을을 찾아와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황병학·황순모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을 때리고 짓밟았다. 일제는 백운산을 무대로 해 활동하는 황병학의 병부대를 토벌하는 것이 쉽지않자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가족들을 수시로 찾아와 위협하면서 귀순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황순모 선봉장에 대해서는 귀순하지 않을 경우 비촌마을에 살고있는 황순모 선봉장의 늙은 부모를 잔인하게 죽이겠다고 말을 퍼뜨렸다. 그래서 황순모 선봉장은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
전 재산을 팔아 의병대 군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일제에 맞섰지만 가족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황순모 선봉장은 가족들을 살펴보기 위해 산에서 비촌마을로 내려왔다. 일본 헌병들은 황순모 선봉장이 내려오는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황순모 선봉장을 사로잡았다. 그런 뒤 광양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했다. 일본에 협조하고 다른 의병들의 소재를 밝히라며 때리면서 강요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가족때문에 귀순은 했지만 목숨을 걸고 함꼐 사워왔던 다른 의병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순모 선봉장의 친구이자 의병활동을 같이하며 생사를 함께 할 것을 약속했던 한규순이 총살현장에 찾아왔다. 한규순은 "나는 황사중(황순모)의 부하 한규순이다. 의사(義士)라면 그만이지 장졸(將卒)의 구분이 어디 있으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면서 황순모 선봉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일본 헌병은 황순모의병장을 끌어안은 한규순을 향해 사격을 했다. 두사람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1908년 10월11일의 일이었다. 황순모 선생은 36세의 나이로 그렇게 장렬하게 친구 한규순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여수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으나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들이 희생당하였다. 일제는 1개 연대를 투입해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치며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어쩔 수 없이 1909년 후반, 대부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황병학 역시 신분을 숨기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재기를 노렸다. 황병학은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고흥에 은거 중이던 독립운동가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국민대회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그뒤 함께 평안도까지 올라갔으나 기산도는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황병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황병학은 1923년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조선 땅에 잠입하려다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4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고향인 비촌으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당한 모진 고초와 고문으로 그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다. 결국 193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지난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1977년에는 진상면 비촌리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허나 황병학 의병장과 함께 백운산과 광양 일대를 무대로 활동했던 황순모 선봉장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화돼 있는 상태다. 이는 의병모집 및 활동초기 황순모 선봉장이 군자금을 대고, 의병들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일본군과 싸웠지만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다가 체포된 것이 그의 명성을 가리고 있어서다. 일제가 가족들이 살고있는 집과 마을을 몽땅 태워버리고 귀순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 황순모 선봉장이 산에서 내려가기로 한 결정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일제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가족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순모 선봉장의 귀순결정은 가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지적한대로 황순모 선봉장은 조카 황병학 의병장과 함께 망덕항 거주 일본인을 공격하고 일경과 전투를 벌이는 등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귀순했다는 점이 흠결로 작용해 광양지역 의병선양사업에 있어서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점이 아쉽다.
고운석 주필 cws23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