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운명’이 인생에 끼어든 한 예
좋든 나쁘든,
살아오면서 어쩌다 한 번씩 너무나 극적이거나 신기한 일이 나에게도 벌어질 경우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이게 '운명'인가 보다.'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운명론자'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신'을 믿지 않으니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그런 내가 결국 독일을 떠나고 있었는데, 인간적인 내 영역으로써는 설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일이 벌어지는데......
*
날이 쌀쌀해진다.
새로 산 겨울 옷을 입고 나는 마지막으로 베를린 '동물원 역(Zoologischer Garden)' 플랫홈에 나왔다.
아직 겨울은 아닌데도, 그 옷 입은 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을 정도로 쌀쌀하다.
아침에 가마 있는 집에 가서 흙작업 네 개를 찾았고 정성스레 포장했다.
물론 한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는데, 가는 도중 깨질 수도 있지만 그건 운명이다.(내 영역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들을 독일에 남겨놓고 갈 수는 없어서, 깨질 걸 각오하고 가져가려는 것인데, 나는 이미 책과 물감까지도 버린 뒤였다.
그러고서도 어차피 내일 역시 택시로는 못 갈 형편이라서, 오늘 '덴마크 행' 버스표를 예매하러 가는 길에 그 터미널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그런 뒤, '아시아 도서관'에 가 봤다.
그런데 그동안 가끔씩 거기서 만나기도 했던 00씨는 없었다.(그것도 운명일 것이었다.)
그래서 신문을 보다가 **씨와 그 친구를 만났다.
그런 뒤 **씨와는 둘이 달램도르프(Dahlem Dorf) 길을 걸어 학교 식당에 가서 밥도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도서관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 어제 꿈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관계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선생님 집에 '한글 프로그램'을 돌려주러 갔는데, 저녁 식사를 초대받은 격이 되었다.
거기서 성의있는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그들과 내 얘기 화단 얘기 등을 하고 헤어졌다. 물론 그들 역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어쩌겠는가 말이다.
어차피 내 인생이고 나는 또 다른 길이 있는 사람이니, 나 대로 살 수밖에......
그렇게 그 집을 나온 뒤, 시간이 조금 남기에,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다.' 하면서 '동물원 역' 플랫홈에 나와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 건너 편에도 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는 사람이 보일 정도로 오늘은 정말, 가을도 깊은 가을 같은 서늘한 날씨다.
돈도 없는 주제에 무리를 해서 외투를 하나 샀던 건데, 결과적으로 보면 잘 산 것 같다.
그리고 여기 '동물원 역'.
아, 그동안 내가 여기를 자주 찾아왔던 건, 어디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였다.
옛날, 바르셀로나에서 바닷가에 가던 심정으로 오곤 했던 거니까.
물론 여기 베를린엔 바다가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어딘가 편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찾아낸 게 그나마 이 역 앞 '허물어진 교회'였는데,
그 내부는 약간 어두워서 앉아서 졸 수도 있는 등,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기도 하다 보니 정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떠 있는 듯한 예수상’이 있기 때문에 혼자 그 조각과 대화를 하곤 했는데,
그러다 무료하면 바로 이곳 플랫홈으로 자리를 옮겨, 떠나고 오는(근데 나는 주로 떠나는 사람만 본 것 같다.)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늘처럼 나도 떠날 것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나도, 이제는(내일) 베를린을 떠나 덴마크로 가는데,
생각해 보면 그것도 좀 이상하다.
내가 이 베를린에서 지내면서 그동안 여기를 숱하게 찾아왔음에도, 비행장도 여기 기차역도 아닌 엉뚱한 버스 터미널에서 떠난다는 사실이......
그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네 인생은 수수께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그렇듯 나는 내일 일 역시 모른다. 한국에 돌아가서의 일은 더더욱......
허긴, 나 같이 불안한 가운데 변화무쌍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도 한 순간에 바뀔 가능성이 농후하다 보니,
당장 한국에 도착한 다음을 걱정해 봐야 무엇하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나는 지금 한국 상황까지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 일은 한국에 도착한 다음에 생각하면 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플랫홈에 나와있는 김에, 뭔가 그동안 내가 여기 베를린에서 지냈던 일을 조금이나마 정리하고는 싶은데......
근데, 뭘 정리한다지? 마땅히 해놓은 것도 없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뭘 하려다... 하나도 못하고 돌아가는 꼴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여기서 좌절하지는 않았다.(이건 변명인가? 근데, 왜 이렇게 확신에 차 있다지?) 그러니, 괜히 우울하게 '자아 비판'일랑은 하지 말자! 아직도 나에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하고 있고, 또 다른 일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답답하고 암울했던 베를린을 떠나는 걸, 그리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생은 나를 또 (상상도 못할 다른)어떤 삶으로 이끌어갈지.......
'이건 의왼데? 그 당시 이런 자세였다는 게 영 믿기지가 않네...... 여태까지의 나는, 아니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뭐 하나 제대로 해놓지도 못하고 몸만 상해서 돌아와놓고선......' 하는, 내 지난 가장 대표적인 '굴욕의 역사'로 보고 있는데......'
지금 하늘엔 낮은 구름이 깔리고 있다. 언제나 이 도시 베를린이 그랬던 것처럼, 음울하고 답답하게......
'잘 있거라. '허물어진 교회'야, 그리고 여기 '플랫홈'아. 그동안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선 동반자일 수도 있는 역할도 했단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기 베를린을 떠나는데, 너희들과도 이별인데, 또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잘 있거라. 그리고 다음에는 웃으며 만나자꾸나......'
9 . 14 저녁
*
노선생님 댁에 인사를 드리며(스케치 한 장과 가지고 있던 판화 한 장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에 G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4년 반만에 보게 될 텐데, 그녀도 나도 변해 있으리라......
그리고 노 선생님 동생 분 집에도 역시 스케치 한 장과 판화 한 장을 드렸더니,
표정이 밝아지며, 다음에도 베를린에 오면 연락하라고 하던데,
글쎄, 내가 다음에 베를린에 와서도 이 집 신세를 질까? 아닐 것이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음에도 그럴 순 없으니까.)
그리고 잠을 잤는데, 편히 자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샤워까지를 하고 앉아 있다.
오늘, 베를린을 떠나나?
음울한 날씨 만큼이나 재미없는 도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겐 수많은 얘기를 안겨준 도시, 다시 오게될지는 모르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오고 싶지는 않은 도시......
그 사이 요한의 집에 편지 두 통이 와 있다고 하니, 받으러 가야 하는데......
98. 9 . 15
*
이제 모든 일을 끝냈고, 나는 버스 터미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코펜하겐'에 가는 버스를 타면 나의 파란만장했던(?)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끝난다.
흐린 날의 서늘한 바람이 사람을 움츠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시애틀의 H에게 엽서를 부쳤는데,
'이 전화 카드로는 누구에게 전활 한다지? 돈이 몇 푼 남아 있을 텐데......'
이제부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말자. 그리고 버스에 몸을 맡겨 시간에 모든 걸 싣자.
그러면 보고 싶은 G를 보게 된다.
근데, 그녀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어떤 인연으로 만나 어떻게 우리의 생을 살아가다 마감할 것인가.
간간이 햇빛이 비친다.
힘이 없는 희미한 햇볕이 오후 2시를 비친다.
안녕, 베를린!
1998 . 9. 15 . 14:30
*
베를린은 과거의 도시가 되었고, 나는 이제 독일도 떠난다.
'로스톡(Rostock)'이란 곳으로 버스는 달렸고, 커다란 배 속으로 들어갔다.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배의 선실로 옮겨 탔고, 곧 배가 출발했다.
그래, 나는 지금 독일을 떠난다는(뭔가 해놓고 가지 못해 비통하다거나 아쉬움) 사실 보다도, G를 만난다는 기쁨에 더 들떠 있다.
오후 6시다.
반시간 쯤 늦게 도착했던 버스는 꽤나 덜컹거렸으나, 배는 미끄러지듯 얌전하게 움직인다.
버스의 안내방송에서는 여권검사가 있으리라고 했지만, 무슨 일인지 생략됐다.
안개가 낀 듯한 바다에는 백조와 철새들이 떠있다.
그렇담, 여기는 바다인가, 아닌가......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리고 배는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바다는 '발틱해'인가?
내 기록(일기)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아쉬움이 크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에겐 ‘예감’이란 게 있기는 한가 보다.
아니면 부모 자식 간에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육체의 끈이 연결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가 느리기 때문에 아마 그 다음 날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 뒤,
G가 아직은 일할 시간이어서 나를 마중나오지 못한 틈에, 두어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아주 느긋하게),
한국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가(왜 그런지 그 전날 밤 버스에서 악몽을 꾼 것 같고, 심한 몸부림을 친 건 기억난다.), 안 받으시기에, 30분 쯤 뒤에 다시 걸었는데 또 안 받으시기에,
형님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아!
어머니가 바로 어저께(그 전 날), 쓰러지셔 지금 병원 ‘응급실’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정말 정신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운명인가 보았다.
물론 그 얼마 뒤 정신을 가다듬고 G를 만나기까지는 했지만, 그녀와 몇 년 만에 만난 회포를 풀기는커녕 바로 코펜하겐에 있는 ‘000 에어라인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가장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항공편을 알아보는 등,
그리고 내 위급상황을 설명한 결과 그 쪽의 특별 도움으로,
나는 코펜하겐에서 네 시간 정도 머무는 것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물론 직항도 아닌, 싱가폴을 경유하는......
어차피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미 베를린을 떠나오면서 ‘떠돌이’의 모습이었기에, 그리고 떠나온 몸이기 때문에 그대로 비행기로 바꿔타고 가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어머니와의, 그리고 나와 G라는 여인과의......
이 일을 하면서 돌이켜 보면,
'그 때(베를린 시대) 뭔가를 하기 위해 더 처절하게 싸웠어야 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내 지난 기록을 이제와서 합리화시키거나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더욱이, 딴에는 스스로도 '최선을 다 했다'고 하고는 있지만(기록상으론), 지금 보니,
'그거 해놓고 힘들었다고 귀국해놓고(물론 어머니의 위급상태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쳐도) 무슨 최선?' 하는 자아비판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차라리 현지에서 죽드래도 더 버티고 싸웠어야 했다!'는 게 인생을 더 살아온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내가 결코 강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재확인한 꼴이다.
곧, '나약한 사람'이라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는 '합리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