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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온은 고려 우왕 때 등과하여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으로 정권을 잡자 이조좌랑에 올랐으며 단양군사와 함양군사를 지냈다.
회군 때와 개국 때의 공으로 정종2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흥려군(興麗君)이라고 불리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 때 양주목사를 했는데 태종이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외척을 배척할 때 사촌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게 되었다.
남편이 사촌오빠들과 함께 죽자 민씨 부인은 아들3형제를 데리고 한양을 떠나 전남 장성군 황룡 맥동 마을로 피신하여 정착하게 된다.
언제부터 울산 김씨가 장성에 세거(世居)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본래 울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로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려 할 때 마의태자와 함께 말렸다고 한다
<명정齋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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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성(鶴城)이라는 지명이 울산에 있고 고려 태조 때 울산의 옛 이름이 흥려부(興麗府)였다가 조선 태종 때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아 울산에서 본관이 유래된 것 같다.
울산 김씨의 14세조 김환(金環)이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광록대부(三重大匡光祿大夫)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고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기는 했지만 17세조 김온(金穩)까지 분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울산 김씨는 김온을 중시조로 삼고 그 후손들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장성군 황룡면 맥동 마을에 터를 잡은 민씨 할머니는 아들3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큰아들 김달근(金達根)은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을 지냈고, 손자 김률(金律)은 문과에 급제 군수를 하였다.
河西 김인후는 둘째 아들 김달원(金達源)의 4세손이다. 울산 김씨(金氏) 발복지로 하서 김인후 선생을 배출한 명당으로 알려진 여흥민씨(麗興閔氏) 할머니 묘다.
나 . 여흥 민씨 할머니 묘
1 . 위치 : 전북 장성군 북이면 명정마을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인터체인지에서 고창 가는 894번 도로를 따라 약1Km정도 가다보면 좌측으로 달성저수지가 나오고 주유소 옆 삼거리에서 명정 마을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1999년 6월22일 흐렷던 날씨도 개이고, 바람없는 더운 날씨라 마을 입구에 아담한 노인정이 나그네의 발길을 유혹한다. 물도 얻어먹고 촌노와 마을이야기며, 민씨 할머니 옛 이야기도 잘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벌써11시다.
마을로 들어서니 명정재(鳴鼎齋)라는 재실과 함께 정부인여흥민씨묘(貞夫人麗興閔氏墓)가 보인다.
묘 좌측에는 남편 김온의 단(壇)이 있다.
이 묘는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국인 복부혈(覆釜穴)로 유명하다. 장성지방에서는 민씨 할머니가 직접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았다는 이야기와 河西 선생의 조부가 당대의 유명한 지관 부인을 유혹하여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묘소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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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 얽킨 전설>
하서 선생 조부는 당대의 유명한 박 풍수에게 공을 들이며 명당을 하나 잡아달라고 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온갖 선물을 장만하여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본래 지관은 조선 팔도를 다 돌아다니는 직업이므로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 일쑤였으므로 집을 찾아가도 못 만나기가태반이었고 만난다고 해도 지관은 좀처럼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하서 선생 조부는 지관의 부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단한 미남이었던 그는 여러 번 지관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외롭고 쓸쓸한 지관부인과 친근한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지관 부인은 남편이잡은 자리를 알아내서 알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
오랫동안 출타했다가 돌아온 남편에게 부인은 "당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가 아무리 명당이라도 내가 알고 있어야 만약 당신이 먼저 죽더라도 묘를 써줄 것 아니냐"며 대명당 자리를 물어보자 지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부인에게 자신만 알고 있었던 명당의 위치를 말해주었다.
지관이 또 명당을 잡기 위해 멀리 길을 떠나자 부인은 하서 조부를 불러 복부명당의 위치를 전해주었다. 하서 조부는 바로 민씨 할머니 묘를 이장하였다. 지관이 먼 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명정 마을에 있는자신의 신후지지를 확인하러 들렸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묘를 써버린것이아닌가?
지관은 탄식을 하면서 "세상에 나말고도 천하 명풍이 또 있었구나!"하면서 감탄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2 . 형기론
이 묘의 주산은 방문산(方文山, 606m)으로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다.
방문산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전북 장수 육십령을 지나 영취산에서 금남호남정맥을 분맥하고 이 산맥은 다시 진안 마이산을 지난 다음 주화산에서 북으로는 금남정맥을 남으로는 호남정맥으로 분맥한다.
호남정맥은 임실 경각산(659.6m)과 완주 오봉산(513.2m), 정읍 왕자산(444.4m), 내장산(763.2m)을 거쳐 장성 백암산과 담양 추월산, 광주 무등산, 장흥 사자산, 승주 조계산으로 이어져 광양 백운산까지 이어지는데 방문산은 내장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맥으로 백양사 뒷산인 상왕봉을 거쳐 호남고속도로 하행선 호남터널 좌측 변에 있는 입암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만든다.
<청룡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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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명 장성 갈재라고 불리는 노령에서 크게 과협하여 호남터널 오른쪽에 철모와 같이 생긴 태음 금성체 산형인 방장산(方丈山, 733.6m)을 제일성봉(第一星峰)으로 기봉하고 다시 행룡하여 처음으로 높게 솟은 산이 방문산이다.
방문산은 고창의 주산이며 남쪽으로는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 영광, 함평, 나주, 무안, 목포 유달산 까지 이어진다.
주룡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떠나온 태조산인 입암산을 바라보고 가다가 명정 마을에서 넓은 들을 만나 행룡을 멈추고 기를 모아 혈을 결지하니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 되는 것이다.
3 . 이기론 :
태조산인 입암산에서 낙맥하여 갈재에서 과협한 다음 제일 처음 기봉한 제일성이 方丈山으로 커다란 솥이나 종을 엎어놓은 듯한 무곡 금성체다.
방문산에서 내려온 용이 과협과 기복, 박환, 개장, 천심, 굴곡 위이 등 수많은 변화 과정을 해오면서 억센 기를 모두 정제 순화시킨 다음 마지막으로 기를 모으기 위해서 결인속기(結咽束氣) 후 커다란 혈장(穴場)을 만들었으니 이 모습이 제일성과 또 주산과 같은 형태의 覆釜形이다.
혈은 기가 뭉친 것으로 복종형(覆鐘形)이나 복부혈(覆釜穴)의 경우 그 정상에 기가 집중된다.
복부혈은 귀(貴)도 하지만 특히 부(富)가 큰 혈이다.
풍수지리 고전인 금낭경 취류편에는 형여복부(形如覆釜) 기전가부(其賞可富)라 하여 형상이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은 그 정상에 혈이 있고 큰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용맥의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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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 앞에 펼쳐진 명당은 광활하면서도 평탄 원만하고 여러 골짜기에서 나온 물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달성제 저수지를 만들었다.
내청룡 내백호는 혈을 환포해주고 외청룡은 회룡고조의 본신 대간룡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로 혈을 넓게 감싸주고 있다.
외백호는 혈을 가깝게 싸주고 있어 이 혈이 장손보다는 지손, 아들보다는 딸, 귀보다는 부가 더 빨리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장 아래에는 샘물이 있는데 진응수(眞應水)로서 대혈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흠이 있다면 안산이 조금 멀고 뚜렷하지 못하며 청룡 백호가 혈 앞까지 완전하게 감싸주지는 못했다
안산 너머 조산은 입암산으로 석산(石山)이지만 혈의 조종산(祖宗山)에 해당되기 때문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坐向은 坤坐艮向에 左水到右하고, 絶向胎流 3파의 甲破라 88향법으로 문고소수(文庫消水) 를 하였으니, 용진혈적(龍眞穴的)에 문고소수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필출(必出) 총명수재(聰明秀才)한 자손이 출생하여 특출문장하고 富와 貴를 다한다고 하는 吉한向이다.
특히 甲卯方의 관모사가 이 집안의 부귀공명을 촉발했을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명정재(鳴鼎齋)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 禪雲寺를 향해 방장산을 넘으러니 천둥과 쏘나기가 갈길을 잠는다. -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