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성경적 접근>
성경 시대와 저자들은 꿈이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로 생각하였다. 중요한 꿈들에 대해 풀이하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꿈의 해석은 하느님이 직접 개입과(창세 28,12), 또는 천사가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마태 1,20). 성조 시대를 다루는 오경 특히 창세기에는 다수의 꿈 사례가 제시된다. 성조 야곱과(창28,12) 요셉(41-45장)의 꿈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탈출기에서 지도자 모세는 환시와 꿈을 통해 사명을 수행하였다(민수 12,6). 이러한 꿈은 판관 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 기브온 산당의 유명한 솔로몬 꿈으로 이어진다(1열왕 3,5-15). 왕조시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에 의한 분단과 멸망 해방의 풍전등화 같은 과도기를 거치며 예언 문학이 대세를 이룬다. 이 시대 여러 예언자 중에서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대표적인데 크게 두 부류의 예언자들로 구분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는 한 안전하고 평화롭다(예레 6,14)고 하며 거짓 환시, 엉터리 점괘로 오류와 거짓말을 일삼는 무리였다. 그들은 하느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꿈을 꾸었네, 꿈을 꾸었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조와 사람들을 거짓의 사람이라고 하며 비판적 태도를 보인다. 망국 시대 유배지에서 활동한 에제키엘은 꿈보다 환시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하였다. 꿈에 대한 거짓 예언자들의 일탈 행위로 유배 후에는 예언 문학이 약해지고 지혜문학이 등장하였다. 코헬렛도 꿈에 대해 비판적이다(5,2;5,6). 가장 부정적인 입장은 집회서 다음 구절이다. “지각없는 사람은 거짓 희망을 지니며 꿈은 미련한 자를 흥분시킨다. 꿈에 집착하는 자는 그림자를 붙잡고 바람을 좇는 자와 같다. 꿈의 환시는 현실의 반영일 뿐 제 얼굴을 자기가 보는 것과 같다. 더러운 것에서 어찌 깨끗한 것이 나오고 거짓에서 어찌 참이 나오겠느냐? 점과 징조와 꿈은 헛된 것이다. 마음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환상을 본다. 그것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리면 거기에 마음을 주지 마라. 꿈은 수많은 이들을 속이고 그것에 희망을 품는 자들을 몰락시켰다.그런 기만이 없어야 율법이 성취되고 지혜는 진실한 이의 입에서 완성된다.” (집회 34,1-8). 집회서는 꿈이 거짓된 것, 헛된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몰락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보내신 것” 꿈의 해석은 예외이다. 이것은 꿈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계시의 권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꿈은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신약시대까지 이어진다. 구원역사의 종말론적 새로운 세계의 예언하는 구약의 다니엘서 신약의 요한 묵시록은 꿈과 환시의 이미지들로 텍스트이다. 특히 마태오 복음은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유년 시절과 재판을 전통적인 꿈을 도구로 하여 제시한다. 기원후 90년경에 쓰인 유다 서간에서는 꿈이 신랄하게 비판되고 있다. “저 꿈꾸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몸을 더럽히고 주님의 주권을 무시하며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합니다” (1,8).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계시의 도구로 예언과 꿈과 환시가 드러나지만 두드러진 도구는 성령의 활동이다. 2세기 극단적인 성령 운동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4세기에 교회는 박해에서 해방되고 로마 제국교회로 인정되면서 교계와 교권 중시하는 교회가 되었다. 성 예로니모는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꿈과 환시보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했다.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험을 중시하는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게 됐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신앙이 밀려나고 이성이 중시되자 꿈에 대한 문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다.
신학적 접근>
꿈에 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다. 융은 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강조했다. 융은 인간 정신의 그 영역은 신성한 영역으로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그의 이론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영의 힘이 있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로마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꿈으로 드러난 의식 무의식의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 영적 성화의 이상과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는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 운동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를 통하여 자신과 세상의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입력:최마리 에스텔 수녀/2025년 2월 20일;22:15
참조: 배본철,크리스천투데이,2011년 ‘꿈 해석에 책임있는 신학적 평가해야’
허영엽 신부, 꿈,평화신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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