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의 첫 사랑과 첫 헌신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 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는 복음의 첫 씨앗이 떨어진 복음의 기착지이다. 174년 전 귀츨라프 선교사(1803∼51)가 미지의 땅 조선에 대한 사랑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 땅에 찾아와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한 곳이다. 이는 한국의 첫 순교자인 토머스 선교사의 선교사역보다 34년 앞선 일이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53년 앞선 것이다.
대천항에서 하루 3회 왕복하는 페리호를 이용해 고대도를 대면할 수 있었다. 고대도는 여의도 면적의 9분 1 정도인 작은 섬이다. 주변의 장고도 삽시도 원산도 등과 달리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섬이다. 자동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흔한 식당 하나 없다.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 고대도교회와 전교생이 6명인 초등학교,보건진료소,경찰초소,여객터미널 외엔 60여 가구의 민가뿐이다. 바람이 거센 선착장에 내려서서 174년 전 이곳에 정박했을 거대한 배 한 척을 떠올렸다.
“뿌∼웅”
1832년 7월26일. 고대도 안항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타났다. 이 배는 대만과 한국,일본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통상개척선이었다. 선장 린제이는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인 귀츨라프 선교사를 통역관 겸 의사로 임명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이 항해를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절호의 기회로 보고 한문성경과 각종 물품을 마련했다. 고급 천과 망원경,유리그릇,사자무늬 단추,성경전서,지리천문학 과학책 등을 준비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귀츨라프 선교사가 이곳을 방문했던 것은 작은 섬이었지만 고대도가 배를 정박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도는 인근 여러 섬들의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수군들이 관리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에 이곳에 베를 정박하도록 허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귀츨라프 선교사는 25일 동안 섬에 머무르며 조선 국왕에게 통상청원서를 제출했으며 주민들에게도 전도문서와 성경책을 나눠주며 감자 재배법을 가르쳤다. 어학에 탁월한 자질이 있던 그는 짧은 체류 기간에 주민에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직접 한글을 배워서 이듬해엔 중국 선교잡지를 통해 한글 자모를 소개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통상을 불허하고 떠날 것을 요구하자 뒷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훗날 그날의 심경을 ‘조선서해안항해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에 뿌린 하나님의 진리가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조선 백성을 은혜롭게 방문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이 보잘 것 없는 시초까지도 축복하신다고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조선에 곧 먼동이 터 좋은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선착장에서 고대도에서 하나뿐인 교회의 십자가 탑을 찾기는 쉬웠다. 이 십자가탑은 마을에 등대가 세워지기 전까지 어부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고대도는 처음 복음이 전해진 곳이지만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귀츨라프 선교사가 다녀간 150년 후였다.
1982년 4월30일 곽길보 목사에 의해 세워진 고대도교회엔 그동안 8명의 목회자가 사역했고 현재 김국중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이 교회는 2001년엔 제86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신 총회에서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교회로 지정됐고 2003년 10월24일 기념교회 기공예배,2005년 4월19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 고대도교회를 방문한 뒤 뒷산에 있는 고대도선교 기념교회를 찾았다. 17평 남짓한 옛 교회는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피아노 1대와 강대상이 전부지만 아직까지 교회학교 수련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1803년 독일 발트해 연안 포메라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 의사이자 최초의 중국선교사로 한자 이름은 곽실렵이다. 성경번역자인 모리슨의 중국선교담을 듣고 중국 선교를 결심한 그는 네덜란드선교회에서 훈련 받은 뒤 영국선교회부터 파송을 받아 50여개의 섬과 나라에서 전도했다.
한반도의 고대도를 비롯해 서해안과 제주도를 거쳐 일본 해안까지 선교여행을 다닌 그의 흔적은 홍콩의 ‘귀츨라프 스트리트’,중국 조우산 열도의 ‘귀츨라프 섬’,일본 아이치현에 있는 기념비,한국 충남 보령군 원산도의 기념비 등에 남아 있다. 그가 전도한 수많은 믿음의 후예들이 지금도 아시아 곳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목사, 의사인 귀츨라프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1832년 7월 17일 이였습니다.
처음 황해도 장산곳에 닻을 내렸으나
전도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이틀 후에 그곳을 떠나
1832년 7월 23일경에
충청도의 작은 섬 고대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쳤고
번역하도록 하였으며
처음으로 감자의 종자를 전했고
재배법을 가르쳤으며,
포도주 담그는 법, 포도 재배법,
그리고 환자 60여명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25일간 채류 하고 조선을 떠나기 전
많은 성경을 나누어 주었고 복음을 기원했습니다.
(귀츨라프 선교사의 행적은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번역시킨 귀츨라프가 중국 선교잡지 Chinese Repository 1832년 11월호에 소개한 한글)
* 1832년 동인도 회사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 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로 린제이를 임명 하였습니다.
린제이는 중국 선교사 모리슨의 추천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귀츨라프 목사를 통역관으로 동승시켰다고 합니다.
동인도 회사가 준비한 “암 허스트경호”는 1천 톤급 군함으로
통상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는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이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절호의 선교 기회로 여겼다고 합니다.
조선실록에 의하면
홍주 목사 이 민희와 수군우후 김 형수를 만나
조선을 방문한 목적을 말하고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다른 선물과 성경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뒤 통상을 거절당하고
육지에 들어가지 못한 체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토마스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강 변에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다 순교한
1886년 보다 34년 앞선 일이고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인천에 상륙한 1885년보다 53년 앞선 일입니다.
카톨릭 선교사인
불란서 신부 모방이 내한한
1836년보다 4년이나 앞선 일입니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써
한국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충청도의 작은 섬 고대도는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순례지로 알려져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160년전 고대도에 첫 '복음전령' -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 귀츨라프
오전 9시30분 서울역을 떠나는 장항선 열차. 드문드문하던 승객들이 영등포역에서는 자리 를 거의 다 메웠다. 차창 밖은 오늘따라 안개로 뿌옇다.
1백60년의 시간을 거슬러 서해안의 한 조그만 섬을 찾아가는 길. 마치 타임터널을 지나는 느낌이다.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와 고대도(古代島).
정확히 1백59년전 한국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와 그가 한달간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던 섬이다.
암허스트호 통역겸 의사
고대도에서 바라본 앞바다
대천항서 출발한 70t급 연안여객선 한일호는 원산도 안면도 영목을 경우, 1시간만에 목적 지 고대도에 닿는다. 섬 등성이에 우뚝솟은 십자가 탑이 첫눈에 들어온다. 1백여 가구에 주 민 4백여명. 면적 26만평. 보령군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소득 3백여만원. 봄 새우잡이, 가을 멸치잡이 등이 주업으로 소득이 꽤 높다.
국민학교 보건지소 각 1곳, 10년전 낙도선교회의 주선으로 곽길보 목사가 개척한 고대도교 회(지금은 이인환목사 시무)가 있다.
1832년7월23일, 이섬 앞바다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천t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타났다. 당시 고대도 사람들의 눈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로 보였으리라.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한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 관민(官民)의 통상에 관한 관심을 살필 목적으로 중국 연안을 거처 한국까지 온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선교사 귀츨라프가 통 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하고 있었다.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가면 그가 남긴 암허스트호 항해기(영문)을 볼수 있는데, 조선 서해안 기사는 극히 적은 부분이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엿볼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없고 개발도 안되었다…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
당시 조선은 순조(純祖·재위 1800~34) 통치 말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수십년간 엄청난 박해를 받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였다. 정치는 문란해지고 민생 이 도탄에 빠져 각종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항해기도 "이 왕국은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통치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조공을 바치며 중 국에 복종하여 왔다. 중국은 이 나라의 여러 파벌싸움을 조장하였고 이로써 이 왕국은 미개 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대도에 정박한 귀츨라프 일행은 홍주목의 관리인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국왕에게 통상슷원 서한과 유리그릇 옥양모 모직물 등 선물을 보낼 수 있었 다. 이 선물 중엔 성서 한질과 전도문서 등도 들어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했다. 배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전도문서를 나누어주기도 했고 지방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관리들도 호의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주민들은 국법에 어긋난다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 았다. 피부과 안과 전문의사였던 귀출라프는 주민들에게 약도 나누어주고 받겠다는 사람에 게는 전도문서를 곁들여 복음서를 주었는데 관리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이를 두고 귀츨라프는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 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적고 있다.
또 그는 주민들에 대해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이를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걸 질투하리만치 편협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한 것 같으나 이는 정부의 강요 때문이며 일대일로 대할 땐 누구나 인정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츨라프 일행이 천주교 신자로 추정되는 '양이'라는 사람과 만난 일화가 당시 상황을 단 적으로 보여준다.
양이는 그들에게 한글 자모를 써주었고 귀츨라프는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어 그것을 한글 로 베끼게 했는데 양이가 베끼면서 자꾸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한 것으로 보아 관헌에게 발각되면 목이 달아난다는 암시인 듯 했다.
천주교신자 '양이' 만남
이 때 천주교 신자들은 귀츨라프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여러번 물 었다. 천주교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충청도 해안에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빛을 갈망했던 우리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인다.
8월초 한양에서 회신이 올 때가 임박하자 귀츨라프 일행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는 점차 굳 어져 갔다. 8월9일 ,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며 중국 황제의 허 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귀츨라프 등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관리들로 부터 약속받은 식량 등을 공급받은 후 결국 이 미지의 나라 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한달 남짓한 귀츨라프의 복음사역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한양특사 통상불가 통보
귀츨라프의 한국사역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한 당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날 바로 1천만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암허스트호의 조선방문 목적에서 볼 때 한 개인으로서의 귀츨라프는 본의 아니게 서구의 동양침략 전위 역할을 일부 감당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귀츨라프가 아 닌 복음사역자로서의 귀츨라프의 염원은 오늘날 여전히 귀 기울여 볼만하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