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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28)
에브라임의 교만과 기드온의 겸손
본문 : 삿7:24-8:3
<숫자를 의지하지 말라>
기드온과 남은 300명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횃불 승리 작전’을 완벽하게...
(기습적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미디안의 13만 5천명은
나팔소리와 항아리 깨지는 소리,
환하게 불타는 횃불과 고함 소리에 놀라,
큰 혼란에 빠졌고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불과 300명의 용사만 가지고도
13만 5천명의 대군을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이긴 것입니다.
숫자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많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더라도
깨어 기도하고 준비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드온>......
남은 미디안 군사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벧 싯다’를 거쳐서 요단 강
나루터가 위치하고 있는
‘아벨므홀라’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미디안은 겨우 1만 명만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자들을 보내
그들을 추격할 것을 명합니다.
<24-25절>
24절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절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사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주역을 맡은 지파는 므낫세 지파입니다.
기드온도 므낫세 지파입니다.
므낫세 지파를 중심으로 당시 미디안으로 인해
피해가 극심했던 납달리, 스블론,
아셀 지파 사람들이 연합하여 싸운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산악지대에 살고 있었기에...
미디안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디안 연합군의 패잔병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로’(나루터)를 찾아
에브라임 지파가 점령하고 있던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기에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려면
에브라임 지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
사자들을 보내어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그 잔당들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기드온의 요청을 받아들여
곧바로 수로를 점령하고....
미디안 연합군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처형한 장소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오렙은 ‘바위’에서,
스엡은 ‘포도주 틀’에서 죽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바위’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드린 예물을
번제로 드린 장소이고(첫 번째 표징),
‘포도주 틀’은 기드온이 집안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틀입니다.
물론 똑같은 지점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서 이제 역사가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들을 죽인 증거로 그들의 목을 잘라
기드온에게 가져왔습니다.
이로써 미디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의 은혜로 대승을 거두고
끝나게 되었습니다.
<에브라임의 교만>.....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에게 따집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하고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겨우 패잔병 따위나 소탕하는 일을
하게 된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마 기드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기드온의 공로를 칭찬하는 것이 맞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그들이 몰랐을까요?
기드온이 나팔을 불고 군사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미디안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정말 참여하기를 원했다면
아마 자신들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자원하여 출병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놓고 다 이긴 싸움에 숟가락을 얹어놓고
‘자신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브라임 지파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브라임 지파는 강성한 지파였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늘 과시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던 지파였습니다.
항상 자신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가장 큰 지파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나눌 때
에브라임 지파가 찾아 와서 말하기를 ....
“우리는 큰 민족인데 어째서 한 제비,
한 분깃만 주십니까?”(수17:14)라고 따졌습니다.
사사 입다에게도 기드온에게
한 똑같은 불만을 나타내고 따지고 시비하다가....
결국은 내전으로까지 번져서
4만 여명이나 죽는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삿12:1-6).
그리고 왕상12장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
에브라임이 10지파를 선동해서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갈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지파라면
권리만을 주장하기 보다는
그에 합당한 책임을 먼저 감당해야 옳습니다.
더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더 다른 지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왜 우리가 가장 큰 지파인데
우리를 대접해 주지 않느냐고
불평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의 교만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분명히 기드온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조국의 위기에 함께 할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러나 에브라임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뒤에 있다가...
다 이긴 전쟁에 참여하여
왜 자신들을 대접해 주지 않느냐고
권리나 주장하는 꼴입니다.
교회에는 항상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숨은 자리에서 말없이 희생하고
헌신하기 보다는 ....
공연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대접받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작 위기의 순간에
헌신하는 것은 외면하고 .....
논공행상을 할 때면 ....
나타나 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
누구 허락 받고 이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에브라임처럼 자신의 힘을 권력 삼고
할 일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병들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말없이 순종하고 헌신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당장 안 알아줄지 몰라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 사이의
미묘한 경쟁심리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는
같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할아버지 야곱이 축복기도를 할 때에
장자 므낫세와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바꾸어 얹고 안수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차자인 에브라임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두 형제 지파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심리가 작용하였습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로서
가나안에 정착하는데 큰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드온이 미디안을 몰아내자 ...
주도권이 미디안 지파에게로 넘어갈까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릇된 경쟁의식의 표출이었던 것입니다.
선의의 경쟁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된 경쟁의식은
오히려 공동체를 파괴하고 불화를 가져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잘못된 과대한 경쟁의식이 생긴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상기하면서 서로 돕고 칭찬하고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안에
잘못된 경쟁의식으로 서로 다투는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빌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2:1-4>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라기는 우리 금산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성도를 높이 여기고
늘 섬기는 자세로 헌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드온의 겸손>.....
그러면 에브라임 지파의
갑작스러운 불평에 기드온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2-3절>
2절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절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기드온의 모습은 우리들의 귀감이 됩니다.
만약 이때 기드온이 발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은 그런 에브라임의 불평을
비유를 통해 누그러뜨렸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
즉 상품 가치가 없는
마지막 수확하는 포도인데....
그 한물 간 것이 아비에셀
(아비에셀은 기드온의 집안)의 맏물포도,....
즉 이제 막 시작된 맛있고
상품가치가 좋은 포도보다 훨씬 낫다는 겁니다.
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3절)고 말함으로
그들의 노여움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사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삭줍기만 하였을 뿐
실재로 처음부터 헌신한 사람은 기드온입니다.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드온이
이렇게 통 큰 양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현실적으로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에브라임 지파는
남쪽의 유다 지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강성한 지파입니다.
그들하고 맞서기에는
아직까지 기드온의 힘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드온이 힘이 약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큰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지파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그들이 기드온의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노여움을 풀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의 겸손한 자세 대문에
노여움을 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센 말로 받아쳤다면
더 큰 갈등을 가져올 수 있었기에
조심한 것입니다.
겸손한 자세를 취함으로
명예보다 화평을 택한 것입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도 기드온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불평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기드온의 자세 때문입니다.
온유한 말, 겸손한 말이
천 냥 빚을 갚는 것입니다.
이로써 에브라임의 불평을 무마하고
갈등을 무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긴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믿음이 오늘 기드온의 겸손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 기드온의 자세는
오늘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공로나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설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감추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원래 은혜라는 말은
‘값없이, 공짜로’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공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엡2:8-9>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더 풍성케 하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이
믿음생활이요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며
복음을 전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에
그의 이름이 사울이었습니다.
'큰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가 굉장히
큰 존재로 여기며 폼 잡은 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 앞에 섰을 때,
그 전능자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울(작은 자)입니다.
바울은 “나는 모든 성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낮아지고 겸비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
이 감격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또한 이 귀한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는 에브라임 지파의
부끄러운 모습을 봅니다.
동시에 기드온의 겸손한 모습을 봅니다.
누구를 본받으시겠습니까?
자기의 힘을 과시하여
여러 가지 분쟁을 만들어 내는
에브라임 지파의 뒤를
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명예보다 화평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철저히 낮아지는 ..
기드온의 모습을
저와 성도님들의
롤 모델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
항상 겸손하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