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교(구산초등학교/구서분교)에서 ㅡ 제말장군의묘까지 해양관광로(지방도1002번)
보행로도 없는 도롯길 2.4km 걷습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마전리 구산초등학교, 구서분교 앞을 지나는 해양관광로(지방도1002번)
마진교에서 남파랑길 11코스를 시작 합니다
오늘 걷는 남파랑길 출발점 마산합포구 구산면 마전리 마진교
마진교에서 ~ 남아교차로까지
남파랑길 11코스 안내도
오늘 출발점을 뒤돌아 보고~
마진교에서 제말장군묘까지 보행로가 없는 해양관광로(1002번 지방도로) 2.4km를 걷습니다
4월 24일 마산합포구 구산면 유산리에서 구산면 마전리로 넘어왔던 유산고개 입니다
4월 24일 걸었던 남파랑길 유산고개 > 구산초등학교(구서분교) > 마진교 입니다
마산합포구 구산면 마전리에서 마산합포구 진동면 다구리로 넘어 가는 면 경계선 입니다
해양관광로(지방도1002번)를 걷고 있습니다
아홉수, 아홉수, 아홉수고개~ 사전에 나오는 그 아홉수일까??
아무튼 아홉수고개를 넘고 있습니다
해양관광로(지방도1002번)에서 바라본 다구항
해양관광로(지방도 1002번)에서 바라본 다구항과 남파랑길
해양관광로 따라 아홉수고개를 넘어 내리막을 내려오니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제말장군 묘 안내판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의병장인 가계 제말(?∼1593) 장군의 묘소에는
금석문과 상석, 양 두 마리의 석수(石獸) 그리고 좌우 망주석(望柱石) 입니다
제말장군묘의 금석문 앞면에는
우 행에는 : 유명 조선국 선무공신
중앙에는 :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좌 행에는 : 행 성주목사 시충장제공지묘
제말장군의 묘와 상석 그리고 금석문 입니다
상석은 차례를 지낼 때 제수음식을 차려놓는 곳이기도 하지만 영혼이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이기도 합니다
제말장군의 묘비 전면에는 금석문이 새겨저 있습니다
측면에는 만력 이십사 정유 십이월 일립
(萬曆貳十四丁酉十二月日立)
이라 새겨져 있어 1597년(선조 30)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웅천·김해·문경 등에서 대승을 거둬 선조 26년(1593)
성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성주 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하다 그 해에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그당시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내륙에는 곽재우(郭再祐), 제말(諸沫)이라 하였습니다.
정조16년(1792) 나라에서는 그의 관직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높여 주었으며,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그의 조카 제홍록과 함께 나라에 충성하였다 하여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명하여
쌍충비문을 짓게 한 후 성주와 진주에 쌍충각(雙忠閣)을 세워졌습니다.
순조 12년(1812)에 장군의 충의에 비해 그에 대한 예우가 미약함을 애석히 여겨 그의 공이 천추에 빛나도록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가 다시 내려졌습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성주 충절사와 고성 운곡서원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영혼이 외출을 하였다가 몸을 찾아 올 때 멀리서 위치를 알려주는 역활이 망주석(望柱石)이라 합니다
천성적으로 순한 양은 이승을 떠난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며 말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한답니다
목사(牧使) = 고려 중엽 이후와 조선시대 관찰사 밑에서 목(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外職) 문관으로
목(牧)은 큰 도(道)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관계가 있는 지방은 작더라도 목으로 승격시켰다.
목사는 신라 때의 군주(軍主)와 그 직위가 같으며, 보통 병권(兵權)을 가졌다.
고려 때는 전국 12목에 목사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에 여주, 파주, 양주의 3목
충청도에 충추, 청주, 공주, 홍주의 4목
경상도에 상주, 진주, 성주의 3목
전라도에 나주, 제주, 광주, 능주(綾州:화순군 능주면)의 4목
황해도에 황주, 해주의 2목
함경도에 길주 1목
강원도에 1목
평안도에 안주, 정주의 2목 등
모두 20명의 목사를 두었다.
목사(牧使)는 관찰사, 부윤(府尹)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다음 가는 지방관이다.
1895년(고종 32) 부 ·목 ·군 ·현의 명칭을 군으로 개편하면서 없어졌다.
제말(諸沫)[1552~1593]은 1583년 무과에 급제하고 총부수문장(摠府守門長)을 역임하였다.
신장이 8척이나 되는 거구이면서도 몸이 날래어 비장군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조카 제홍록(諸弘祿)을 비롯한 67명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웅천, 김해, 정암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곽재우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고령, 경북 성주가 중요한 군사
지역으로 경북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주둔해 있던 왜군을 격파했다. 이후 경북 성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조카 제홍록과 함께 제씨 쌍충지(諸氏雙忠趾)를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장이었다가 1812(순조 12)에 받은 충의(忠毅)로 바뀌었다.
제말장군묘역에서 바라본 다구항 입니다
지금부터 제말장군묘에서 다구마을 농로와 해안길을 걸어서 다구항으로 갑니다
다구항 앞 죽도 입니다
남파랑꾼들이 단체로 오른쪽으로 걷고 있는 모습 입니다
시골 옛집 토담을 지나니 감나무 그늘아래 사각정자가 있군요
옛 시골 동네에서 공동으로 사용하였던 우물 입니다
삼각형 두레박, 사각 두레박, 원통형 두레박에 기다란 외줄을 매달아 물을 퍼올렸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나 어릴적엔 우물가 옆엔 빨래터가 있었는가 하면, 미나리꽝도 있었지요
그때가 1950 ~ 1960년대였지요
아~ 아득히 멀어저간 시절이군요
지금은 마실 수 없는 우물이 되었군요
옛날엔 마을 아주머들이 모이면 누구누구집 아저씨 밤마다 어쩌구저쩌구 하며 정보교환을 하던 장소였지요
마을동네 공동우물을 뒤돌아 보고~
마을 공동 우물을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걷습니다
마을 공동 우물을 뒤돌아 보고~
다구리 마을의 노거수와 정자쉼터
해안가 이정표 입니다
다구항 앞의 죽도 입니다
다구항
다구항 해안가에서 바라본 제말장군의 묘와
지나온 다구리 마을의 푸조나무
커피, 굴구이, 라면 등등 먹거리를 제공하는 남파랑길 쉼터가 다구항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하마비(下馬碑)란 석비가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 입니다. 각 궁궐의 정문 밖, 종묘 입구에 세웠으며, 성균관을 비롯한 각 지방의 문묘 밖
홍살문에 하마비를 세웠습니다.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어허~ 이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수구려야 겠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허리가 안좋은데, 허허참~
다구항에서 광암해수욕장까지 걷는 남파랑길
그네가 매어저 있네~
남파랑꾼 대원 23명 중 젤 꼴찌로 걷고 있는데, 요기서 후미팀이 끼니를 때우고 있구나~
옆에는 위에서 아래로 추계추씨 여럿 무덤이 있는 곳에서
나두 배낭에서 준비한 김밥 한줄(2,500원)을 꺼낸다
디저트로 대박막걸리(1,000원)를 마신다
추계추씨 제실 앞을 지난다
제실 뒷편으론 추계추씨 조상 묘가 있는 모양이다
아까~ 끼니를 때우던 그곳~
일행이 제실 앞을 지나고 있습니다
추계추씨 제실 앞을 지나는 남파랑길
광암해수욕장 광장
남파랑길11코스 2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