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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금타金陀대화상 열반재일 법문
* 태안사에서 3년 결사 중 금타(金陀, 1898~1948)대화상 다례재茶禮齋 (1986년 (음)01. 24)일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벌써 봄이 되어서 이윽고 얼마 있지 않으면 나무에 물이 오르고 백화만발百花滿發할 것입니다. 가지가지 꽃이 피어서 우리 마음을 다습게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가장 소중한 꽃 가운데 꽃인 우담바라優曇鉢羅 꽃은 쉽게 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담바라 꽃은 풀이하면 영서화靈瑞華라 신령 영[靈]자, 상서 서[瑞]자, 꽃 화[華]자 영서화라 풀이해도 됩니다. 또는 천상화天上華라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고, 천상에만 볼 수 있는 그런 꽃이라는 그런 풀이도 있습니다.
아무튼 천상, 지상을 통해서 가장 소중한 꽃을 우담바라화라고 합니다. 우담바라화는 피어나지 않습니다. 겨울 지나고 봄이 오고 여름이 다 되어도 우담바라화는 피어나지 않습니다. 헌데 부처님은 이런 우담바라화를 성자聖者나 또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나 이러한 분의 출현에다가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우담바라꽃은 피긴 피는데 삼천 년에 한 번씩 피는데, 이것은 성자가 태어나고 또는 전륜성왕이 태어날 때는 그런 서조瑞兆로 해서 우담바라화가 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여서 우담바라화 꽃이 그때그때 많이 피어났습니다. 신라 때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자장慈藏 또는 진표眞表 그러한 선지식이 태어나셨고, 고려 때는 보조普照 또는 대각大覺 또는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이러한 분들이 태어나셨습니다. 조선 때 역시 무학無學 또는 기화득통己和得通 또는 부용영관芙蓉靈觀, 서산西山, 또는 사명당四溟堂 그 뒤에도 편양鞭羊 또는 연담蓮潭 또는 설파雪坡, 백파白坡 그런 선지식들을 배출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우담바라화 꽃과 같은 소중한 분들이 많이 출현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분으로 해서 지금 오늘 열반 재를 모시는 금타金陀대화상大和尙, 이분이 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말없이 조용히 가셨습니다. 정작 우담바라화 꽃이라고 하면은 지금 세상 같으면 굉장히 혼란도 하고 시끄러울 것입니다마는 이분은 그와 같이 우담바라화에 비길만한 위대한 분인데도 조용히 말없이 가셨습니다.
이러한 데에 수행자의 귀감龜鑑이 되는 것입니다. 서둘지 않고, 내세우지 않고, 오직 바로 닦고서 바로 닦은 그런 향기로운 훈향薰香만 남기고 가셨습니다. 오늘 제 말씀은 주로 금타金陀 대화상 이분의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옮긴 가운데,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몇 군데만 발췌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금타金陀 대화상大和尙의 위적偉績
1. 조사선법祖師禪法인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과 염불선念佛禪 중中 특特히 염불선念佛禪에 역점力點을 두어, 위기충만危機充滿하고 불안不安한 현대과학現代科學 문명시대文明時代에 시기상응應時機相한 선법禪法임을 제창提唱하였으며, 특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으로써 선오후수先悟後修로 참구參究하면 자성불自性佛의 본원本願을 확신수순確信隨順하는 수법修法이기 때문에 사마邪魔가 불침不侵하고 정혜定慧가 균등均等 순숙純熟되어 오매일여寤寐一如와 구경성취究竟成就의 첩경捷徑이라 역설力說함.
2. 근본선根本禪의 재천명再闡明(구차제정九次第定)
3. 불교佛敎와 과학科學의 융화融和
4. 종교宗敎 일원화一元化 제창提唱
5, 각各 경론經論의 회통會通 및 통불교通佛敎 제창提唱
6, 수도위차修道位次에 대對한 체계體系 확립確立
7, 관음문자觀音文字(세계문자世界文字) 창제創製
8, 금강심인金剛心印(금륜도金輪圖)의 신작新作
9,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 창작創作
10,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刑量 저작著作
이분은 1898년 3월 29일에 전라북도 고창군 성속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리고 1937년 11월 17일 당當 39세 때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분명히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1948년 한창 일할 수 있는 오십 세에 입멸하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가 혼돈하고 또는 우리 길을 밝히는 등불이 부족할 때는 특히 이러한 위인들이,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자취가 그립고도 그리운 것입니다.
첫째 이분께서는,
오늘 말씀드릴 양이 좀 많아서 띄엄띄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20세기 문명사 가운데서 제일 소중한 가르침, 이것이 선禪입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불교가 모든 종교, 철학 또는 과학, 이러한 것 인류 문화의 모든 것을 다 합해서 최고 지상의 가르침이 불교입니다마는 그런 가운데도 역시 최상의 법, 무상심심법無上甚深法, 또는 우리 인간이 되고자 하는 본래 인간을 성취하는 그러한 가장 소중한 법,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현대 문명의 정수精髓를 알려면 꼭 참선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참선법에 대해서 말씀 안하신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참선법에 있어서 참선법도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참선법 가운데서 제일 지상의 법, 제일 고도한 지상의 법, 말로도 표현 못하고 생각으로 우리가 헤아리지도 못하고 문자로 표현도 못하고 그러한 심심 미묘한 참선법, 이것이 조사선祖師禪 도리입니다.
참선법에는 뒤에 설명이 있습니다만 보통 불교외의, 불교를 믿지 않는 즉 정견을 갖지 않는 분들이 닦는, 요새 말하는 명상법 하는 그런 외도선外道禪법이 있습니다. 정법이 아닌 분들이 닦는 참선법 이것은 그냥 자기의 어느 이욕利慾이나, 어느 재능이나, 어떠한 기능을 구해서 닦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그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인과도 믿고 약간의 그런 바른 견해는 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의 열리지 않아서, 마음이 옹졸한 대로 믿는 그러한 분들이 닦는 참선 이것이 범부선입니다.
그다음은 소승선小乘禪이라, 불법을 연구해 내가 없다, 즉 자기가 원래 없음을 안다 말입니다. 불교의 요체는 먼저 자기가 본래 없다 하는 무아無我의 도리, 이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몸뚱이가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견해, 내가 보는 망념된 견해가 없다 말입니다. 자기가 보는 그런 망념된 견해가 없는 것을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의 이러한 형체는 있다 하더라도, 내가 보는 정도로 좋다, 궂다, 또는 시是다, 비非다 하는 것은 없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 우선 내가 없다하는 내 몸 이것은 지地, 수水,화火, 풍風 사대가 합해서 내 몸이 이루어졌고, 내 생각 이것은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이라, 즉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분별 시비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다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서 닦는 선 이것이 소승선小乘禪입니다.
그러나 소승선은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제법이 공空이라, 일체 만유가 다 공인 줄을 모릅니다. 겨우 내가 공인 줄은 알지만은 우주 만유가 본래 공인 줄은 모른다 말입니다. 헌데 나도 공이요, 우주 만유의 만법이 공인 줄을 느끼고 닦는다 말입니다. 이것이 대승선大乘禪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마음이 열리는 선법은 못됩니다.
그래서 가장 고도한 선법, 이것이 최상승선最上乘禪, 가장 높은 선법, 이것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은 비록 내가 어두워서 못 느끼고 있다 하다더라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내 자성自性 내 불성佛性이나 우주 만유가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못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성자가 바로 보면 본래 부처입니다. 본래시불이라 본래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내가 깨달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바로 보면 중생 이대로 바로 부처다 말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부처입니다. 바로 보면 또 산이나 냇이나 하나의 미물이나 모두 다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보면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고, 또는 선악 시비가 있다 하더라도 성자의 바른 견해, 바른 정견에서 본다고 그러면은 모두가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포함되어 있다 말입니다. 부처란 것은 일체 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또는 영생도 하고 또는 신통자재도 하고 또는 번뇌도 없고, 청정하고 이러한 것들,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모든 공덕, 이러한 것이 포함된 생명체 이것이 부처입니다. 우리 중생이 말로도 다 못하고 또는 어느 성자가 몇 겁을 통해서 설법한다 하더라도 못할 정도의 무량공덕無量功德, 이런 공덕을 포함한 생명체 이것이 부처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처임을 먼저 우리가 깨닫는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이니까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번뇌를 떠나버린 일체 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심시불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또는 천지 만유가 바로 부처임을 딱 느끼고 닦는 선禪, 이 선법 이것이 최상승선 바로 조사선祖師禪입니다.
비록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또는 묵조黙照를 하고 선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본래시불本來是佛이요, 본래 바로 부처요 일체 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을 못 느끼고 닦으면 이것은 참다운 선법이 못됩니다.
너무 길어지니까 짤막짤막하니 넘어가겠습니다만, 그러한 조사선祖師禪법인 간화선看話禪과 화두를 참구하는 선과 또는 묵조선黙照禪과 지금 조동종이나 원불교 같은 그런 선은 묵조선입니다. 이것도 역시 훌륭한 선법입니다. 또는 염불선과, 부처님의 명호를 그때는 화두로 한다 말입니다. 염불선은 부처님의 명호 즉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처님의 명호를 화두로 하는 것입니다.
‘특特히 염불선念佛禪에 역점을 두어, 위기 충만하고 불안한 현대과학 문명시대에 시기 상응한 선법禪法임을 제창提唱 하였으며 특히「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으로써 선오후수先悟後修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보조(普照知訥, 1158~1210)국사國師 말씀으로 하면 돈오점수頓悟漸修지요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분도 있겠지만 보조국사 말씀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보조국사뿐만 아니라 종밀(宗密, 780~840)선사禪師나 또는 『화엄경華嚴經』이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모두가 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단지 지금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비판하는 분들은 오悟란 개념, 깨닫는다는 오란 개념에 대해서 혼돈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보조국사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것은 선오후수라는 먼저 이치를 깨닫고 닦는 즉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확립시키는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법문입니다. 이것은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찬撰한 『보리심론菩提心論』에 있는 것인데, 내용은 적당한 기회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마는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마음이 부처임을 간명히 간단명료하니 도파道破한 법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면 그냥 내 마음이 본래 부처구나, 우주가 부처구나 이와 같이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으로써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정견을 깨닫고, 닦아 나가는 그런 식으로 참구하면 ‘자성불自性佛의 본원本願이라’ 자성불이란 것은 아까 말씀처럼 깨달은 뒤에가 아니라 천지만유가 바로 보면 바로 부처입니다. 도인이 보면 다 부처요, 범부가 보면 다 범부라고 하듯이 진정 바로 보면 다 부처입니다.
헌데 그 부처 가운데는 원래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사람도 각기 원력이 있습니다마는 시방삼세불인 부처님은 원래 원력願力이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우주 목적 우주 원력 이것이 바로 부처님 원력입니다. 그런 원력은 어떤 것인가 하면은 모든 중생을 다 성불시키고자 하는 원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독사나 또는 악인이나 누구나 다, 또는 하나의 땅덩어리나 모두를 다 법신불法身佛로 이끌어서 나가는, 귀일시키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이끌어 나가는 그런 원력이 있습니다.
『정토삼부경』말씀으로 하면은 사십팔원四十八願이라, 마흔 여덟 가지 원이 있습니다만, 모든 중생을 성불로 이끌어 가는 그런 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까도 법회 때 발사홍서원이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웠습니다마는 그것은 우주의 원, 법신불의 원을 가장 간추린 원이 네 가지 서원입니다. 이러한 서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천지 우주는 그와 같이 서원이 있습니다. 헌데 염불念佛은, 물론 어떤 행법이나 마찬가지겠지마는, 특히 염불은 이와 같이 부처님의 서원에 수순하는 따르는 것에 더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보리방편문」으로써 선오후수 참구하면 자성불이 원래 부처의 그런 본원을 확신 수순하는’ 부처님께서나 또는 조사가 천지가 부처라 했으면 다 부처인 것이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 범부가 번뇌가 많아서 못 믿습니다만 바로 생각하면은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은 불불허설佛不虛說이라 조금도 허설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분들이 검다고 했으면 바로 그것이 검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증명만 미처 못 했을 뿐입니다.
‘확신수순確信隨順하는 수행법修行法이기 때문에 사마邪魔가 불침不侵하고’
이럴까, 저럴까하는 의심이 들거나 또는 잘 안 믿으면 그때는 마魔가 침범해 옵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도 길을 지시한대로 똑바로 가면 좋은데,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말 들으면 바로 못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법도 역시 딱 부처님 말씀 믿어 버리면 좋은데, 하도 세상이 혼란스럽고 하도 스승도 많고 하는 것이니까 바로 못 믿습니다. 허나 다행히 확신수순이라, 확신하고 거기에 따라 버리면 그때는 별로 병폐가 없어놔서 사마가 불침이라, 마魔가 별로 침범이 없다 말입니다.
‘정혜定慧가 균등均等이라’
우리가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정혜가 균등이 안 되니까 안 됩니다. 참선할 때는 백사십 가지 선병禪病이라, 가지가지 선병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정혜가 균등히 안 되니까 선병이 생깁니다. 정혜가 균등均等히 안 되는 그런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은 확신수순確信隨順을 잘못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가 혼란스럽고 가르침이 많은 때는 한편은 좋으나 우리가 따라 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혼돈을 느낍니다. 그래서 확신수순이 참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확신하고서 따라갈 때는 그때는 별로 사마가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선정 고요한 선정, 또는 지혜를 밝히는 혜 이것이 같이 가지런히 균등하단 말입니다. 우리 불성佛性 가운데는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모든 것이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한 가지만, 한 가지 법만 치우치게 공부하면은 공부가 균등하게 못됩니다. 어떤 성자나 간에 공부할 때는 반드시 정혜쌍수라, 정혜균등이라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즉 고요히 들어가는, 고요한 그 마음 또는 우리 자성自性을 비추어 보는 그런 지혜智慧, 이것이 같이 합류合流해야 합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팔정도八正道 칠각지七覺支라, 칠각지 법문은 주로 내용이 정혜균등 하고자 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이 들뜨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런 묘법이 칠각지 법문입니다. 헌데 「보리방편문」을 하는 선법 이것은 정혜균등定慧均等하기가 지극히 용이하게 되어있습니다.
‘정혜가 균등 순숙純熟하여 오매일여寤寐一如’라,
정혜가 균등히 안 되면 오매일여가 못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자나 깨나 오매일여라 말입니다. 공부가 낮 시간에 우리가 상상할 때뿐만 아니라, 자나 깨나 언제나 한 생각으로 공부가 흘러간다 말입니다. 우리 범부는 천 생각, 만 생각 모두 나는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나로 딱 모아서 그때는 맑은 생각만 이어간다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불교 말로 하면은 무간수無間修라, 사이 없이 닦아 나가야만 그때는 마음이 하나로 딱 되어서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인 불심을 깨달아 버립니다.
‘구경성취究竟成就의 첩경捷徑이라 역설力說함’
비록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무시겁래無始劫來의 그런 우리 번뇌 망상에 가리어서 부처인 줄을 모릅니다. 따라서 될수록 번뇌 망상은 거두어 버리고서 한 생각으로 우리 생각을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본래 마음이 거기에 발로가 되어서 구경성취 성불이 옵니다. 이러한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근본선根本禪의 재천명이라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부처님 선법을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 경전을 보면 합리적이고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저 서역 지방으로, 또는 중국으로 옴에 따라서 차근차근 많이 번쇄煩瑣하니 이루어졌습니다. 좋은 면으로 발전도 하고 또는 나쁜 면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기도 했습니다.
헌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아함경阿含經』이나 원시불교原始佛敎에서 역설 강조한 선법은 근본선입니다. 비록 근기 따라서 빠르고 더디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어떤 누구나가 꼭 거쳐야 할 선법, 이것이 근본선根本禪입니다. 따라서 마명보살馬鳴菩薩이나 또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이나 또는 세친보살世親菩薩이나 또는 무착보살無着菩薩이나, 또는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이나 또는 『능가경楞伽經』이나 모든 그런 기본적인 선법은 이러한 근본선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선법이 유포가 되면서 육조혜능六祖慧能대사 그 뒤로부터는 중국의 도교道敎, 도교와 합류가 되어서 단박에 되어버린다. 이러한 사상이 많이 거기에 유입되어 가지고 이런 근본선은 차츰차츰 빛을 잃어 버렸습니다. 근본선이 빛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신통자재神通自在하는 도인들이 별로 안 나왔다 말입니다. 이러한 근본선의 차서次序 이것은 아홉 단계로 이렇게 구분이 있습니다. 그 차서가 있습니다.
이것도 다음에 나옵니다만 ‘불교佛敎와 과학科學의 융화融和’라,
기독교나 불교나, 현대과학 문명시대에 와서는 어떤 종교나 간에 과학적인 여러 가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고, 종교와 과학 또는 철학과 과학 이와 같이 과학과의 융합을 도모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냥 말로는 도모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체계가 서야만 과학과 종교가 일치가 됩니다. 융합이 됩니다.
부처님 당시의 우리 교법은 원래 과학, 철학과 종교를 다 한 번에 두루뭉술 원융으로 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인지認知가 아직은 미개해서 지금 현대와 같은 과학은 꿈에도 못 꿀 때라놔서 그러한 과학적인 변증辨證이 별로 안 되어 있다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이 없으면 못 사는 때입니다. 과학이 없으면 자기 개인도 못 지키고, 생활도 못하고, 나라도 못 지킵니다. 이런 때는 꼭 우리 부처님의 그런 소중한 법문과 현대 사회를 현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과학과 융합이 되어야 합니다. 꼭 누군가가 나와서 융합을 시켜야 합니다. 그냥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그냥 바로 물질이 바로 공이라, 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공이 바로 물질이다. 이런 정도로는 현대 과학도를 설복說伏을 못 시킵니다. 설복을 못 시키니까 불교를 불신한다 말입니다.
꼭 필요한 이런 때에 금타金陀 대화상께서 부처님 교설, 『구사론俱捨論』이나 또는 『기세경起世經』이나 천지창조, 불교의 창조설이 이런 법문에 의거해 현대과학적인 여러 가지 술어와 각 배대를 시켜서 체계를 세웠습니다. 흥미가 없는 분들은 흥미가 없는 문제입니다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쪽 북쪽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공산세계, 세계의 거의 태반을 지배하고 있는 공산세계, 이런 세계의 그런 기본 이념, 이것이 유물론唯物論 아닙니까? 유물론, 만약 불교와 과학과 융합할 수 있는 지혜만 있다고 그러면 유물론이 설 땅이 없습니다. 공산주의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종교 일원화一元化 제창’
현대는 분업적인 사회가 되어서 각기 뿔뿔이 살려고 애씁니다. 우리 불교도 벌써 십팔 종파 아닙니까? 기독교는 삼백 종파가 넘는다고 합니다. 민족 종교도 오십 종파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도 세계의 여러 가지 전쟁과 또는 비극이 있습니다만, 인류의 평화 인간의 구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종교라는 이름 때문에 싸우는 일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영국의 에이레사태 청교도와 신교와의 대립,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인도의 시크교도와 힌두교의 사이, 얼마나 그런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있었습니까? 중동의 이라크와 이란 관계, 5년째 싸우고 있습니다. 레바논의 싸움 이런 것이 모두가 다 평화를 내세우고 있는 종교라는 이름 밑에서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 종교인들은 눈을 떠야 합니다. 내 것만이 옳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융무애圓融無碍하는 ‘비법非法도 불법佛法’이라. 모든 것이 다 불법 아님이 없다는 그런 불법 내에도 옥신각신해서 18가지 종파가 있습니다. 일본 불교사를 보면, 일본 불교사에는 각 종파끼리 서로 절을 태우고 싸워서 코를 깎고, 귀를 깎아내고 한 예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이와 같이 종교라는 이름 밑에서 이렇게 대립 환경이 심하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 나만이 소중하다는 아집과 내 법만이 옳다는 법집이라, 이것 때문에 그럽니다. 즉, 다시 말하면 아집, 법집을 떠나 버린 우리 자성을 미처 못 봐서 그렇습니다. 자성을 봤다 그러면은 법집을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탕탕 무애하니 평등무차별의 법성法性뿐이거니 어떻게 내 것만이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선 우리 한국에서 원효元曉를 봅니다. 의상義湘을 봅니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봅니다. 또는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봅니다. 또는 태고보우太古普愚, 또는 나옹화상懶翁和尙, 서산대사西山大師, 진묵대사震黙大師 이런 분들은 이렇게 정평 있는 도인들은 법집이 없습니다.
헌데 우리는 불교뿐만 아니라 불교 외의 딴 종교와도 같이 불모佛母로 하나로 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다 법성法性이 그 기본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일원화라 하나의 성불이라 하는 목표를 정해서 가는, 하나의 성불을 정해서 가는 우리는 모두가 다 도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살림을 남의 행법行法이나 남의 종교를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는 월남사태에서 불교도와 응오딘지엠 정권이 대표하는 그런 천주교와의 무서운 싸움을 봤습니다. 이것이 월남의 망국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는 우리 불교도가 거의 천만입니다. 기독교 또한 개신교, 천주교 합하면 거의 천만입니다. 이런 종교가 같이 각축해서 서로 옳다고 해보십시오. 공산도배共産徒輩의 침략이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은 암담합니다.
『법화경法華經』하는 사람은 『법화경』만 옳다. 같은 『법화경』 하는 사람도 역시 『법화경』의 해석 따라 지금 세 종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 법문의 방편方便과 진실眞實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식들이 회통會通을 시켜서 이것은 방편, 이것은 진실이다 하는 그런 회통, 융화融和를 시켜야 합니다. 이와 같이 각 경론에 나와 있는 일반 중생의 근기에 맞춘 낮은 법문과, 부처님 생각 그대로 말씀하신 진실법문을 같이 회통시킵니다. 화해를 시킵니다. 이와 같은 작업을 또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수도修道 위차位次’에 대한 체계 확립이라, 아까 제가 ‘돈오점수’란 말씀도 했습니다만 물론 우리가 누구나가 빨리 깨달으면 좋지요. 그러나 다생겁래로 지어 내려온 과거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금생에 지은 우리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이런 번뇌가 빨리 녹지가 않습니다. 물론 업장에 따라서 선근에 따라 차이가 있더라도 빨리 잘 안 녹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른 견해 정견이 선 다음에는, 닦아서 나가는 과정을 좀 알아야 합니다. 과정이 원래 없으면 모르거니와 부처님께서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華嚴經』『십지경十地經』문에 다 있는 것이고, 56위 4만 성불이라, 또는 십지十地라, 또는 정통조사인 용수龍樹보살, 또는 무착無着보살, 또는 세친世親보살 이런 분들이 다 우리가 나가는 과정을 위차, 차서를 밟아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살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길을 가는데 길을 안다고 해서 우리한테 해로운 것이 있습니까? 비록 근기 따라서 단박에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길목을 알아야 더 쉽습니다. 자기 공부가 얼마를 간지를 모릅니다.
자기 공부를 자기가 점검할 만한 척도가 없습니다. 이런 위차位次가 없으면 말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 경전에 나와 있는 각 위차, 각 공부하는 순서를 다 뽑아서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비교 배대 해서 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소위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라. 우리 범부가 삼보三寶에 귀의하면서부터 닦아 나가면서 열여섯 단계를 밟아 성불하는 법입니다. 물론 근기가 수승한 분들은 막 뛰어갈 수가 있지요. 돈초頓超라 말입니다. 그러나 제일 하근기는 다 밟아야 합니다.
그다음은 ‘관음문자觀音文字’ 창제, 세계 문자 창조라, 우리들은 위대한 인물들이 경탄할 만한 그런 천재를 봅니다. 관음문자 이것은 여러분들이 나중에 보시면 아십니다만, 세계 문자라고 해서 창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체 중생의 음성을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이 위대한 문자고, 산스크리트어가 위대한 문자입니다만, 이러한 것은 인간이나 중생의 음성을 다 표현을 못 합니다. 특히 우리 한글은 엑센트 같은 강음强音을 표기도 못하고, 장음長音도 표기도 못합니다.
우리 한글의 미비점을 보완해서 가히 세계 문자로 해서 일체중생의 그런 음성을 다 표현하고, 또는 음성만 딱 들어도 그 사람의 근기를 알 수 있다 말입니다. 탐심貪心 많은 사람, 진심嗔心 많은 사람, 치심癡心 많은 사람, 음성 따라서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즉 음성을 감별하는 법 이것이 관음문자의 창조입니다. 현대란 특히 메스컴 시대에는 지극히 중요한 문자입니다.
「금강심인金剛心印」, 「금륜도金輪圖」의 신작新作이라. 불교는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뜻을 다 표현 못 합니다. 따라서 상징으로 해서 표현을 많이 합니다. 하나의 도식圖式으로 표현한, 불심佛心을 도식으로 상징으로 표현한 이것이 「금강심인金剛心印」입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 있던 것인데 이것이 인멸된 것을 다시 파내 가지고서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그다음에 「수능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 창작이라. 불교의 전 체계, 소승小乘, 대승大乘, 현교顯敎, 밀교密敎 전 체계를 하나의 도식으로 묶었습니다. 저는 원효대사의 분포식도 보고, 일본 진언 밀교의 도식을 보았습니다만 그것도 다 중요하나, 보다 과학적이고 또는 팔만사천 경전을 다 망라해서 심천深淺과의 관계를 다 대비해서 하나의 체계로 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와 같이 세밀한 체계를 세운 것은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스님, 불교의 철학을 천태지의 스님이 체계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허나 천태지의 스님도 미처 못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렵기도 하고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굉장히 중요한 체계입니다.
그다음에는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刑量」 저작이라,
현대 사회에서 우주 문제라 하는 것은, 벌써 우주시대 아닙니까? 우주 시대인데도 지금 깜깜하게 쌓여 있습니다. 지금 달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벌써 몇 십 년 전만하더라도 달은 냉체冷體라는 얼음이 얼어 붙어있다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달이 냉체라고 하기 전부터 금타화상께서는 달 속에는 온기溫氣가 있다고 도파道破하신 분입니다. 불교 우주관, 불교의 우주관은 소위 삼천대천세계 아닙니까. 불교는 이와 같이 방대한 우주관입니다.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나 라플라스(Laplace, Pierre Simon, 프랑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1749~1827)나 우주 설을 말한 것이 있습니다만 그런 분들은 부분적인 것이고, 불교 우주관은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태양계를 태양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우주, 하나의 소우주가 백억이 있고, 이것이 삼천대천세계인데, 삼천대천세계가 무수히 우주에 있습니다. 즉 무량무변합니다.
지금 과학에서는 엄두도 못내는 광대무변의 세계를 불교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그 당시에 소박하게 말했을 뿐이지 세밀한 체계가 없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현대 물리학적으로 체계가 안 서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불신을 갖습니다. 이것은 공상空想이다 라고 말입니다. 삼천대천세계의 불교의 우주관에 비추어서 하나하나를 모두가 다 불교의 법수法數에 입각해서, 부처님 법은 다 법수가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도 천지 우주는 하나의 수리數理가 기본이 되어 있다고 하듯이, 사실 우주는 수리가 기본이 되어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이지만 그런 우주를 총망라해서 수리로 묶어서 부처님의 삼천대천세계라는 우주관에 입각해서 우주를 체계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열량熱量, 질량質量, 각 별의 지구면 지구, 금성이면 금성 각 별의 질량, 열량을 다 표기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두가 다 근본은 마음입니다. 불심입니다. 삼천대천세계라 하더라도 마음 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해서 체계화시킨 법문, 이것이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刑量」입니다. 이것은 책 하나로 나누어서 일관된 수리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선禪과 정定이라. 아까 선禪을 들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된 체계로 해서 제가 옮겼습니다. 대화상의 법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도서都序』나 기타 『능가경楞伽經』을 참고로 해서 옮긴 것입니다. ‘체體적으로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 곧 불심佛心을 선禪이라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 문명사회에서 첨단을 걸어가는 우리들은 꼭 선禪은 알아야 합니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의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동양학 서적이 팔리는 부수가 70%가 넘는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벌써 서구지역에서 얼마만큼 동양학에 관심 갖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는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르티’나 그런 분들 것도 많이 있지만, 불교 서적이 근 태반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은 서구지방에서 기독교의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 특히 과학문명의 설명을 기독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소중한 불교 가운데서 아까 말씀처럼 최상의 법문, 꼭 현대인들이 알아야 할 법문, 이것이 선禪입니다. ‘선’ 이것은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요즘 마인드 컨트롤하고 뭣을 하는 것도 하나의 용用의 일단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선 이것은 바로 불심입니다. 열반묘심涅槃妙心 바로 불심이란 말입니다. ‘선종禪宗’ 이럴 때는 바로 불심종佛心宗이라, 바로 불심을 종宗으로 합니다. 불심을 바로 선이라고 말하고, ‘용用적으로는 불심 곧 자성自性에 안주해서 염연부동恬然不動이라’
거기에 의심 없이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확신하고서 부동함을 선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방법적方法的인 선은 우리가 애써서 화두話頭나 또는 묵조黙照나 염불念佛을 수행하여 우리 마음을 불심에 안주시킨다 말입니다. 그것이 방법적인 ‘선禪’인 것이고, 바로 선처럼 이것은 우리 열반묘심, 우리 불심, 자성 이것이 바로 선입니다. ‘선禪’과 ‘정定’을 선과 정을 따로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또는 합칭해서 한 번에 ‘선정禪定’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누어서 말하면 ‘선’ 이것은 풀이를 보면, 사유수思惟修라, 바로 정견으로 닦아서 나갑니다. 또는 정려靜慮라, 우리 생각을 고요히 한다 말입니다. 또는 ‘기악棄惡’이라 악을 버린다 말입니다. 참선을 다른 분들이 좌선만 주로 하고서 계행戒行을 무시합니다마는 계행을 무시하면은 선이 안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선’ 이것은 욕계 번뇌를 초월 안 하면 선은 못됩니다. 삼매三昧에 못 들어갑니다. 따라서 계행을 좋으나 싫으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기악棄惡이라 악을 떠난다 말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선을 닦으면 무량의 공덕이 있습니다. 지혜도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또는 나아가서는 육신통六神通도 발휘합니다. 바로 닦으면 이것은 자연 공덕으로, 자성 공덕으로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총림같이 많습니다. 바로 못 닦으면 이런 소중한 선인데도 공덕총림功德叢林을 우리가 발휘를 못합니다. 분명히 초인적인 힘도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그 뒤에 나온 몇몇 도인道人만 신통 자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성이 부처인지라, 바로 닦으면 공덕총림功德叢林인지라 무량한 공덕이 있습니다. 무량공덕을 지금 자아낼 때입니다. 과학이란 물질세계에 사람들의 마음이 억세 버려놔서 말만으로는 잘 안 통합니다. 역시 그런 아만심我慢心을 조복시킬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성공덕自性功德, 공덕총림功德叢林을 꼭 발휘해야 합니다.
‘정定’ 이것은 정수正受라, 부처님의 뜻을 자성공덕을 바로 받아들이고, 조직정調直定이라, 구부러지고 또는 삐뚤어진 마음 바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삐뚤어지고 굽어 있습니다. 우리 범부심은 탐욕貪慾, 진심嗔心, 치심癡心 때문에 지금 삐뚤어져 있습니다. 왜곡된 마음을 바로 한다 말입니다. 또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 우리 마음과 행동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저것 애써서 안 배운다 하더라도 첨선하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마음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고요한 마음에서 욕을 하겠습니까? 싸우겠습니까? 참선할수록 우리 마음이 심행心行이 발라집니다.
또는 식려응심息慮凝心이라. 우리 나쁜 마음이 쉬어서, 우리 생각이 하나 불심으로 딱 모아집니다. 또는 등지等持라, 우리 마음이 가지런히 불심과 하나가 되어갑니다.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법락을 능히 현전시키는 지혜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별명 가운데서 환희장엄불歡喜莊嚴佛이라는 불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 법 우리 불성 가운데는 환희 충만한 행복이 원만히 구족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해가지고 환희심도 없고, 행복이 없으면 공부를 잘못한 것입니다. 물론 거친 것은 아니지만 심심 미묘한 행복감, 환희심이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가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 해탈한 안락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서 맨 처음 맛보는 그것이 환희지歡喜地라 마하가섭 같은 근엄한 분도 환희지를 성취했을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법락法樂 법에서 오는 낙은 우리 중생의 욕심에서 오는 오욕락이 아니라, 욕심을 떠나면 떠날수록 반비례해서 우리 참다운 영원한 행복은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아! 오욕락五欲樂을 떠나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참다운 법락, 참다운 진리에서 오는 안락安樂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이런 안락의 맛을 못 보니까 오욕을 잘 못 떠납니다. 이런 법락은 영생의 안락인 것입니다. 오욕은 무상하지만 법락은 무상無常하지 않습니다. 상주부동常住不動한 것입니다.
그다음은 등념等念이라, 부처와 더불어 늘 같은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선정禪定 이것은 한꺼번에 말도 하고, 따로따로 떼어서 말도 합니다. 약간 차이는 있으나 보통 삼매三昧나 선禪이나 똑같이 풀이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종선이라. 셋으로 구분하면 세간선世間禪이라 세간에서 우리 중생들이 하는 선입니다. 출세간선出世間禪이라 세간을 떠나서 출가해서 닦는 선입니다. 최상승선最上乘禪 가장 높은 선입니다. 세간선世間禪에는 외도선外道禪, 아까 제가 얼핏 언급했습니다만 외도가 욕심이나 신통이나, 신통도 아我를 못 끊어서 자아自我를 못 떠나면 사도私道입니다. 아我를 떠난 무아無我지 행에서 이루어져야지 아我가 남아 있으면 사도私道입니다. 이것은 외도가 자기 재주를 위해서나 또는 대접받기 위해서나 말입니다. 그런 삿된 이익을 삿된 목적을 위해 닦는 선 이것이 외도선입니다.
그다음 범부선凡夫禪, 범부가 인과를 비록 믿지만은 이것도 역시 자기 이욕을, 아我를 미쳐 못 떠났다 말입니다. 이것이 범부선입니다. 그다음 소승선小乘禪이라, 내가 없는 것을 내가 허망한 것은 알긴 알지만은 미처 일체만법이 공空인줄 모릅니다.
그다음 대승선大乘禪이라, 이것은 아공 법공이라, 나도 없고 일체만법도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제법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공의 도리, 이것을 알고 닦는 선 이것이 대승선입니다.
그다음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우리한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까지는 다 넘어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문제는 가장 바른 선, 가장 정견正見에 입각한 선禪, 이것만이 우리를 해탈解脫로 인도합니다. 대승선 여기까지는 아직은 우리를 해탈로 인도는 못합니다.
잘 모르신다 하더라도 지금 들어 두셨다가 나중에 책도 보시고, 생각도 하시면서 상기想起를 하셔서 꼭 참선만은 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문명의 첨단을 갈 수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만방에서 우리 한국인이 앞서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방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성 가운데서 가장 최고의 지성智性, 최고 지성인 골수骨髓 이것이 참선입니다. 참선 가운데서도 이런 것은 아직 저만큼, 일반에서 하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요가난다나, 다른 것도 여기까지 대강대강 합니다. 기독교의 명상도 여기까지는 합니다. 다만, 이것만이 우리 불교의 독특한 최고 상승법문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내 자아自我, 자기 본 생명을 못 찾습니다.
이것은 화두를 도인道人들이 우리한테 딱 맞는 문제를 주면 그 문제를 의심한단 말입니다. 의심함으로 해서 바른 지견智見을 느낀다 말입니다. 이러한 화두를 의심해서 닦는 선 이것이 간화선看話禪인 것이고, 그다음은 본래 부처거니 뭘 의심해! 똑같은 최고 상승선이지만, 의심을 별로 않고서 그냥 묵조黙照라 본래 부처거니 가만있으면 되겠지, 가만있으면 원래 부처니까 부처가 되겠지. 흐린 탁수를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겠지, 괜히 의심하면 우리가 더욱 산란스럽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만있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또 단전주나 이런 것을 주로 해가지고 닦는 선, 이것이 묵조선黙照禪입니다. 한국의 원불교나, 일본이나, 중국에서 조동종曹洞宗 계통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염불선念佛禪이라, 이것은 간화선하는 분이나 묵조선하는 분이나 같이 닦습니다. 간화선하는 임제선 계통도 역시 저명한 분들, 가령 한국도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화상懶翁和尙, 보조국사普照國師,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 이런 분들은 화두를 주로 했지만 또 염불도 똑같이 선정일치禪淨一致라, 같이 일치해서 보았단 말입니다. 정평 있는 도인들 치고서 일치해서 안 본 분이 없습니다.
저는 다 조사해봤습니다만, 즉 도인들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법성을 봤거니, 천지 우주가 평등무차별하다는 법성을 봤거니 어디에 치우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냥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과의 이 차이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미타불을 저 멀리 십만 억 국토 극락세계에 계신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부처님은 우리를 도와준다. 관음보살은 내 밖의 저기에 계신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나를 둘로 봅니다. 그런 것은 염불선念佛禪이 못됩니다. 그냥 염불은 된다 하더라도 염불선은 못됩니다. 참다운 염불念佛도 못됩니다.
염불선念佛禪일바에는, 자성미타自性彌陀라. 바로 아미타불이 바로 내 자성 본성이다 말입니다. 우주의 본성이 바로 미타요. 관음보살이 바로 우주 자비라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명호가 하도 많으니까, 그때그때 산란을 느낍니다. 혼돈을 느낍니다.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무슨 보살, 부처님 이름 불자 붙은 이름만도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삼천불명을 보면 삼천불三千佛의 이름이 다 있습니다.
모른 사람들은 그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큰 탈입니다. 만약 그와 같이 삼천불三千佛이나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불교는 원시종교인 다신교多神敎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주, 우주대의宇宙大義 천지 우주를 총망라한 하나의 생명,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하나의 생명 가운데서 더러는 인연 따라서 우주 만유가 생겨나는 그런 생명, 하나의 평등무차별이라, 어렵지마는 이런 말씀은 외워 두세요.
평등무차별의 우주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그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자비로운 의미에서는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그런 의미에서는 문수보살이고, 행복이 충만한 그런 의미에서는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이와 같이『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모두가 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표현한 이름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부처님임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염불선念佛禪 이것은 부처님이나 극락이 바로 저만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가 바로 보면 이 자리가 바로 극락입니다. 극락인데 우리가 못 봐서 더럽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번뇌에 가려서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노란 안경 쓰면 노랗게 보이고, 검은 안경 쓰면 잘 안 보이듯이 말입니다.
『유마경維摩經』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약득정토菩薩若得淨土’ 인덴, 보살이 만약 정토를 청정한 나라로 이룩하려고 할 때는 ‘선정기심先淨其心’이라, 먼저 그 마음을 정화하여라. ‘수기심정隨其心淨이 정토정淨土淨이라,’ 그 마음이 정화됨에 따라서 거기에 비례해서 극락세계 정토가 온다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더러우면 더러운 것 밖에 못 봅니다.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그때는 이대로가 바로 극락입니다. 천지 우주는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중생은 극락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이 다 청정淸淨 무비無比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것은 외도선, 또는 범부선, 소승선 이것도 유루선有漏禪이라, 아직은 번뇌에 때 묻어 있는 ‘선’이란 말입니다.
그다음에 소승선, 대승선 이것은 의리선義理禪이라, 미처 문자 헤아림을 못 떠났다 말입니다. 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미처 헤아림을 못 떠난 문자를 못 떠난 이것은 의리선입니다. 허나 “최고상승선最高上乘禪” 이것만이 비로소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이 부분도 논쟁이 심합니다만 이렇게 알아 두면 좋습니다.
이 둘 가운에서 여래선 이것도 역시 어느 정도 부처님의 그런 말씀이라, 문자를 미처 못 떠났다 말입니다. 허나 참다운 선禪의 체體,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하고 문자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선의 체, 본체 이것은 조사선입니다. 이것이 무루선無漏善이라 번뇌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한 근본선根本禪이라, 근본선 보고 순선純禪 그럽니다. 순선이라 이렇게도 말합니다.
육조혜능六祖慧能까지는 주로 순선 계통으로 했습니다. 그다음에 분파가 되어서 간화선 등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금타金陀 대화상大和尙은 순선을 주로 순선純禪을 재개발을, 재천명再闡明을 했습니다. 순선純禪으로 나갈 때는 이것은 모두가 다 금타金陀 스님의 창작이 아니라, 원래 불경에 있는 것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사선근四善根이라 우리 범부凡夫가 견성見性할 때까지 가는 과정을 말했습니다. 맨 처음 난법煖法이라, 이것은 어두운 마음에서 마음이 개운하는 밝음이 약간 있을 때 이것이 명득정明得定입니다. 또는 밝음이 더 증가해서 그때는 몸도 마음도 시원할 때, 이것이 명증정明增定이라 이것이 정법頂法이고 그다음은 인법忍法이라, 더 올라가서 그때는 그냥 우리 마음이 청정한 가운데 심월心月이라, 앞에 가서 뿌옇게 훤히 달이 보인다 말입니다.
그다음은 심월心月이 변화가 되어서 자마금색紫磨金色의 심월로 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범부가 미처 깨달은 때가 아니나 닦아 나갈 때 우리 범부가 느낄 때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헤매지는 않습니다. 조금 맑으면 이만큼 갔구나, 더 맑으면 이만큼 갔구나, 이렇게 알면 섣불리 내가 다 되었구나 하고 함부로 말도 않고, 자기 비관도 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이만큼 되어서 그래서 앞에 훤히 달만 비치면 다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은 이만큼만 되어도 마음이 탁 트여서, 일반 법문은 문자만 알면 척척 풀이가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혼돈을 느낍니다. 자기가 얼마만큼 간지를 모릅니다. 이렇게 가는데 여기까지는 일반 경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래 이것은 금타金陀 대화상이 배대配對해서 맞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공부할 때 맑아올 때, 물리적인 물질로 따지면 풍진風塵이라, 풍진, 화진火塵 이것은 같이 쓰기도 하고 나누어 쓰기도 합니다만 풍진, 수진水塵 이것은 불경佛經에 있습니다. 자기 몸을 보배같이 안다 말입니다. 나를 보배같이 알기 때문에 우리 범부는 어떤 누구나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 범부 치고서 자기 몸이 제일 중요하지 않는 분이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몸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범부는 자기 몸을 보배와 같이 알기 때문에 특히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입니다. 자기 몸을 보배와 같이 여기지 않으면 삼독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한테 유리하면 탐심 내고, 싫으면 진심 내는 것이고, 이와 같이 모두가 다 자기를 보배같이 알기 때문에 탐진치 삼독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으로 좋다, 싫다, 밉다, 사랑스럽다 하는 것 때문에 몸으로 마음으로 행동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조일체업造一切業’이라, 일체의 업을 지어 아까 말한 것처럼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여러 가지 중생계의 과보를 받습니다.
강진 무위사無爲寺에 가면 「성중래영도聖衆來迎圖」라, 성자聖者가 죽으면 극락세계에서 성중聖衆들이 맞이하는 영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성중이 와서 맞이합니다. 성인 성[聖]자, 무리 중[衆]자, 올 래[來]자, 맞을 영[迎]자, 성중래영聖衆來迎입니다. 즉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 우리를 영접합니다.
우리는 이것도 역시 의심을 많이 합니다마는, 분명히 우리를 영접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닦아서, 영혼이 가벼워서 초승할 때는 그런 성중이 우리를 영접한다 말입니다. 그림 가운데도 내용을 보면 「성중래영도」를 보면 이십오보살이라, 아미타 부처님이 관음보살을 비롯해서 이십오보살을 데리고 와서 영혼을 영접합니다. 그래서 연화대蓮花臺에 태워서 극락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이 법문은 법조法照스님이라는 중국 당나라 때 분인데, 이분이 살아서 그냥 생시生時에 그냥 극락세계를 본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세계를 본다 말입니다. 극락은 내내야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부처님 눈에서 보는 불안佛眼으로 보는 안목이 다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우리중생은 그와 같이 못 봅니다. 서방정토 저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만 보면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닦아서 맑아지면 그때는 그냥 영원의 세계, 죽지 않는 세계에서 그냥 각 성중이 와서 우리를 맞이해 갑니다. 이것은 그러한 경계를 그냥 말씀한 것입니다.
[법조法照스님의 왕생낙원문往生樂願文에서]
“일체회심향안락一切回心向安樂” 이것은 안락세계, 극락세계나 안락세계나 똑 같은 뜻입니다. 일체회심이라, 우리가 하는 선이나 모든 수행을 극락세계에 회향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모실 때나 모든 공덕을 회향을 시킵니다. “일체회심향안락”이라, 우리의 모든 그런 공덕을 다 안락세계에, 극락세계에 회향시킨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성불하겠다 하는, 성불을 위하는 것이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즉견진금공덕심卽見眞金功德心” 안락세계의 진금공덕심이라, 불경을 보면 부처님의 금색심金色心, 진금심眞金心, 광명심光明心이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법신불은 사람과 같은 모양이 아닙니다. 법신불은 천지에 간격도 없이 충만해 있는 하나의 진금색眞金色의 광명입니다. 물리적인 광명이 아니라 신비神祕 부사의不思議한 그런 부사의 광명, 신비 부사의한 광명의 생명, 이것이 부처님 공덕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수행을 다 극락세계의 그런 광명심에 회향시킨다는 말입니다. 또는 극락세계 그것은
“정토장엄제성중淨土莊嚴諸聖衆” 안락이나, 극락, 정토가 똑같습니다. 정토는 그야말로 모두가 전부가 다 금색광명金色光明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니까 더럽게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제아무리 더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바로 보면 금색광명이라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불안佛眼의 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다 부처님의 광명뿐입니다. 모든 극락세계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빛나는 곳에 성중聖衆들이 계십니다.
“농농상재행인전籠籠常在行人前” 그러한 성중들의 무리가 금색 연꽃 타고서 우리 수행자 앞에 보입니다. 이것은 주로 임종 때 합니다. 죽을 때 닦아 가지고 수행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한 분들이 닦아 가지고서 죽을 때, 성중들이 우리를 마중 올 때의 광경을 그대로 읊은 것입니다. “농농상재행인전”이라, 성중들의 무리가 금색 연꽃 타고서 우리 수행자 앞에 보입니다.
“행자견이심환희行者見已心歡喜” 수행자修行者가 불법을 수행하는 자가 그런 성자를 보고서 마음에 환희심을 낸다 말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도 역시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 힘을 보면 그때는 환희심歡喜心을 내는 것인데 중생은 어두워서 인간 이상의 법을 못 보니까 그런 환희심을 못 냅니다. 그러나 죽을 때 닦아 가지고 나갈 때 성자가 보이고, 극락의 장엄이 보이면 그때는 그냥 마음에 환희심을 낸다 말입니다.
“종시종불좌금련終時從佛坐金蓮” 우리가 죽을 때는 부처님 따라서 좌연대라, 금색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에 앉는다 말입니다.
“일념승대도불회一念乘臺到佛會” 오랫동안 시일이 경과하지 않고서 일념 동안 순간에 연화대를 타고 부처님의 회상에 이릅니다. 이것은 상징이지만은 사실적인 상징인 것입니다. 맑은 영혼들은 그때도 역시 지금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성자가 가지고 온 연꽃을 타고서 순식간에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버립니다.
“즉증불퇴입삼현卽證不退入三賢” 부처님 회상에 이르러서 곧장 삼현三賢 아직 구경지究竟地까지 성자가 못 되었다 하더라도 번뇌를 안 내는 자리, 그 자리에까지 이르러 버린다 말입니다. “즉증불퇴입삼현”이라, 삼현에 들어서 다시 후퇴가 없다 말입니다.
“일일지중화진만一一池中華盡滿” 극락세계에 금색 광명의 연꽃이 있는 못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런 무량무변의 연못 가운데 모두가 금색 연못이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화화총시왕생인華華總是往生人” 그런 충만해 있는 그런 못마다 연못에 있는 꽃마다 모두 선행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영합금화백천겁寧合金華百千劫” 한 번 지어서 극락세계의 연꽃 위에 태어난 사람들이 백천 겁을 경과한다 하더라도 어찌 합할 것인가? 항시 피어서 그야말로 영생의 생명으로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불원지옥수유간不願地獄須臾間” 따라서 그런 경계는 다만 찰나 순간도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유반좌승화엽各留半坐乘華葉” 이 뒤가 의미심장합니다. 각기 자기가 탄 연꽃을 반 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자기 혼자만 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탄 연꽃을 반 자리를 두고서 가는데 누구를 주는가 하면은,
“대아염부동행인待我閻浮同行人이라” 아직은 안 죽었지만 사바세계에서 바르게 닦은 사람을 주기 위해서 연꽃의 반 자리를 남기고 가단 말입니다. 이 가운데는 심심 미묘한 상징이 들어있습니다. 아까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 보이는 가운데 무수 무량의 높은 세계가 많이 있습니다. 저 밑으로도 세계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식함으로 해서 우리 시야를 더 넓힐 수가 있습니다.
그럼 너무 시간이 많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한 말을 간단히 정리해서 이 시간을 끝마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인간으로 있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마음은 무량無量합니다. 밑에도 위로도 무량합니다. 지옥도 백 팔 지옥이라, 백이십육 지옥이라, 무수 무량의 지옥이 많이 있습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말입니다.
또는 부처 역시 경계는 끝도 없이 무변無邊 무량無量한 것이 부처의 그런 자리입니다. 이와 같이 위에도 끝이 없고, 밑에도 끝이 갓도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실로 있고 또는 동시에 그런 요소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행동이 비록 부처님의 행동이 아니더라도 역시 그냥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교수님 한 분의 말씀이 이것도 그 영향을 굉장히 줍니다. 어버이의 한 분의 말 이것이 굉장히 영향이 큽니다.
이런 때는 우리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제가 허두에 말씀마따나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부처님의 무가정無假定의 지혜, 부처님의 심심 미묘한 그런 여법의 지혜, 불안청정佛眼淸淨의 지혜로 봐야만 바로 보입니다. 그래야만 사물의 전모全貌를 보고 실상實相을 바로 봅니다.
실상을 못 볼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급한 것은 역시 실상을 보는 것이 제일 급한 문제입니다. 우리 빵보다도 뭣보다도, 집보다도 뭣보다도 실상을 보는 것이 제일 급한 문제입니다. “입식불반入息不返 즉명이사卽命已死라.” 한번 나간 숨을 못 들이키면 그때는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허망한 인생이기 때문에 가장 급한 것은 역시 우리 본래 생명을 아는 것, 참다운 모습을 아는 것, 이것이 가장 급한 문제입니다. 참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있는 그런 열 가지 경계 이런 경계에서 가짜인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이나 천상을 버리고서 참다운 그런 즉 말하자면 참다운 내가 없다는 지혜, 내가 없다는 소위 망아忘我, 망령된 나를 버리고서, 참다운 진짜 나[眞我]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내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젊은 총명한 우리 불자들은 앞으로 이것을 증명證明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아의 도리를 알고서 참다운 진아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급한 거니까 아무리 사회가 혼란스럽더라도 우리는 먼저 선후를 바꾸면 안 됩니다. 먼저 참 나를 알기 위해서 정진할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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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왕생낙원문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往生樂願文
得生淨土報師恩 人能念佛佛還念
專心想佛佛知人 一切迴心向安樂
即見真金功德身 淨土莊嚴諸聖眾
籠籠常在行人前 行者見已心歡喜
終時從佛坐金蓮 一念乘臺到佛會
即證不退入三賢 一一池中華盡滿
華華總是往生人 寧合金華百千劫
不願地獄須臾間 各留半坐乘華葉
待我閻浮同行人 寄語娑婆修行者
念念精勤莫睡眠 乘此因緣生淨土
畢命為期到佛前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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