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엣프제(ESFJ)다. 16가지 MBTI 유형별 특징에 따르면 공감 능력이 꽤나 높은 유형에 속한다. 분명 어릴 적 나는 나밖에 모르는 철부지였는데, 언제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넌 주변 사람들을 어쩜 그렇게 잘 챙기니.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 정말 고맙다’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던 것 같다. 이런 내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잘 떠오르지는 않는데, 어쩌면 중학생 시절 도덕 선생님을 짝사랑하며 좀 더 착한 내가 되려고 했던 것이 작은 시작이었을까.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늘 관심이 기울어지는 나에게는, 사실 얼핏 보면 ‘프로 공감러’ 처럼 보이게 해주는 소소한 능력이 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이 눈시울을 붉히면 나도 모르게 남들따라 눈물부터 나는 특별한 감정 동화 능력이 그 첫 번째이다. 그리고 누군가와의 아주 오랜 옛일이나 사소한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떠올릴 수 있는 조금 좋은 기억력이 그 두 번째이다.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같은 이야기를 매번 처음인 양 반복하지 않도록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하기 싫은 중요한 일에 대한 선택적 망각 능력은 더 탁월하다.)
그런데 그런 소소한 능력들의 효과는 딱 거기까지, 언젠가부터 나의 공감력은 그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오히려 나를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했다. 마음을 보태고 싶은 누군가를 불러내 위로의 말이라도 몇 마디 해보려다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경우 종종 어색한 나머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내 이야기만 주구장창하다 하다 헤어지곤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는 어설픈 공감 능력 따윈 쓰지 말자 마음 먹었다.
주변을 챙기며 소소한 행복감을 느껴온 나는 그동안의 어설픈 공감 스킬이 바닥난 탓도 있었지만, 사실 그 무렵엔 주변 챙기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거다. 늘 같이 돌봐주는 엄마, 애들 고모가 있었지만 세 아이의 워킹맘으로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왔던 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끝에 막막해졌다. 대학원 진학,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 등 여러 가지를 꿈꾸기도 했지만, 마치 3퍼센트쯤 남은 배터리로 30퍼센트 힘이 필요한 새로운 계획을 꿈꾸다 곧 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꺼져가는 휴대전화(p.94, <당신이 옳다>정혜신,해냄) 같은 나였다.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로 두통과 체기는 늘 달고 살고, 온몸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주변 이들보다 내가 더 시급했다. 쉼이 간절했다.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힘들어 보인다고 개입하는 것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다. 둘 다 불행해진다.(p.193) 제주-육지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늘 듣는 안내 방송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사고 발생시 산소 마스크는 본인 먼저 쓰고 아이들을 씌워라” 고. 사실 퇴직 같은 휴직을 하고 내려온 이 곳 제주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워주는 일 같은 것이다. 다행히 혼자만 오지 않고 세 아이는 데리고 제주에 왔으니, 그리고 전보다는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쌓고 있으니 같이 산소 마스크를 쓴 셈이라 치고 싶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할지 모르겠지만 곧 나는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본연의 엣프제로 돌아가 주변을 챙기며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고 싶다. 물론 이번엔 이 책에서 배운 몇 가지 적정 심리학의 노하우까지 장착해서 말이다.
나 자체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진심을 불쑥 털어놓게 만드는 강력한 질문인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p.102)”를 자주 써 보려 한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도. “공감이 필요한 순간에는 온 체중을 다 싣는 다정한 공감자로, 공감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했을 때는 전사처럼 싸울 것”이다. 그렇게 ‘다정한 전사’(p.212)로 변신해 봐야겠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때는 ‘바른말’ 즉 충조평판 (충고·조언·평가·판단)하지 마라,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p.297)”는 저자의 수 십년의 경험치도 온전히 믿어보련다.
다 함께 모인 오늘 저녁 식사 자리, 오늘도 아이들은 서로 질세라 각자 하루 속에 느꼈던 서운했던 일들을 늘어놓는다. 어떻게 하루도 아무 일 없는 날은 없는지, 계속 듣고 있자니 아이들 밥공기의 밥은 줄어들지 않고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한다. 그러나 오늘은 이 책을 다시 완독한 날, 평소였으면 작은 일에 상처받는 아이를 두둔했다가 더 소심쟁이가 될까봐 했을 법한 “그 정도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뭐 그런 일로 그래, 얼른 밥이나 먹자.” 라는 급 화제 전환성 멘트를 내뱉지 않았다. 다정한 공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오늘의 나를 칭찬한다.
첫댓글 선생님의 상황과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보이셨네요. 글을 읽으며 글쓴이에게 공감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끼잖아요. 유미쌤 글이 그런 글이 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문단에서 '아이들의 이야기에 대화를 전환하지 않는 내가' 라는 문장이 어색해요. 평소에는 그랬는데 오늘은 아이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는 뜻이죠? 헷갈려서 그 부분을 다시 읽었어요.
제주에서 충전 만땅으로 하고 오시길요~
미소샘..늘 제 글에 다정히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 부분은 이해하신게 맞아요. 평소에는 얼른 밥이나 먹자..했다면 어젠 좀 들어줬다는 얘기였는데..술술 안읽히는 거라면 그건 바로 수정이 필요한 지점..^^;;;
아마도 선생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제주에 계신게 아닌가 합니다. ^^ 저는 본디 여리여리 눈물 많고 감성이 충만한 ISFP였는데 아이들 키우다 보니 애들과 있을 때는 판단하고 명령 내리는 ISTJ가 되었더라구요. 애들한테 징징거리지 말라고 눈 동그랗게 뜨고 말하기도 하구요.. 때때로 부모의 판단과 결정이 아이들의 안전망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요. 물론, 나 자신도 지키기 위함도 있구요. 다음에 아이들과의 에피소드들도 듣고 싶네요. 셋, 아무래도 덕분에 이벤트가 많죠^^;;
와, 유미 샘. 마지막 단락, 너어~~~무 좋습니다!!!
근데, 프로 공감러가 어쩌다 어설픈 안절부절이 된 건지, 그 상황이 복잡해서 이해가 잘 안됐어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불러냈다고?)
특히, 3번째 단락에서 제주도로 오게 된 계기가 중요하게 등장하는데요. 워킹맘으로 지쳐가는 시기 묘사한 문장이 길어요. ~~했던 ~~하지만, ~~했다./ ~~했지만, ~~같은 나였다. / 내가 왜 지쳤는지에 대한 설명이 복잡하게 돼 있어요. 그러다보니, '아, 이 사람이 진짜 힘들었겠다. 지쳤겠다!'가 바로 와 닿지 않고. 아.. 뭔가 잘 모르겠지만 힘들단 얘기구나 이렇게 돼버려요 ㅠ
mbti는 엣프제가 어떤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굳이 제목으로까지 안쓰셔도 될 거 같아요.
수영 못하는 이가 구조하려한다는 인용은 아주 좋습니다. 전하려는 내용에 딱 들어맞아요.
마지막 단락은 진짜 좋아요. 밥은 줄어들지 않고,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아, 어쩜 좋아. 너무 그림같이 환히 그려져요. 공감 백퍼!
"밥은 줄어들지 않고,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하, 정말 좋은 문장이네요!!! ^^
유미 샘, 한 권의 책을 읽고 바로 실천하시다니!! 아주 훌륭하십니다! 저도 칭찬해 드립니다~~ㅎㅎㅎ
제주도에서의 밧데리 충전~ 너~~~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