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시조 소판공 사단비(中始祖蘇判公祀壇碑) 역문(譯文)
고래(古來)로 조상(祖上)의 묘(墓)를 실전(失傳)하면 망묘설단(望墓設壇)하여 향사(享祀)를 받드니 이는 후손(後孫)들이 추원보본(追遠報本)하려는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의 발로(發 露)이도다. 소판공(蘇判公)의 휘(諱)는 거명(居明)이요, 관(貫)은 경주(慶州)이며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휘 알평(諱謁平)의 원대손(遠代孫)으로 관(官)은 소판(蘇判)이시다.
표암공(瓢巖公)이 옛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으로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에 강림(降臨)하시어 알천 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으로 사로육촌(斯盧六村)의 수장(首長)을 맡아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창시(創始) 하시고 기원전 오십칠 년(紀元前五十七年)에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新羅)의 초대왕(初代王)으로 추대(推戴)하신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유리왕 구 년(儒理王 九年)에 사성이 씨(腸 姓李氏)하고 태종 무열왕 삼 년(太宗武烈王三年)에 은열왕(恩烈 王)으로 추봉(追封)하여 대대(代代)로 진골(眞骨)로서 구백여 년(九百餘年)을 이어오며 규조(圭組)가 부절(不絶)하였으나 세구년심(世久年深)하고 병화(兵火)로 문헌(文獻)이 무징(無徵)하여 시조(始祖)로부터 소판공(蘇判公)에 이르기까지 계대(繼代)를 잃었으나 목은 이색선생(牧隱李穡先生)이 익재공(益齋公)의 묘지명(墓誌銘)을 찬(撰)하면서 시조이 후(始祖以後)는 궐(厥)하고 소판공(蘇判公)을 원대손(遠代孫)으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계대(繼代)를 기록(記錄) 하니 중시조(中始祖)로 숭중(崇重)하는 소이(所以)이다.
소판공(蘇判公)은 신라 말(新羅末)에 세전(世傳)되는 가업(家業)을 승습(承襲)하여 관위(官位)가 소판(蘇判)에 이르니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은 왕족(王族)인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으며 관계(官階)는 삼품(三品)이다. 우리 경주이 씨(慶州李氏)는 중시조이 후(中始祖以後)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이어오며 천년여세월(千年餘歲月) 동안 수(數)만은 위인(偉人)들이 계셨으니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휘 총섬(諱寵暹) 성암공 휘 인정(誠菴公諱仁挺) 문효공 국당(文孝公菊堂) 휘 천(諱蒨) 문충공 익재 휘 제현(文忠公益齋諱齊賢) 계림부원군공 휘 규(鷄林府院君公諱揆) 석탄공 휘 존오(石灘公諱存 吾)는 고려사(高麗史)에 기록(記錄)되었으며 영의정 백사공 휘항복(領議政白沙公諱恒福), 임란공신 충무공 휘 수일(壬亂功臣忠武公諱守一), 영의정 운곡공 휘 광좌(領議政雲谷公諱光佐), 영의정 오천공 휘 종성(領議政梧川公諱宗城), 영의정 귤산공 휘 유원(領議政橘山公諱裕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記錄)되어 역사(歷史)에 빛나며 조선조(朝鮮朝)에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가 179인이요. 무과급제자(武科及第者) 441인이며 상신(相臣)은 8인이고 공신(功臣)은 12인이요. 순절신(殉節臣)은 6명, 문형(文衡)은 5인이며 청백리(淸白吏)는 5인이 녹선(錄選)되어 삼한갑족(三韓甲族)이요, 국중명벌(國中名閥)로 회자(膾炙)되었다.
근세(近世)에는 독립지사(獨立志士)인 보재공 휘 상설(溥齋公諱相卨) 독립지사(獨立志士)인 우당공(友堂公) 휘 회영(諱會榮) 대한민국초대부통령 성재공 휘 시영(大韓民國初代副統領省齋公 諱始榮) 삼성(三星) 그룹회장 호암공 휘 병철(會長湖巖公諱秉喆) 제십칠대 대통령(第十七代大統 領)을 역임(歷任)한 청계공 명박(淸溪公明搏)은 우리 경주이 씨(慶州李氏)의 명예(名譽)를 빛낸 위인(偉人)으로 청사(淸史)에 빛나리라.
이외(以外)에도 거향석학(巨鄕碩學)이 기라성(綺羅星) 같이 많으나 다 기록(記錄) 하지 못한다. 우리 경주이 씨(慶州李氏)는 이 씨(李氏)의 시원(始原)이며 명문(名門)의 표상(表象)으로 전국각지(全國各地)에 산 거(散居)하며 3백여 만 명의 종세(宗勢)를 자랑하니 본종(本宗)은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 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판전공파(判典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교감공파(校勘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로 분파(分派)하여 화벌(華閥)을 자랑하는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며, 분적종(分籍宗)은 합천(陜川), 재령(載寧), 원주(原州), 장수(長水), 아산(牙山), 우계(羽溪), 진주(晋州), 차성이 씨(車城李氏)이다.
오호(嗚呼)라 소판공(蘇判公)의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여 향화(香火)가 무궁(無窮)할 것이로되 수백 년(數百年)의 세월(歲月)이 흘러 생졸(生卒)과 덕업(德業)과 배위(配位)마저 민멸(泯滅)되고 분묘(墳墓)마저 실전(失傳)되어 향사(享祀)도 받들지 못하니 후손(後孫)들의 비통(悲痛)함이 하늘에 이르렀도다.
거금(距今) 150여 년 전인 1880년에 판전공파(判典公派)의 양천문중(良川門中)에서 향계 (鄕契)로 자금(資金)을 마련하고 지역유림(地域儒林)과 더불어 35세의 원영공(源榮公)이 주간(主幹)하여 경주부역 내(慶州府域內)였던 지금의 울산시(蔚山市) 울주군(蔚州郡)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天) 마을 후원(後園)에 옛적 준례(準例)에 따라 흙을 쌓아 묘단(墓壇)을 만들고 양호단(良湖壇)이라 명명(命名)하였으니 차(此)는 양호정사(良湖精舍)에 기인(起因)함이요.
궁벽(窮壁)한 양천문중(良川門中)의 효사(孝祀)는 종족사(宗族事)의 미담(美 談)으로 순풍(順風)처럼 전국(全國)에 알려져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귀감(龜鑑)으로 칭송(稱 頌)되었으며 전국(全國)에서 유일하니 매년 9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享祀) 해오다 유구한 세월 속에 묘단(墓壇)이 황폐(荒廢)해지니 1988년 무진(戊辰)에 판전공파대종회장 규백공(判典公派大宗會長圭栢公)과 도유사재우공(都有司 載雨公)의 주간(主幹)으로 개사초(改沙草)하고 사단비(祀壇碑)와 신삼문(神三文)을 세우고 곡장(曲牆)을 둘러 단역(壇域)을 정화(淨化)하고 향사일(享祀日)을 9월 하정일(下丁日)로 변경(變頃)하였다.
이후 2005년부터 양호단소정비사업(良湖壇所整備事業)이 추진(推進)되어 장구(長久)한 논의(論議)를 거쳐 을미년(乙未年)에 소판공(蘇判公)의 묘단(墓壇)을 웅장(雄壯)하게 조성(造成)하고 사단비(祀壇碑)를 건립(建立)하며 석등(石燈)과 문인석(文人石)을 갖추어 성역화(聖域 化)하였다.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은 진골수지(眞骨受之)라 하였으니 진골(眞骨)은 귀족(貴 族)이라 금차(今次)의 성역화(聖域化)로 소판공(蘇判公)의 단소(壇所)가 법도(法度)에 맞게 갖추어졌으니 아름답도다. 우리 종친(宗親)들이 조상(祖上)의 은덕(恩德)을 기리며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는데 감회(感懐) 또한 새로우며 비로소 적년(積年)의 염원(念願)이 완성(完成)되니 일모(一毛)의 유감(遺憾)도 없도다.
금차(今次)의 위선사(爲先事)에 중시조(中始祖)의 38세손으로 중앙화수회필우회장(中央花 樹會弼雨會長)과 중앙화수회덕우고문(中央花樹會德雨顧問)이 거금(巨金)을 표성(表誠)하여 성역화(聖域化)의 초석(礎石)을 놓는 위선사(爲先事)의 모범(模範)을 보이셨으며 판전공파대 종회장규백(判典公派大宗會長圭栢)과 사무처장상로(事務處長相魯)가 대소사(大小事)를 주간(主幹)하여 대역사(大役事)에 불후지공(不朽之功)하였다.
명(銘)에 쓰노니 忠孝名閥 詩禮傅常 祖宗積善 後孫繁昌
(충효명벌 시례부상 조종적선 후손번창)
惟公德行 士林景仰 聖諱貞石 庸示無彊
(유공덕행 사림경앙 성휘정석 용시무강)
檀記四三四八年乙未 九月晩秋日 蘇判公三十八世孫 熙雨 謹述.
(단기 4348년(2009) 을미 9월 만추일 소판공 38세손 희우 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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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중시조 소판공 사단비(中始祖蘇判公祀壇碑)
公仕新羅官至蘇判按新羅官制蘇判迎判達官名蘇判惟眞骨受之眞骨王族也竊惟吾始 祖立赫居世贊鴻功受鐵券則于其子孫宜爲世祿之家與國咸休子子孫孫名必不沒 於國史 家乘之筆而有高麗牧隱李公去古末遠撰益齋墓誌只曰始祖赫居世佐命大臣李某而己至 於其後蘇判以下而歷서之蘇判以上豈知而故闕之也想於新羅之末公私 兵火之餘一代典 記灰燼殆盡而李氏之譜隨而亡失之故也嗟夫惟我始祖德盛功高世篤貞忠鷄林之李甲於 三韓而中失其系無籍可徵曷勝惜哉或者以公爲始祖之子夫始 祖爲赫居世功臣而太守公 爲新羅之季自羅而麗相去幾千載始祖以下太守上豈但二世而己乎其不合事情而無足信 也明矣.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