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곁에 계시는 하느님
김 미애 도미니카(용산성당, 아녜스반)
“성서 백주간 묵상 응모전은 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봉사자 말에 용기를 내서 그동안 공부한 구약성서를 뒤돌아보면서 느낌을 적어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명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데로 “예”하고 순명 하신 모습에서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산 제물로 봉헌될 뻔한 이사악의 봉헌된 삶. 장자권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형과 아버지까지 속이면서 쟁취한 야곱. '우리 축복도 우리의 신앙도,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며 쟁취하는 것이 아닐까?' 요셉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 분. 고통을 준 형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분이다. 나는 왜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맞지 않는다고 남의 탓을 할까?
출애굽을 공부하면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서 부르심에 응답하면 나는 단지 그분의 도구일 뿐인데 그런데 왜 나는 잘난 체를 할까?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뒤로 물러서시는 모습에서,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신명기 34,11)란 성서 구절이 생각났다.
광야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던 이스라엘 백성과 누군가에게 자꾸만 대들고 따지고 싶은 나의 모습은 참 닮은 꼴이다. 그런데 나는 괜찮고 남이 누군가에게 덤비고 따지면 보기가 싫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하느님을 화나게 했었나? 높은 언덕 우거진 숲마다 신당을 차려 놓고 우상을 섬겼다. 지금의 나도 많은 우상을 섬긴다. 돈, 자존심, 질투심, 이란 우상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련하다면 지금의 나도 미련하지 않은가?
열왕기를 공부하면서 다윗을 만났다. 골리앗을 때려눕힌 소년 다윗에서 이스라엘의 기초를 튼튼히 하신 왕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다윗 왕도 실수가 많았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지적해준 예언자 나탄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깊이 통회하는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신 분이다. 나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남이 해주는 나에 관한 지적은 왜 고까운 것인가?
다윗왕은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너무 관대하다. 자신을 거역해서 반역한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아프다. 공부하지 않고 사고가 자유분방하다고 아들이 못마땅한 아버지도 얼마나 많은가? 남북이 갈라진 이스라엘에서 우리나라의 분단이 생각났고 바빌론 유배에서는 징용 간 옛 어른들과, 못살아서 북간도로 떠난 사람들 이민 간 사람들이 생각났다. “너희는 높은 것에서 독수리처럼 집을 짓고, 별들 사이에라도 사는 듯 싶을테지만 내가 너희를 거기에서 끌어 내리라(오바드야 1,4)” 야훼의 말씀이시다. IMF로 인하여 많은 가장들이 날개가 꺾인 독수리처럼 추락하니 않았나? 내 자신도 스스로 독수리가 되어 위만 향해서 올라 가려고 하고 있다 지금도.
하느님은 고통과 좌절을 통해서 나 자신을 하느님 앞으로 바짝 이끌어 주시는 것을 느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언제나 돌아오면 너희를 품어주신다.”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우리 주님께는 아주 쉬운 일이다.” 짧은 말들이 고통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교훈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명언들이 성서에서 표절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축구선수는 90분을 축구공을 따라 뛰고 골프선수는 네댓 시간을 작은 공을 따라 정신없이 걷는다. 구약의 하느님을 따라 함께 한 2년이란 시간이 참 좋았다. 하느님과 함께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현실적인 상황이 변화된 것은 없지만 마음이 많이 하느님께 향해서 있는 것 같다.
“위의 학생을 성적 불량으로 제적함”이란 통지를 받았을 때, 나는 왜 비가 많이 오는 날 장례미사 때,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 올랐을 까? 나는 왜 남의 불행한 얼굴에서 내 고통을 잊으려 할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야훼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도우셨다.(1사무 7,12)” 정말 여기에 이르기까지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된다는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난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붙어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성서 구절도 생각난다.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시간들이 성서 백주간이었다.
“내가 너를 뽑아 놓고 버리겠느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야 4,9) 이처럼 정의의 오른 팔이신 하느님께서 아픈 마리아를 붙잡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함께 성서 백주간 공부를 하시던 마리아 지매님의 쾌유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