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합천 고령 탐방 자료(2023. 12. 19)
거창사건추모공원 역사교육관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발단은 1950년 12월 5일에 공산군 5백여 명이 거창군 신원면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습격으로 경찰관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곳에 주둔했던 나머지 경찰관들은 경찰지서를 공산군들에게 빼앗기고, 거창읍으로 후퇴하자 이 지역은 공산군의 세상이 되었다. 그 뒤 1951년 2월 8일 11사단 산하의 공비토벌 전담부대가 신원면을 다시 탈환하였고, 이 부대는 경찰관들만 과정리에 남겨놓은 채 산청군으로 철수하였다. 이튿날 지서가 다시 공비의 습격을 받자 공비토벌 전담부대는 또다시 신원면으로 되돌아와 공산군들과 접전을 벌여 양쪽에서 몇십 명이나 전사자(戰死者)가 발생되었고, 경찰지서는 다시 국군에 의해 완전 수복되었다.
그다음 날인 2월 10일에 제9연대장 오익경 대령의 명령을 받은 제3대대의 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신원면 주민들 중에서 공산군에게 협력한 사람을 가려내려고 대현리, 중유리, 과정리, 와룡리 등의 주민들을 과정리의 신원초등학교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신원초등학교의 교실과 복도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 속에는 젖먹이 아기에서 90세 노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그들 중에서 경찰가족과 군인가족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의 골짜기로 끌고 가서 총살시켰다.
그러고는 근처에 쌓아두었던 장작더미를 송장 위에 덮고 불을 질렀다. 박산골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체 더미 속에서 한 여자가 살아 나와 나중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당시 11사단의 사령관은 최덕신장군으로, 훗날 외무부 장관, 천도교 교령이 되었으나,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가 나중에는 월북을 했다. 그가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최고위급으로 월북한 셈이다.
거창 양민학살 현장
이 참혹한 사건은 그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3월 29일에 거창 출신의 국회의원 신중묵 씨가 국회에서 비공개 발언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이 들끓었으나,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공식 발표도 하지 않았다. 그후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유엔에서도 발칵 뒤집혔다. 그때 영국의 신문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라고 논평하였다.
국회에서는 마침내 조사단을 구성하여 4월 7일에 거창 현지로 보냈다. 그러나 국회 조사단이 신원면에 채 닿기도 전에 ‘공비(共匪)’의 습격을 받았는데, 나중에 이 습격 사건은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중원 대령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감추려고 꾸민 가짜 공비 사건임이 밝혀져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하였다. 이날 습격사건은 소대 병력의 공비 토벌 국군이 공비 복장을 하고 숨어 있다가 국회의원들에게 총을 쏘았던 것이었다.
이렇듯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4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신원면 지구의 공산군 소탕을 위해 그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령을 내렸음에도 듣지 않아 한동석 소령이 공비에게 협조한 주민 187명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형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박산골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재판도 받지 않았고, 그 수효 또한 정부에서 발표한 것보다 두 배를 훨씬 넘는 5백 명 이상이었다. 그리고 뒷날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거창사건유족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곳에는 젖먹이에서 13~ 14세까지의 어린이들이 절반가량이나 섞여 있어 그들이 모두 공비에게 협조했다는 것은 사실상 거짓임이 드러났다. 또 유족들이 작성한 명세서에는 그때 공비 협력자로 희생된 사람들은 총 719명이었다. 이 숫자는 박산골, 탄량골, 청연마을과 덕산리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합해졌기 때문이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1951년 5월 14일 국회에서는 ‘거창사건’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결국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군법회의를 통하여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듬해에 곧바로 특별사면으로 모두 풀려났으니, 거창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만 갔다. 제주도 4ㆍ3사건과 함께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남은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아직껏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슷한 사건이 대구 인근인 경산에서도 자행되었다. 경산시 평산동에 있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일명 경산 안경공장 학살사건)으로 한국전쟁 기간에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대구 부산 감옥소의 재소자 1,400여 명과 보도연맹 회원 2,100여 명 등 총 3,500명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경부터 9월 20일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산 평산동 코발트 공장 보도연맹 회원 학살장소
합천 조식 선생 생가 외토리 마을 회관에서 100m가량 안쪽으로 들어가면 <남명 조식 선생 생가>가 나온다. 토담 길이 정겨운 골목으로 들어가 약간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는 생가를 몇 년전에 새로 개축하였다. 여느 위인처럼 남명도 출생과 관련한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 온다.
새로 조성된 남명 조식 선생 생가
예언가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에 남명 외할아버지는 자기 손자가 곧 태어나길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새로 집을 지어 남명 부모에게 주었다. 남명의 부모는 장인이 지어 준 새집에서 살면서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같이 꾸었다. 그꿈이 태몽이면서 길몽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생가에서 200m쯤 내려오면 평평한 들에 남명 선생을 제향하는 용암서원이 있다. 서원 바로 앞에는 전주 부윤으로 재직 중이던 이윤경(영의정 이준경의 형)에게 쓴 편지를 새긴 빗돌이 남명 흉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이 편지에서 남명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이러하다.
“전주 부윤에게 보내는 글(與全州府尹書)에서 ~띠 집이 시냇가에 있어서 부엌에서 일하는 아이가 때때로 송사리를 잡아 오는데, 다만 그물이 없어 못가에서 땀만 흘릴 뿐입니다. 명주실이 있어야 그물을 짜 고기를 잡지요. 잡곡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오히려 고기 먹을 생각을 했으니, 분수에 넘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조식 남명 선생 흉상
용암서원의 앞뜰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중년의 남명 흉상(胸像)은 그가 똑바로 바라보았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명종 임금을 천하의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일컬으며, 준엄하게 비판한 내용이 일명 단성소(丹城疏)에 담겨있다. 이것은 남명이 쉰다섯 살에 명종은 단성 현감로 제수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했던 남명은 그의 강직한 직언을 담아 1555년에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을묘 사직소(乙卯 辭職疏)를 다음과 같이 올린 것이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는 듯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합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해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왕도(王道)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사직소에서 남명은 조정의 관료들이 서로 당파 싸움에 국정은 뒷전이고, 부패와 무능으로 국가가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며 왕이 왕답게 몸과 마음을 다잡고 행동하라고 꾸짖고 있다. 생살여탈권을 쥔 군주에게 누가 감히 이렇게 직언(直言)을 할 수 있겠는가? 빗돌에 새겨진 상소문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노라면 통쾌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이 떨리기도 하다. 원래 용암서원은 수몰된 합천댐 지구에 있었던 것을 댐의 조성으로 1987년 지금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용암서원
의(義)를 모은다는 솟을대문에 적힌 집의문(集義門)을 지나면 거경당(居敬堂)이 나온다. 뒤에 남명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처사(處士)’라 적힌 신위가 있을 뿐이다.
용암서원 뇌용정
오른쪽 기둥부터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이라 적혀 있다. 이 주련을 의역(意譯)하면 '죽은 듯 하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같은 소리 낸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뇌룡정(雷龍亭)을 나와 주위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하판⸱상판⸱지동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오는 삼거리에 이르자 승정원 판교(정삼품) 조언형(남명 부친)과 숙부인 이 씨(모친) 묘소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조언형(남명 부친)과 숙부인 이 씨(모친) 묘소 표지판
합천댐 물문화관 합천댐은 1982년 4월에 착공하여 1989년 5월에 준공하였으며 총공사비 2,621억 원이 투입되었다. 그리고 합천 대병면 회양리에 있는 합천댐의 정상에 있는 물문화관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우리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물의 소중함과 지구상에서 물 부족의 심각성을 알리고, 합천 다목적댐의 시설 현황과 기능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했다.
합천댐 물문화관 낙동강 지류인 황강에 있는 합천 다목적댐은 규모는 높이 96m, 길이 472m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저수량은 7억 9천만 톤으로 우리나라 다목적댐 16개 중 6번째로 큰 규모이다. 2012년 7월 세계 최초로 저수지 수면을 활용한 수상 태양광 Solatus(친환경 녹색 에너지)를 준공, 500kW 전력을 생산함으로써 상용화한 최초의 다목적댐이기도 하다. 합천댐 물문화관에서는 이러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고, 물에 대한 정보와 댐의 시설 현황도 살펴볼 수 있다. 합천 다목적댐은 합천호 주변으로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등 여러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으며, 수려한 경관 자랑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선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조선 최초요 마지막 왕사인 무학대사도 이곳 합천 삼가에서 태아났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나 자취가 모두 댐에 수몰되어버린 점이 안타깝고 애석하다고 하겠다.
합천댐 전경
함벽루(涵碧樓) 합천의 함벽루(涵碧樓)는 합천 읍내를 비켜 흐르는 황강 변에 세워진 작은 이층누각이다. 1321년 고려 충숙왕 때 합주 지주사를 지낸 김영돈이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다. 함벽루에 서면 백사장이 있는 시원한 황강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함벽루 뒤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는데 이 바위들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이중 황색 바탕의 큰 글씨로 함벽루(涵碧樓)라 새겨진 글이 송시열의 글씨이다.
합천 함벽루
함벽루 주변은 연호사라는 절이 있다. 절 옆에 함벽루가 바싹 붙어 있어서 함벽루가 마치 연호사의 누각 같은 느낌이 든다. 백제 의자왕은 윤충에게 2만 대군을 주어 신라의 대아성을 공격하게 했는데 백제군은 이 전투에서 대아성을 함락하고 성주인 김품석과 그의 아내를 사살했다. 김품석의 아내는 훗날 29대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딸이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여 이 전투에서 희생된 신라 장병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절이 연호사다. 퇴계 선생 시
北來山陡起(북래산두기) 북쪽엔 산이 험하게 솟아있고 東去水漫流(동거수만류) 동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네. 鴈落藩州外(안락번주외) 기러기는 물가 경계 밖에 떨어지고 烟生竹屋頭(연생죽옥두) 연기는 대나무숲 속 집 위로 피어오른다. 閒尋知意遠(한심지의원) 한가로이 찾아드니 느긋하기 그지없고 高倚覺身浮(고의각신부) 높은 누각 기대어 서니 강 위에 뜬 것 같네. 幸未名韁絆(행미명강반) 다행이 관직에 얽매이지 않아 猶能任去留(유능임거류) 가고 머무는 것이 이렇게 자유롭다네. 함벽루/남명 선생 시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 같이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흐르는 강물은 아득하여 앎이 없다네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뜬 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높은 바람이 오히려 깨어 버리네
*남곽자(南郭子) : 장자(莊子)의 ‘제물론’에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앉아 있었는데 그가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는데 멍한 모습이 정신이 나간 듯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인 안성자유가 걱정되어 대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무아지경에 빠진 남곽자를 시에 인용했다.
대야성(大耶城) 대야성은 원래 가야 땅이었으나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후,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도 접경지역이 생기게 된다.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백제의 성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추진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27대 위덕왕 후부터는 28대 혜왕, 29대 법왕까지는 모두 단명으로 재위 기간이 1년도 안될 정도로 짧았으며 그로 인해 정치적 혼란하여 나라 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30대 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그의 사후에 즉위한 31대 의자왕도 즉위하여 아버지 무왕의 정책을 유지해 나가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하게 쥐하였다.
새로 세운 대야 성문 신라는 이미 진평왕 재위 말기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이 시달렸고,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하여 백제에게 수많은 성과 영토를 뺏기는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장군이 대야성의 도독(都督)으로 부임한다. 신라의 도독(都督)은 인근 지역의 병력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조선의 병마절도사와 비슷한 직책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야성이 신라의 주요한 군사 요충지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은 그곳에서 큰 사고를 치는데, 부하인 사지(舍知) 검일 부인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를 빼앗아 버렸다. 그로 인해 김품일은 검일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이다. 그리고 642년 8월, 백제의 의자왕은 좌평 성충의 동생인 윤충 장군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신라를 침공하도록 하였다. 윤충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의 수로를 차단한 후, 대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그 위세에 놀란 김품석은 감히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해서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다. 이를 본 성안 백성들과 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모척이라는 인물도 전투 전에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와 내통하면서 전투 중에 백제군에게 대야성의 내부 사정을 수시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에서의 대야성 전투
대야성은 외부의 지원군도 기대하기 어려운데 성안의 곡식 창고마져 타버려 저항할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할 총사령관인 김품석은 안절부절못하는 등 지도부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품석의 측근이었던 아찬 서천(西川)이 성루에 올라가서 백제군 진영의 윤충에게 "만약 모두 살려준다고 약조하면 항복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윤충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공과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될 것이요.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리다."라는 긍정의 답을 듣고 서천은 김품석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때 사지(舍知) 죽죽(竹竹)이라는 젊은 장수가 "백제는 말을 자주 바꾸는데 그 말을 어찌 믿나. 쥐새끼처럼 삶을 구걸하느니,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김품석은 항복을 결정하고 성문을 열어젖힌다. 그러나 윤충은 죽죽의 말대로 뒤통수를 쳤다. 성문을 열고 항복한 신라의 병사들이 나서자마자 매복해있던 백제의 병사들은 일제히 공격하여 그들을 죽여버렸다. 이 소식에 당황한 김품석은 결국 아내 고타소와 자식을 죽인 후,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만다. 많은 병력이 대거 이탈하였고, 총지휘관마저 자결하여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죽죽은 홀로 병사들을 수습해 백제군와 맞서 싸우기를 결정하였다.
열려있던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울 채비를 하자 사지 용석(龍石)이 "이미 불리한 상황이니, 차라리 항복해서 목숨을 챙겨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죽은 위엄을 내보이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대의 말은 합당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으며 꺾일지라도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이다. 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가 죽죽과 용석 둘 다 전사하고 대야성은 결국 함락당하게 된다. 비록 죽죽은 죽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이름의 의미를, 자신의 신념을 지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김춘추는 대야성이 함락된 가장 큰 책임이 김품석에게 있었으나 장인인 자기도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이를 만회하고자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로 군사 외교를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김품석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옥문곡(합천과 성주 사이) 전투에서 붙잡은 8명의 백제 장수와 교환하였고, 백제에 투항한 검일과 모척은 훗날 백제가 멸망(660년)하여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붙잡혀 처형 당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모두 흥륜사의 노예가 되었다. 문무왕은 붙잡은 백제 왕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게 하였으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하고 대야성의 원수를 갚음을 천명했다. 그런데 부여융은 당나라에 끌러갔으나, 당나라에 귀순하여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군정기관인 웅진도독으로 복귀한다. 정작 최대의 원수 격인 윤충 장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었다. 만약 윤충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했거나 백제 멸망 이후 신라가 윤충을 잡아다 죽였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기록이 있을 텐데 그런 기록은 없었다. 그리고 죽죽은 그 공을 인정받아 6두품인 급벌찬으로 추증되었으며, 신라 조정은 그의 가족들을 경주로 불러들여 골품 신분을 주었다.
합천 영상테마파크 합천영상테마파크는 2000년대 건설한 영화, 드라마, 광고, 뮤직비디오 세트장으로 1920년대에서 80년대 시대물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20인 이상 단체는 성인 3천 원, 장애인, 국가유공자, 합천군민, 6세 이하 등은 무료이나, 입장 시 신분증 및 서류가 필참이다.
옛 서울역 세트장 개장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3월~10월에는 6시까지, 11월에서 2월까지는 5시까지로 매표 마감은 폐장시간 1시간 전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무이다.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많은 작품이 촬영되었다. 드라마 중 미스터 싼샤인, 비밀의 숲, 화유기, 영화 암살, 써니, 밀정, 박열, 택시 운전사, 강철비 등 190여 편의 영상물이 촬영된 장소라고 소개하고 있다.
옛 서울 거리 세트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90년대 초중반을 표현하는 세트들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실제 영업하는 식당도 있어 들어가서 식사하면 기분이 새로울 것 같다. 단, 현재 촬영 중이거나 촬영 준비 중인 곳은 입장을 제한된다. 청와대 세트장은 영상테마파크 산 위에 있어 걸어가기에 오래 걸리므로 모노레일을 타고 가야 하는데 13세 이상은 모노레일 왕복 5천 원의 이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청와대 세트장 고령 대가야수목원 '대가야수목원'은 원래 2008년에 '산림녹화기념숲'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었는데 식민지 수탈과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산림을 푸른 산으로 가꾼 산림녹화 사업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건립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2016년에 '대가야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숲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과 환경의 중요성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배울 수 있다. 대표 시설로는 숲의 역할과 혜택, 산림자원의 조성 과정, 낙동강 유역 산림의 녹화 과정을 그래픽과 영상물로 전시 연출한 산림문화전시실이 있다. 이 밖에 전국의 수석 수집가들이 기증한 수석을 전시한 수석 전시실, 기념숲과 금산재를 연결하는 산림 등산로 등이 있다.
고령 대가야수목원 입구
고령 대가야수목원 전경
고령 우륵발물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 있는 박물관으로 2006년 3월 31일 개관하였다.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 수집, 보존, 전시하여 국민이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전국 유일의 우륵과 가야금 테마 박물관이다. 맑고 깨끗한 가야금의 고장 고령에서 우리 민족 고유 악기인 가야금과 가야금 창시자인 우륵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며, 잊혀 가는 전통음악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고령 우륵박물관 토기에 장식된 토우, 금동벡제대향로 등 유물 속에 남아있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복원한 복원품과 기타 현악기 복원품, 그밖에 우리나라 각종 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는 일반 성인 2,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1,500원이며, 대가야박물관과 왕릉전시관까지 둘러볼 수 있는 통합입장권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륵박물관 내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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