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성전의 제단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복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하나님 앞에 진설된 떡을 먹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업무수행에 대한 특권의식만 알았을
뿐입니다. 지금까지도 진설병의 떡의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으니
그들이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들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복음으로는 아직 이방인과 같이 되어 미전도 종족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롬11장에서 말한 대로 그들도 반드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도 성직이나 직분에 대한 의식을 크게 여기고 교인의 의무나
예배시간에 참예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에 모이는 예배에 교회의 사활을 거는 분들을
보면서 과연 저 사람이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의심케 하는 분들이 참 많이 보이더군요. 예배나 성만찬이 16-17절과 같이
그리스도의 한 피와 한 떡에 참예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숭배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우상 숭배하듯 섬긴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을
우상처럼 받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간들의 숭배의식이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 있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그들을 애급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마음대로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돈(맘몬)이 우상화 되는 이유는 돈의 힘에 대한 의식 자체가 우상화되는 것입니다.
돈은 구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이 사람들에게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신앙 중에 가장 확실한 신앙은 바로 돈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간혹
만나도 큰 불편이 없지만 돈은 잠시라도 떨어지면 못 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성도들을 가난뱅이를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돈 같이
귀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물질의 결핍을 허락하십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는 구원, 영생, 거룩 같은 것은 멀리 두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돈은 언제나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용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려면 긴긴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여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으로 점철이 되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 바뀌어야만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보화가 무엇이냐에 따라 자신을 움직이는 주인이 좌우 됩니다.
그리고 영적 도덕관이 인간적인 도덕관으로 발전해야 온전하게 됩니다.
양심이나 윤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저절로 되어져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피동이지만 그 안에서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를 따라 주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드디어 능동적인 행함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로 시편1편의 사람과 같고 8복이 이루어지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반복해야만 하는 겁니다.
우상숭배는 바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뒤집으면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의식적인 성만찬과 실제적 성만찬의 차이는 말씀을 통해 실제적인 성만찬이
되면 사실 의식적인 성만찬은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실제적인
성만찬이 이루지기를 갈망하면서 의식적인 성만찬을 계속해야 합니다.
실제적인 성만찬은 바로 주야로 그리스도의 동선을 따라 묵상하는 자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대속의 은총과 그 십자가의 도와
진리를 따라 거룩함을 얻어 그 영광으로 영광에 나아가는 묵상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행위는 행동 하나 하나가 단절이 되지만 삶은 연속입니다.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관계성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계속되는 삶은 관계성이 있어야만 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경을 읽는 자리에서 성경이 자신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이 된 자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자아를 포기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그 때부터 급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께서 내주 하시는 새 계명을 받기 전에는
아무도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가 안 됩니다. 원래 율법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마음만 원일 뿐 실제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생각을 하면
드디어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사랑이란 제스추어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래 참고 견디는 능력입니다. 태양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품격으로 뛰어 올라가야 합니다.
관용, 진실, 정직, 아량, 포용, 온유 등등...
그래서 딤후3:1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라고 하십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하심은 흡사 큰 바위얼굴을
보고 자라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 분과 관계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앙망하여 바라보므로 자라갑니다.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모범적인 도덕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다,
교회를 세우다 하는 의미입니다. 자유를 쓰기 위해 우상 숭배한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그 자유에 의한 행동에 대한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덕을 세우는 입장에서 자유의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유익은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서 쓰지만 하나님의 유익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컨대 네 번 잠을 잔 성숙한 누에는 스스로 자기의 집을 짓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바울은 나와 같이 성숙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24절에는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고전11:1) 반드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를 본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완고한 마음으로 믿음을 고정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본받는 비밀을 간직하고 부단히 경건의 훈련을 하여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되고 그 차례를 따라 그 뒤를 따라가며 본 받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25절에서 양심 때문에 갈등하면서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의 양심, 나의 자유는 오직 자신의 신앙만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신앙입니다.
28절 ‘누가 제물이라 말을 하면 알게 한 자의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율법아래에 있지 않지만
꼭 율법아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이 사회 속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 소금처럼 스며들어야 합니다.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부잣집 아들이 돈의 가치를
모르고 쓰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의 가치성을 모르고 자기의
유익만 위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사용하면 그 자유가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인이 자유를 누리고 그렇지 못하면 감옥에 들어갑니다.
율법은 감옥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는 이래라 저래라 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속에 든 것은 생각해 보지 않고 겉만 봅니다.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입을 틀어막고 함부로 떠들지 말고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25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묻지 말고 먹어라.
26절이 그 답입니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주의 것이므로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어떤 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먹어도 될까 먹지말까 따지지 말라 입니다. 종교적인 선입관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27-28절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 양심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공통점은 그리스도인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초청하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차이점은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들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술 문제입니다. 뇌에 지장 줄 정도가 아니면 그냥 마셔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머 그건 술인데 그리스도인이 술도 마시느냐’
하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딱 사절을 해야 합니다.
29절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판단을 받지 않도록 하라.
30절 감사함으로 먹으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먹는데 누가 비방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만 있으면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의식으로 금하고 있는 것들을 과연 ‘감사합니다’하고 먹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31절 남에게 거치는 자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33절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 바로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목사님 새언약에 대해 줄기차게 애기하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어떤 교회(제가 알고, 혹은 교제하는 형제)는 얼굴이 좀 우중충하고, 새신자가 와도 인사도 없고, 특히 일년 내내 밥 한끼 안사는 형제는 어케 설명 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
남의ㅡ유익은 고사하고, 자기 심심풀이 땅콩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참 좋은 질문이십니다. 죄인으로 출발한 인간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이며 자기 방어가 투철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아직 죄 가운데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새언약을 강조한다지만 그게 지식일지 성령의 내주 역사로 양식일지는 살펴봐야지요.
새 언약을 안다고 해도 진리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나아감이 없으면
들은 말씀이 결부 곧 믿음의 화합(히4:2)이 일어나지 않아 입으로만 시인할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좋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