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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의 기원 =무당산
서양에 제우스가 있다면 동아시아엔 황제 헌원씨가 있다는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인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
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 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6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
고, 119세가 되는 기원전 2598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가 황제기원이다.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군주로,
사마천은 헌원을 오제의 처음으로 <본기>(本紀)에 기록하였다.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였다고 한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을 묘사할 때는 한 손에 항상 헌원검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정복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세계에서가장 단단한 금속
으로 만든 검이라고 한다. 별거 아닐 수도 있으나, 당시 강한 철이
라는 것은 농업과 전쟁에서 필수 요인이었기에 황제의 * 헌원검은
전쟁은 물론 농경에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것을 암시한다.
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씨는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
(神)이다.제(帝)[6]는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였으며, 좀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자(子)성 왕실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사기》의<은 본기>에서도 상왕조의 태조 탕왕은 시조인 설
의 14대손이고, 설의 아버지는 오제 중 제곡 고신씨였으며, 제곡의
증조부가 황제 헌원씨로 기록되어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7] 따라
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존재를 고대의 위대한 인간 군주로 보는 시각이 퍼진 이래
로,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 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 《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
야기도 나온다. 그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상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주원장)의 희(姬)성 왕실
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했다.
'천자'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황제 공손헌원은 신화적으로 창조의 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기도 했으며,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배포한 것은 물론, 천문과 역산 등의 다양한 기술과 생활양
식을 구성해내어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었다고 한다.
[8] 신화상에서의 황제, 즉 신으로서의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
개가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가 움직
일 때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제는 많은 시간
이 흐른 후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었으며, 용
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었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
대로 주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황제는 비와 바람 등을 마음대
로 다스릴 수 있었다.[9]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
면서, 오행 중에 토(土)를 관장했으며, 그 자체로 전쟁의 신이었다
고도 한다.
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가 동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1,520종의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
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인 후
토는 유명(幽冥)세계의 통치자이자 귀신나라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황제는 신도와 울루에게 명령해 세계를 떠도는 귀신
들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염제 신농의 뒤를 이어 차지한 중앙의 상제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신들 중 중앙의 자리에서 사방을 관
리하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황제는 백성들의 질
높은 삶을 구축해낸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
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망이 높았던 군주였다고 한다.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황제를 위대한 인간 황제 공손헌원으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했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적이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먹을 것이 나면 섭취하며,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창, 방패, 수레(바퀴)[10], 옷, 글자, 거울, 60
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즉 안 만든 것
이 없다는 만능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이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거기다가 내용도 상당 부분이 신하이자 스승이었던 기백천사에게
공송헌원이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이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는데, 그중
14명이 부왕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고양씨,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대홍수를 다스린 곤과 우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
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
가 된다고 한다.
황제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
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
동쪽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
과의 주도권 싸움을 세 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한 후, 치우와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
다고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이 죽을
날을 선택하고 용을 타며 승천했다고 한다. 그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
가려고 하여,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
다는 기록이 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 번째 부인
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였는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
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
고 하는 여인이었는데 외모는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수시
로 바람도 피우고 다니며 결혼 생활을 개막장으로 해서 아내인 헤라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달리, 황제는 바람도
피우지 않았고 건전한 결혼 생활을 했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
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
이 실제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가 존재
했다고 볼 수 있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동아시아에서는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다.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
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
나 황제가 분실했다고 한다. 한 신통한 여인이 이 구슬을 얻자 황제가
되찾으려고 군사를 보냈으나, 여인은 이 구슬을 삼키고 바다에 몸을
던져 곧 말의 머리를 한 해룡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옌안 시에는 황제의 무덤이 실존하고 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승천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이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
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천하제일릉이라고도 부른다.
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 2020년 현재바이두백과에
황제릉을 검색하면 이쪽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황제기원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이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
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황제기원'은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받은 중국 지식인들이 창안
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
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
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
이 이를 보고 '황제기원'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사람에
따라 수백 년씩 널뛰기를 했으나[11] 1905년부터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
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요와 우가 실존했다면 훗날 헌원씨로 불리게 되는 요와 우의 고조
부는 황제기원보다 훨씬 수백년 뒤에 살았을 것이다.
5. 정체 논란
****중화 영화의 한 장면 ****
전생 검신 헌원검 (일명 진무검)
35권 24회차 삶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물건.
이름에서 알 수가 있듯이 삼황오제 중에서도 오제의 일원이자 삼황오제의 수장인 황제 공손헌원이 삼황 중 한명인 염제 신농의 후손인 치우와 겨룰 때 사용했다고 하는 전설의 신검이자 칠요 이상의 보물이자 최소 해방칠요 2개 이상의 가치를 지닌 혹은 그 이상의 물건으로 봉선의식과 관련된 물건이다. 봉선의식은 인간이 신에게 직접 소통해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 가능한 의식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의식을 따라 할 수는 있어도 권리를 결코 얻을 수가 없는 신성한 의식으로 이론상 불로불사를 얻는 건 가능하지만[1] 시행할 방법이 없고 권리가 없는 자가 함부로 치렀다가는 천벌을 받아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헌원검은 권리가 없어도 바로 봉선의식을 가능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헌원검만 있으면 권리, 시, 때든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신과 바로 거래가 가능하고 신과의 소통이 바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천의 대전이 끝난 후 황제 공손헌원이 인간에게 내린 후의라고 한다.
24회차 삶 41권에서 현재 헌원검은 이 세계에는 없으며[2], 헌원검이 지닌 진짜 능력은 황제 공손헌원과의 직접 소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차피 헌원검만 찾는다면 그 즉시 황제 공손헌원에게 인간을 구해달라고 읍소를 할 수가 있기에 굳이 칠요를 모으고 해방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유일한 후의인 이 헌원검은 물질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있고 설령 진본이 소실되었다 한들 이 세계 어딘가에 흩어져 있는 것이 정상이나 신격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세계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고 정말로 헌원검을 통해 황제 공손헌원과 소통이 가능하면 당장 삼황오제들부터 이 헌원검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헌원검은 신격에게는 무의미하지만 인간들 입장에서는 막대한 이득을 주는 것이다보니 어떤 누군가가 이를 불쾌히 여겨 바깥우주로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3]
그리고 백웅 본인의 27회차 삶에서 선지자와의 거래를 통해 헌원검이 언급이 되는데 선지자가 바보들이냐며 말을 하면서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선지자의 반응과 전생자의 직감을 보면 지금까지 백웅의 전생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타입문넷의 네티즌들은 여동빈의 사당에 있던 낡은 철검 혹은 의천검이 헌원검이 아닐까 의심중이고 타입문넷의 어느 한 네티즌이 쓴 글에 의하면 화룡신검이 헌원검일지도 모르고 헌원검에 대한 정보가 다 따로 놀고 있어서 현재 시점으로는 어느 게 헌원검인지 알 수가 없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27회차 삶 51권 4화, 신투지존이 '투선 예의 하인인 여축이 이 헌원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적어도 신화시대급 수준의 역사가 있고 실존하지 않은 의도적으로 흘려진 헛소문이고 삼황오제들은 이 헌원검을 쓸ㄹ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언급만 되지 않다가 30회차 삶 91권 15화 1725화, 상업의 권능을 사용한 사황 창힐에 의해 소환되는 것[4]으로써 드디어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5] 정체 또한 드러났는데 헌원검의 정체는 바로 만신을 파괴하는 자 치우의 뼈라고 한다.[6]
그러면서 같은 화(91권 15화 1725화)에서 헌원검에 대한 여려가지 진상 또한 드러나는데, 우선 사황 창힐이 이제까지 헌원검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꺼내지 못했던 것은 사황 창힐의 영혼에 이식한 것이었다보니 한번 꺼내면 두번 다시 넣을 수가 없었고 황제 공손헌원)을 포함한 삼황오제들이 이 헌원검을 쓸 수가 없는 것은 헌원검에 만신을 파괴하는 자 치우의 권능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7]
마지막으로 맨 위에 적혀있는 '헌원검만 가지고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신과 거래가 가능하다'라는 것은 사실 사황 창힐 본인의 권위를 상징하고 일부러 퍼뜨린 거짓소문이었다고 한다.[8]
30회차 삶 91권 16화 1726화, 사황 창힐이 내기결과에 의해 소멸된 후, 백웅이 헌원검을 쥐어잡자 예전에 만신을 파괴하는 자 치우에 의해 생겨난 뿔이 솟아오를 만큼 크게 반응을 하고 난생 처음으로 '기분이 좋다'라고 느껴질 만큼 막강한 힘이 들어옴을 느꼈다.[9] 그렇기에 백웅은 과거를 바꾸려고 했으나 순간 이 선택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것을 깨닫고는 별 수 없이 포기했다.[10]
[1] 전생검신 17권에서 봉선의식을 통해 소환된 오제 전욱이 백웅에게 신격과 불로불사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신이 될 기회를 버리려냐고 말을 했었다.[2] 이는 곧 헌원검은 인간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음을 뜻한다.[3] 옆에서 제갈사와 백웅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신공표 또한 헌원검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4] 황제 공손헌원이 사황 창힐에게 하사했다.[5] 이때 묘사되길 흡사 살아있는 생명체의 뼈와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6] 사황 창힐이황제 공손헌원이 만신을 파괴하는 자 치우에게 승리한 후 치우의 유골에 있던 척추뼈를 뽑은 후, 이를 검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7] 사황 창힐 또한 헌원검과 헌원검에 깃든 만신을 파괴하는 자 치우의 권능을 다룰 수가 없다고 한다.[8] 그렇다고 해서 신들과 교섭할 수가 있 것은 트린 건 아니었다고 한다. 사황 창힐로부터 헌원검의 진상을 듣게 된 백웅은 '이제까지 왜 천계의 모든 신선들이 헌원검에 대해 알지 못했고 전국옥새로 헌원검을 탐색해도 찾을 수가 없었고 27회차 삶 당시 왜 선지자가 헌원검에 대한 것을 듣고는 바보들인 거냐'고 말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9] 이때 백웅 앞에 과거를 바꾸겠냐는 창이 떴다.[10] 아직 백웅은 외신 알 카르다흐와의 바둑대결이 끝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이보다도 더욱 큰 기회를 잡기 위해서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와 더불어 진문공, 진목공, 부견의 시대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고 하며, 이는 지금의 무당산과 연관 되여 있며 헌원왕이 진무 대재 인것을 확인 했으니 중국 도교의 최고신인 , 또, 고대 중국 의 검신 중 최고의 경지에 신력이 가미된 **헌원검 (진무검)**의 반짝이는 푸른빛이 정의를 표현 한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