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단적 조류를 넘어선 시적 성취 - 김소월과 한용운
이상에서 1920년대 한국 시문학에 나타난 주요한 몇 갈래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정작 이 시기의 가장 탁월한 시적 성취는 이러한 집단적 조류나 운동에서 벗어나 있는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초기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김소월과 한용운이 그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초반 서구시에 경도된 당대 시인들과는 달리, 전통적인 문화와 삶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루었다. 문단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면서 이룩한 시적 성과를 묶어 각각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긴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김소월 시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모티프는 ‘님·집·고향’의 상실이다.¹⁹ 이 대상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제 대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이 근원적 존재들의 상실로 인한 설움과 비애를 지속적으로 노래하였다. 이러한 시세계는 나라 잃은 식민지시대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설움의 정조는 전통 시가의 원형적 정서인 ‘정한情恨’에 맥이 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안으로 새기는 여성 화자와 ‘님’의 존재가 그런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 정한의 세계는 민요조의 율격과 함께 김소월을 전통지향적인 시인으로 평가하는 근거를 이룬다. 이외에도 그는 전설과 민담, 역사적 사건과 인물, 민간풍속 등 다양한 전통적 요소를 작품 속에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전통지향성은 그의 시가 개인적인 감정에 탐닉한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려준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津頭江가람ᄶᅡ에 살든누나는
津頭江압마을에
와서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뒤쪽의
津頭江가람ᄶᅡ에 살든누나는
이붓어미싀샘에 죽엇습니다
누나라고 불너보랴
오오 불설워
싀새음에 몸이죽은 우리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엿습니다
아웁이나 남아되든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못니저
夜三更 남다자는 밤이깁프면
이山 저山 올마가며 슬피웁니다.
-김소월, 「접동새」 전문
김소월은 이 작품에서 당시 평안도 지방에 전해 내려오던 '접동새 전설'을 수용하여 재창조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의 사연을 담고 있는 전설을 이끌어와, 당시 나라를 잃고 슬픔에 빠진 우리 민족의 심정을 절실한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적 방법은 우리 민족 전체가 공유하던 구비문학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적 동일성의 감각을 일깨우는 동시에, 민중들의 집단적인 감수성에 기대어 시적 주체의 감정을 보편적인 정서로 일반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성취는 전설의 단순한 차용이나 반복에 그치지 않는 현대시적 변용과 재창조에서 찾을 수 있다. 1연의 접동새 울음에 대한 묘사에서 '아홉 오래비'를 변형시킨 "아우래비"는 접동새 울음의 생생한 청각적 이미지를 의미와의 연관 속에서 제시하는 독창적인 시어라 할 수 있다. 또한 2.3연에서 설화 구연자의 담담한 어조를 빌려 "옛날, 우리나라 / 먼 뒤쪽의"라고 하면서 전설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다가, 4연에 이르러 '오랩동생'과 겹쳐진 목소리로 '누나'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서러운 감정을 폭발시키는 수법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 과거의 먼 이야기에 불과했던 전설이 현재 우리 민족 모두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수용 양상은 그의 시가 즉흥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의 시세계는 일견 단순 소박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밀하고 섬세한 형상화 과정이 개재되어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평이하면서도 미묘한 울림을 주는 시어, 민요조 율격을 변주한 개성적인 리듬, 행과 연의 입체적인 구분과 정제된 시적 구조, 극적 화자와 시적 상관물의 활용, 역설적 어법 등은 모두 지적이고 의식적인 창작 태도의 산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실은 김소월이 예술의 형식성과 양식화의 거리에 대한 나름의 자각을 바탕으로 형식적 완미성을 추구했음을 깨닫게 한다. 이런 점에서 김소월은 근대시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통에 대한 방법론적 자각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의 시를 무절제한 감정의 토로나 직설적인 관념의 표백에 그친 당대의 많은 시편들과 구별 짓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전통에 대한 자각, 그리고 작품의 미적 구조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시대의 아픔을 일관되게 노래한 열정과 함께 이 시기 김소월의 시적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용운의 시에서도 '님'은 핵심적 비유로 기능하며, 전통적인 여인상을 환기하는 여성 화자는 주된 시적 주체로 나타난다. 님의 부재라는 시적 상황을 설정하여 부정적인 시대 현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김소월과 한용운이 시세계 전반에서 수용하고 있는 전통적 요소는 서로 다르며, 참된 가치를 상실한 부정적 현실에 대응하는 태도도 큰 차이를 보인다. 김소월이 민요와 설화, 민간 풍속 등에 내재된 소박하고 원초적인 민중적 감정에 기반하여 어두운 시대의 고통과 슬픔을 표출하는 데 주력하였다면, 한용운은 심오한 불교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시대적 절망을 극복하는 강렬한 의지와 남다른 정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며 사상가이자 승려이기도 했던 한용운은 전통 사상의 하나인 불교를 스스로 혁신하여 시정신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는 작품 속에서 불교적인 사유 체계를 바탕으로 님의 부재로 인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는 역설의 언어를 구사하였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중략…)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앗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부분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인 이 작품은 이러한 역설의 논리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의 전반부에 해당되는 제6행까지는 님과의 이별과 이로 인한 슬픔을 곡진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제7행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시상은 반전되어 희망과 믿음으로 옮아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진술의 밑바탕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한다는 불교적 깨달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를 때, '있음'과 '없음', '떠나감'과 '돌아옴'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한용운이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기다림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불교 사상에 크게 힘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를 시대의식과 결합하여 역사적 미래에 대한 믿음을 획득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주체적 자각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정신을 적절한 시적 형상을 통하여 작품으로 구현한 것은 시인 한용운의 성취였다. 긴 산문시형임에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시적 구조 속에서, 적절한 암시와 상징을 갖춘 역설의 어법을 구사하여 깊이 있는 진리를 드러낸 것은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수법이었다. 또한 추상적인 시의 내용을 여성 화자의 정감 어린 어조로 표현하여 친근감을 높이고 시의 생동감을 살리려 한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이러한 시세계의 특징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당대 시단의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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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종호, 「임과 집과 길-소월의 시세계」, 『세계의 문학』, 1977. 봄.
(전도현 , 고려대 교수 )
『한국 현대 시문학사 』 이승하 외 지음
2024. 10. 1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