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도 황홀한 슬픔의 실체와 깊이
유리창 1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출처 《정지용 전집 1: 시》(1994) 첫 발표 <조선지광》(1930.1)
정지용 鄭芝溶(1902~1950)
충청북도 옥천 출생, 《학조》 창간호(1926)에 <카페· 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0년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언어의 감각미(感覺美)에 주력한 이미지즘 계열의 시를 주로 썼으며, 이후 일제강점기 말 암흑기에 정신주의(견인주의)적 태도를 보여 주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1948), 《산문》(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1 새와 별의 이미지로 소환된 존재
<유리창 1>은 실제로 아들을 폐병으로 잃은 정지용의 개인적 경험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로서, 표현론적 관점에서 작품을 이해하고자 할 때 곧잘 인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안타깝고 슬픈 정회가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다. 혈육과의 사별, 그것도 어린 자식과의 사별이라니 그 지극한 슬픔의 폭과 깊이를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2004)를 읽으며 아들의 죽음을 겪은 어머니의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볼 따름인 독자의 입장에서, 이 시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유리를 닦는 행위는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일상을 견디기 위해 부르는 애달픈 비가(悲歌)로 보인다.
화자는 지금 유리창 앞에 서 있다. 시간대는 밤이다. 유리는 ‘차고’ 유리창에 입김이 서리는 것을 ‘언날개’를 파닥거리는 형상에 빗댄 것으로 보아 계절은 겨울일 것이다. 화자는 왜 겨울밤에‘열없이’, 유리창 앞에 서서 ‘입김을 흐리우’고 있는가? 죽은 아이를 놓지 못해서이다. 아이를 잃은 화자에게 유리창은 그냥 유리가 아니라 “차고 슬픈것이 어린거”리는 대상이며, 그것은 시적 화자의 마음의 그늘이 투영된 것이다.
2, 3행의 시구 “입김을 흐리우니 /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는 마지막 시행인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와 절묘하게 이어진다. 유리창에 서린 입김은 특정 형상을 만들어 내고는 이윽고 사라질 것이다. 시적 화자가 스스로 입김을 불어 유리에 만들어 낸 그 형상은 그가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는 죽은 아이이며, 그것은 ‘날개를 파다거리’는 새의 형상을 하고 있다. 왜 하필 새인가? 죽은 자식은 더 이상 지상의 존재가 아닌, 환영으로나마 잠시 곁에 머물다가 곧 날아가 버릴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입김을 통해 소환한 죽은 자식의 환영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진다. 온전한 날개가 아닌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 자식의 환영이 화자인 아버지의 마음을 때린다. 언 날개를 가진 새는 제대로 날 수 있을까?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부모의 곁을 떠난 자식의 모습은 이토록 서럽게 애처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었다가 유리가 맑아지면 다시 ‘입김을 흐리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에서 ‘~고’의 연속적인 표현은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보여 준다. 입김에 밤이 밀려 나갔을 때엔 비록 ‘언 날개를 파다’ 거릴지라도 새의 형상을 한 어린 자식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기에 화자는 계속 입김을 부는 것이다.
그러다 시적 화자는 유리창 밖의 어둠 속에 빛나는 존재인 ‘별’을 발견한다. ‘물 먹은 별’이라니, 먹먹해지는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적 화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이 고인 눈에 비친 별은 ‘물 먹은 별’처럼 잔잔히 번져 보일 것이고, 시적 화자는 날아간 새가 밤하늘의 ‘별’이 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반짝’이라는 시어의 앞뒤로 찍혀 있는 쉼표를 보라. 화자가 얼마나 반갑고 놀라운 마음으로 별을 발견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어지는 시어는 ‘보석처럼’이다. 반갑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환한 죽은 자식은 그렇게 보석처럼 빛나는 별이 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아버지는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 유리창의 이중성과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 시에서 유리창은 이중성을 띤다. 객관적으로 아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화자는 죽은 아이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그리워하며 일상으로 소환하고자 한다. 죽은 존재인 아이의 소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 유리창이다. 하지만 그 소환은 유리창에 비친 환영(새의 이미지)과, 유리창 밖의 밤하늘에 존재하는 상상적 대상(‘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유리창은 환상 혹은 상상과 현실을 매개해 주는 동시에, 환영과 상상으로부터 현실을 분리시키는 모순된 역할을 하는 이중적 소재이다. 부재와 존재,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에 유리창이 있는 것이다. 즉 화자는 유리창의 투명한 속성 덕에 아이의 환영인 ‘새’ 혹은 아이의 상상적 현시인 ‘별’과 만날 수 있지만, 유리창의 단절적 속성 때문에 오히려 현실과의 차단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일밖에 없다.
유리창은 시적 화자의 감정의 절제를 가능하게 하는 기능적 장치로도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감정의 상호 조응 및 긴장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주체의 감정을 대상으로 이월한 1행의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는 표현에서 출발하여, 8행에 이르러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빛나는 표현에 다다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리창이다. 유리를 닦으며 맞닥뜨린 ‘보석처럼 박힌’ 별을 보는 시적 화자의 눈은 반가움과 아픔으로 먹먹하게 젖어 있다(‘물 먹은 별’). 외로운데 황홀한 것은 가능한가. 이 시에서는 외로움과 황홀함이 포개어진 상태가 아니라 각자의 영역을 지닌 채로 나란히 있는 상태라 볼 수 있다. 흔히 모순형용 혹은 역설로 설명되곤 하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표현에는 죽은 자식의 상상적 현신인 ‘별’을 마주하는 아버지의 반갑고 기쁜 마음과,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자식의 부재를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그리움이 공존한다. 즉 상반된 두 가지의 정서가 빚어내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 작지만 깊은 읊조림과 감정 절제의 미학
슬픔에 온도가 있다면 어떠할까? 일반적으로 슬픔은 울음을 동반하며 울음은 열감을 띤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차고 슬픈 것’이라는 감정의 대위를 통해 슬픈 감정을 차가운 감각과 결합하여 자식을 잃은 애절한 부성을 꾹꾹 눌러 놓는다. 뿐만 아니라 ‘슬픈’의 주체마저 화자인 자신으로 특정하지 않고 어떤 대상의 속성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즉 슬프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유리라는 객관적인 대상에 슬픔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투영하여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라고 표현한다. ‘유리에 찬 것이 어른거린다’라고 했다면 객관적인 상황을 제시한 것이 되지만, ‘차고 슬픈 것’이라는 표현은 대상을 슬픈 것으로 인식한 화자의 주관적 감정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는 유리창의 차가움이라는 속성과 슬픔을 나란히 둠으로써 슬픔의 밀도를 대비적으로 강조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는 시인의 시적 지향과도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정지용 시인은 이 시에서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고 시적 정서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대치하는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적실하게 보여 준다. 슬픔의 극단에 서 있는 아버지의 발화임에도 감정이나 정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형용어는 ‘슬픈’과 ‘외로운’ 등으로 한정될 뿐이며, 심지어 ‘슬픈’은 화자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대상의 속성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 이 시의 시적 표현들을 문장 단위로 살펴보면 각각 ‘어린거린다.’, ‘파다거린다.’, ‘백힌다.’, ‘날러갔구나!’라는 서술어를 지닌 네 개의 문장으로 나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이렇게 나지막하게, 이렇게 덤덤하게 읊조릴 수 있다니. 이러한 감정의 절제는 유리에 비치는 새의 형상,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밤의 이미지, 보석처럼 박히는 별이라는 선명한 이미지와 섬세하게 조응한다.
아마, 시인이 마지막에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라고 딱 한 번 감정을 느낌표와 더불어 영탄적 어조로 터뜨리면서 시를 종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후 그 감정이 차고 넘쳐 통곡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시를 닫은 이후에야 김소월의 <초혼>(1925)에서 화자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라고 절규하던 그 어조로, 자식을 잃어 애달픈 아버지의 주체할 수 없이 슬픈 감정을 터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 정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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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학동 편(1994), 《정지용 전집 1: 시》,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