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목장터와 감나무
갑오년 동학때,
전봉준과 고부군민들이
처음으로 모인 곳은 말목장터.
이곳 감나무 아래서 전봉준은 군중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고부읍으로 진격하였다 한다.
2002년
태풍에 뽑히기 전의 말목장터 감나무.
태풍에 넘어간 나무 대신
새로 심어진 감나무.
감나무의 유래에 대한 설명.
조병갑이 처음으로
고부군수가 된 것은 1892년 4월 29.
그러다 그해 11월 30일 익산군수로 전임발령되었지만,
몇달 사이에 6명이 고부군수로 임명만 되고 부임하지 못한다.
조병갑이 전라감사 김문현에 로비를 했기 때문.
김문현이 다시 조병갑을 임명해 달라고 하여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은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한다.
다음날, 1894년 1월 10일
(양력으로는 2/15) 고부군민들
고부관아를 쳐들어 간다.
준비는 10여일 전부터 시작되어,
1월 초8일 말목(馬項)장날에 농민들에게 통문이 돈다.
8일 통문을 받고, 9일 저녁 예동에 모임.
10일 새벽 2시경 고부로 출동.
고부민요 주동자는 7인,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3인). 태인 주산의 접주 최경선이 참가한 것은
고부접주 전봉준과 같은 원평 김덕명 대접주
연원이었기 때문. 고부민요 초기부터 동학도인
일부가 조직적으로 참여했다(표영삼,[동학2]367쪽)
공초에서 전봉준은 는
“온 고을의 인민이 참고 참다가(忍之又忍)
종말에 부득이하여 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동학도인중 久勤(오래되고 부지런한 사람)하고
의용심있는 사람 3백명을 데리고 그날 밤
말목장터로 향하고 고부인민 수천 명이
약속과 같이 그 날 밤 한곳에 모였다.
두 길로 나누어 고부읍으로 향한다.
예동 - 천치(天峙) - 고부,
예동 - 영원면 운동학동 - 고부.
대밭을 만나면 죽창을 만들다.
총포로 무장한 인원도 상당수 있었다.
고부읍성 북성문 밖에서 합류하여
성을 포위하고 성문으로 돌진,
저항받지 않고 고부읍성 함락.
새벽 4시경. 조병갑은
고부 - 정읍 - 순창 - 전주감영으로 도망침.
군기고 부수고 총창을 탈취 무장, 억울하게 갇힌 사람 석방.
탐관오리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합당한 벌을 내리다.
1월 17일 식량문제와 감영군의 출동을 예상하고
다시 말목장터로 본진을 옮긴다.
"난민들은 진영을 말목장터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지도부는 수차례 회합하여 향후대책을
논의하였고 13명의 대표를 다시 선정하였다.
군무기고를 격파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1월 17일 말목장터로 옮겨 주둔한 고부민들은
만석보를 파괴하고 백산(白山)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全琫準實記」)"
첫댓글 소중한 내용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어릴적 저 감나무에 대한 추억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