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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의 독립, 당신이라면 어찌할까 -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
운명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 군대의 횡포를 목격하고 IRA(Irish Republican Army)에 합류한 젊은 의사 데이미언은 형 테디와 함께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운다. 마침내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게 된 아일랜드, 그러나 일부 지역 자치만 허용한다는 영국의 발표에 IRA는 찬반 여부를 놓고 내부 분열로 대립하게 된다.
타협하는 것이 낫다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 형 테디와 끝까지 싸워 진정한 독립을 얻어내야 한다는 동생 데이미언, 운명적 갈림길에 선 두 형제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하기에 이르는데...
40년 동안 가난하고 핍박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온 켄 로치의 신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팔짱끼고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아일랜드 독립 운동 과정을 그렸는데, 민족과 계급 문제가 얽힌 현실을 차갑고 면밀하게 보고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끈질기게 묻는 뜨거운 영화다. 1920~22년 역사에 대한 기록이자 현재에 대한 성찰이다.
아일랜드인 데이미언(킬리언 머피)의 앞날은 장밋빛인 듯 보인다. 의사인 그는 런던으로 떠날 참이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인 그의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는 영국에 맞서 싸우자고 설득하지만 데이미언은 회의적이다. 그러나 영국군의 폭력은 데이미언이 총을 들도록 만든다. 고함을 지르며 드잡이부터 해대는 영국군은 난데없이 출몰해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때려죽인다.
투쟁과 잔혹한 고문, 동네 동생을 밀고자라는 이유로 처단해야 하는 데이미언의 고뇌는 전형적이다. 영화는 이들을 독립 투쟁의 영웅으로 만드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마른 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아일랜드의 척박한 땅을 비추듯 전투나 훈련 장면도 무심할 만큼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만 무엇을 위해 독립할 것인지 관객이 판단하도록 뚝심 있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전투보다 오히려 이런 논쟁 장면이 더 격정적이다. 아일랜드공화국군이 차지한 지역에서 재판이 열린다. 가난한 할머니가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법정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벌을 내리지만 테디가 풀어줘 버린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선 총 한 자루가 아쉬울 판인데 그들에게 무기를 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테디와 함께 독립 운동을 벌이면서도 때로 반대편에 서는 노동자 댄은 아일랜드 마르크스주의자 제임스 코놀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당장 내일 영국군을 몰아 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영국은 계속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지주와 자본가, 상권을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이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이런 대립은 더 날카로워진다. 테디는 북아일랜드를 뺀 자치를 허용한다는 영국의 타협책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미언은 투쟁의 기세를 몰아 완벽한 독립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땅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도 여전할 것이라고 맞선다. 데이미언을 이상주의자라고 밀어붙이는 테디에게 데이미언은 소리친다.
“나야말로 현실주의자다.” 영국의 회유책에 휘말려 계급에 따라, 현실 인식에 따라 아일랜드인들은 쪼개졌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형제의 운명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테디가 속한 아일랜드 해방군은 데이미언을 옛 영국군들이 자신들을 가뒀던 그 감옥에 집어넣는다. 누가 적이며, 무엇이 변했나? 약자의 현실은 여전히 복잡해 서로가 적이 되기 일쑤고 지배자는 이를 재빨리 이용한다.
이 영화로 켄 로치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탄압하는 방식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태도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과거를 비춰 현재의 이런 모순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또 다른 분단국가 아일랜드의 고뇌
이른 아침 어슴푸레한 초원, 서늘한 안개를 뚫고 전해지는 옛 아일랜드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지난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아일랜드는 자신들이 영국 의회에 가지고 있는 아일랜드 민족당의 지분으로 아일랜드의 자치를 요구하던 끝에 그 성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에서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자치에 관한 논의 자체를 무기한 연기시키고 만다.
이에 과격한 독립주의자들에 의해 더블린 시내의 공공건물이 점거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봉기’였다. 사건은 시민 450명이 사망하고 2,600명이 부상했으며, 주모자 15명이 처형되는 참극으로 종결된다.
1916년 부활절봉기가 있은 다음날 더블린 시내의 모습.
봉기가 더욱 비극적이었던 것은 주모자들 스스로가 그 실패를 예상했다는 데 있었다. 주모자 패트릭 피어스는 ‘우리는 아마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혈은 곧 정화(淨化)다’라고 말하며 거사를 강행했다. 실패를 전제로 벌인 유혈, 시인 예이츠는 ‘무서운 미의 탄생’을 목격했다.
이후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통치가 더욱 가혹해졌음은 물론이다. 독일이 아일랜드의 독립 세력을 이용해 영국의 후방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화는 아직 아일랜드의 미래가 보이지 않던 이 우울한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아일랜드는 서로 닮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쿄대 총장을 지냈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 같은 이는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라는 묘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의 단일민족 개념은 아일랜드의 순혈주의 전통과 놀랍도록 유사하고, 두 나라 모두 일본과 영국이라는 잘난 이웃을 둔 탓에 혹독한 고초를 겪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러나 우리에게 30여년의 짧지만 강한 흔적을 남겼던 일본과 달리,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의 관계는 12세기 튜더 왕조의 침략 이래 700여년간 애증의 세월을 함께 하며 영국사에서 아일랜드의 흔적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밀접한 관계로 발전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가 되어서는 월리엄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영국 문학사의 온전한 몫이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의 차지가 될 정도로.
하지만 영국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에게 자신의 고향은 결코 떳떳한 것이 아니었다. 워털루에서 영국을 구한 웰링턴 공작조차도 실은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누군가 공작에게 “당신 사실 아일랜드 사람 아닌가”라고 묻자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사람이 말이 되지는 않는다”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는 일화는 영국의 그늘에서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아일랜드인들의 단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 속의 떳떳지 못한 아일랜드 ‘출신’이 당당한 아일랜드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 15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역사적 사실을 평가할 때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그 사실과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다. 감상과 주관이 배제된 온전한 팩트,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각. 영화의 배경인 1920년 이후, 80년이란 시간은 사건의 당사자인 영국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객관적 시각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영화 속 아일랜드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인 IRA 테러리스트처럼 왜곡되지도 않고(굳이 ‘데블스 오운’의 브레드 피트를 제외하자면), 디즈니 만화 속 초록 난쟁이처럼 꿈과 현실을 오가지도 않는다.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선,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화면, 아일랜드 못지 않은 수난의 20세기를 살았던 우리는 언제쯤 이런 영화 한 편을 얻을 수 있을까. 켄 로치 감독과 함께 어느덧 훌륭한 배우로 성장한 킬리언 머피에게 큰 찬사를 보낸다.
이장현 문화에세이스트·‘클래식광, 그림을 읽다’ 저자 almaviva@empal.com
당당한 아일랜드 사람이 되기까지...
아일랜드 독립전쟁 (혹은 영국-아일랜드 전쟁)
" 아일랜드 국기에 축복을 주소서 ! "
아일랜드 독립전쟁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아일랜드를 지배하고있던 영국 정부에 대항해 1918년에 만들어진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이다. 이 전쟁은 1919년 1월부터 1921년 7월 휴전까지 계속되었다. 영국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전쟁"으로 불린다. (Irish War of Independence 혹은 The Anglo-Irish War)
이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로 분단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IRA로 불리움으로써 후에 같은 이름으로 구성된 IRA와 구별하고 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Irish War of Independence), 자료사진.
순수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에게 영국-아일랜드 전쟁은 1916년의 부활절 봉기에서의 선언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화주의자들은 1919-21년(그 다음해에는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다.)간의 충돌은 자신들의 공화국을 파괴시키려 하는 행위에 대한 방어였다고 주장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영국-아일랜드 전쟁의 발단이자 원인은 일방적 독립선언을 한 독립 아일랜드 의회에 있다. 아일랜드 제헌의회 내각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하고 IRA에 전쟁을 개시할 것을 명했다.
1919년 1월 21일 덴 브린이 지휘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RIC) 소속의 경찰 두 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3일 뒤 남 티퍼레리에서 전쟁 선포가 있었다. 같은 날 처음으로 1916년 ‘부활절 선언’이 비준되었던 곳에서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시작되었다.
1916년 부활절 봉기 -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시작.
끝없는 폭력의 확산
의용병들은 영국 정부의 소유물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무기와 군자금을 약탈했다. 그리고 영국 행정기관 소속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첫 희생자는 아일랜드 주재 사무행정 치안판사인 존 밀링이었다. 그는 웨스트포트에서 교도소로 몰려든 의용병들에게 총살당했다. 그들은 ‘보어인’들의 성공적인 전투 기술을 흉내냈다. 그것은 바로 불규칙한 빠른 급습과 약탈이었다.
‘이먼 드 벌레라’같은 전통적 세계관을 가지고 재래적인 교전방식을 고수하던 몇몇 공화주의자 지도자들과 ‘마이클 콜린스’와 IRA 수뇌부는 이 전술을 반대했다. 폭력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인 대다수가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영국 정부가 보여준 광범위하고 잔악한 테러행위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곧 폭력행위에 동참했다.
이먼 드 벌레라 (Eamon de Valera)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향해 이유없는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숨지게 했고 닥치는대로 아일랜드인들을 잡아들였다. 또한 영국군은 아일랜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과 농장들을 불태웠다. 폭력은 서서히 퍼져나갔으나 1920년이 되었을 때 폭력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1920년 초에 더블린 부두 노동자들은 수백번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전쟁 도구도 다루지 않겠다고 하였다.아일랜드인 운전수들이 영국군을 수송하는 것을 거부한 직후 기차 운전수들이 잉글랜드에서 강제 동원되었다.
1920년 3월, 서 리머릭에서 IRA는 밀정을 하던 남자를 처음으로 살해하였다. 4월 초, 400여 개의 버려진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병영이 다시 사용되어지는 것을 막기위해 불태워졌다. 몇 일후, 마운트조이 교도소의 죄수들은 정치적 지위(자신들의 석방)를 위해 단식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 투쟁은 더블린에서의 대규모의 시위를 이끌어냈다.
더블린 시내의 시가전 장면.
이 혼란상황으로 인해 죄수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합동 경비대는 죄수들의 석방을 축하하던 밀타운 멀베이에 모여있던 비무장 상태의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주 검시관은 9명의 군인과 경찰을 살인죄로 선고했으나 징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아서 그리피스’는 통계 자료를 통해 영국군이 처음 18개월간 무고한 민간인 주택들을 상대로 38,720건의 약탈행위를 벌였으며 4,982명에게 폭력 혐의를 씌워 연행했고, 1,604명에게 폭력 행위를 가했다고 했다. 또한 영국군은 102곳의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77명의 무고한 비무장 민간인과 공화주의자들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그리피스는 의회법정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일은 IRA의 영국군에 대한 폭력행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Dublin, 1916.
IRA의 주요 공격 목표는 아일랜드에서 영국 정부의 눈과 귀를 담당하고 있던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였다. 9,700여명의 인원과 1,500여개의 병영이 아일랜드 전역에 산재해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1916년 아일랜드 의회는 RIC 대원들의 강제추방을 선포했다. 이로써 아일랜드인들은 더 큰 규모의 폭력행위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RIC대원들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 적으로 항복했으며 무장을 해제했다. 또한 신병 또한 거의 보충되지 않았다. RIC대원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점을 습격하여 상점주인을 총으로 협박해 물건을 약탈하곤 했는데 이러한 행위 또한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몇몇 RIC대원들은 IRA에 협조하기도 했다.
1919년, 11명의 RIC 대원과 4명의 더블린 시립 경찰대원들이 살해당했고 다른 20명의 RIC 대원들이 부상당했다. 1920년에는 143명의 RIC 대원들이 살해당했고 197명이 부상당했다. 1921년에는 205명의 RIC 대원들이 살해당했고 291명이 부상당했다. 총 363명의 RIC 대원들이 전쟁 중 살해당했으며 510명이 부상당했다.
마이클 콜린스와 IRA
아서 그리피스의 장례식에서의 마이클 콜린스.
그러나 서류상 기록에 따르면 100,000여 명의 단원들이 있던 아일랜드 의용군 중 단지 15,000 여명만이 전쟁 기간 중 활동했다고 콜린스는 추정했다. 수 많은 여성단체와 유소년단체가 IRA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그들은 IRA 단원들을 위해 식량과 무기 등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IRA는 아일랜드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고 아일랜드 국민들은 RIC와 영국군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 했다. IRA 단원들을 위해 안전 가옥을 마련해 주었다. 200 여명의 영국군은 지방 IRA 단원들에게 자신들의 동료가 살해당하자 마을을 습격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불태웠다. 이러한 일들은 리머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반복되었고 이 일로 아일랜드 국민들은 영국군에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IRA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었다.
마이클 콜린스(왼쪽에서 두 번째,첫 번째 열), 아서 그리피스 (왼쪽에서 네 번째,첫 번째 열)
이먼 드 벌레라 (중앙, 첫 번째 열), W.T 코즈그레이브 (오른쪽에서 두 번째,첫 번째 열).
4월, 아일랜드 국세청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었다. 사람들은 콜린스의 국민 공채(National Load) 방안을 지지했다. 국민 공채는 정부와 군대를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 영국은 이에 대한 방안으로 아일랜드 주재 영국 치안판사인 알란 벨로 하여금 자금추적 임무를 부여했다. 1920년 3월 26일까지 그는 신페인당에서 £71,000을 몰수하고 아일랜드에 있는 은행들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몰수했다. 그러나 벨은 남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인들에게 머리에 3발의 총알을 맞고 죽었다. 연말에 이르러서는 £357,000에 이르는 돈이 모였다.
이먼 드 벌레라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의회에 IRA의 폭력행위 중단을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즉시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페인당 지도부가 갈등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영국의 반응과 ‘피의 일요일'
공식적으로 그들은 RIC의 하위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살인,테러를 일삼고 술주정을 부리며 어설픈 훈련을 받은,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어떤 조직보다도 더 영국 정부의 도덕성에 악영향을 끼친 준군사조직이었다. 얼마 후에는 퇴역한 1,400여명의 예비역 영국군 장교들이 왔다. BaT가 아일랜드인들을 상대로 수 많은 폭력과 테러를 일삼자 아일랜드인들의 반발은 더 심해졌다.
블랙 앤 탄스(Blacktans)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영국군 장교 Auxiliaries.
1920년 11월 21일 콜린스의 부대는 카이로 갱으로 알려져 있는 19명의 영국정보원들을 더블린 인근에서 살해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BaT는 풋볼 경기가 한창 진행중이던 크로크 공원을 향해 트럭을 타고가서 무차별 발포를 했다. 14명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65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은 ‘피의 일요일’로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크로크 공원의 스탠드는 호건 스탠드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이는 당시 사건 도중 숨진 티퍼러리팀 소속의 선수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피의 일요일’ 희생자들 사이에서 시신을 확인하는 가족들.
코르크 카운티에서도 더블린에서와 같은 유혈이 낭자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영국군은 IRA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공화주의자들을 살해하고 민간인들의 집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전술을 사용했다. 1920년 3월, 신페인당원이자 코르크 카운티의 지도자인 토머스 맥 컬틴이 그의 집에서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살을 당했다. 범인은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지역 방위대 병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시가전을 대비하는 영국군이 Dublin 시내에서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있다.
컬틴의 후임은 티런스 맥스위니였다. 그는 런던에서 브릭스턴 수감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 참가자 중 한명이었다. 1920년 12월 11일 코르크의 중심부는 영국군에 의해 불탔으며 파괴되었다. 또한 이들은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을 방해했다. 이날의 사건은 IRA의 공격에 대한 영국군의 보복성 공격이었다.
코르크 카운티에서 처음으로 "플라잉 칼럼"가 등장했다. 이들은 100여명으로 이뤄진 기동부대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지형을 영국군보다 더 잘 아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 공격 등의 전략을 펼쳤다. 일부 영국군 연대가 비무장 포로들을 죽였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에섹스 연대는 이들 중 하나였다.
션 호건의 플라잉 칼럼, (Flying-column)
더블린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920년 11월 28일, 탐 베리가 이끄는 IRA 소속 서부 코르크 부대는 ‘Kilmicheal’에서 영국군 정찰대를 향해 매복공격을 가해 18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곧 전쟁규모의 확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서부 코르크 Flying columns는 크로스베리에서 영국군과 Black and Tans에 맞서 다시 한번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IRA는 단지 3명만이 피해를 입었는데 비해 영국군은 60여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다쳤다.
1921년 7월 휴전까지 사상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1년 1월에서 7월까지 6개월간에만 RIC,영국군,IRA대원과 민간인을 포함해 1000여명 이상이 죽었다. 이 수는 3년간의 전쟁기간 중 발생한 총 사상자 수의 약 70%에 이르는 수였다. 또한 4,500명의 IRA 대원들이 이 기간동안 붙잡혀 억류당했다. (M.E. Collins, 'Ireland 1866-1966 p 265).
아일랜드 독립전쟁, Anglo Irish War 1916-1921.
2월 1일, 처음으로 군법에 의해 IRA 대원이 사형당했다. 코넬리우스 머피가 첫 희생자였다. 28일에는 6명이 더 사형당했는데 코넬리우스 머피 그리고 6명 모두 코르크에서 사형당했다. 영국군 12명이 보복 공격으로 총을 맞고 사망했다. 통틀어서 14명의 IRA 대원이 전쟁기간 중 공식적으로 사형당했다.
1921년 5월, IRA는 더블린 중심에 있는 커스텀 하우스를 점령한 후 불태웠다. 이것은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통치하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직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시점에서 보면 이것은 큰 실수였다. 5명의 IRA 대원이 사망하고 80명 이상의 대원들이 붙잡혔다. 이는 IRA가 영국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장비와 훈련을 받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1921년 7월까지 대부분의 IRA 대원들은 고질적인 총기와 탄약 부족에 시달렸다.
더블린에 있는 커스텀 하우스. (Custom House)
여전히 많은 수의 군사 역사학자들은 IRA가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싸웠으며 절대 군사적으로 패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휴전이 이뤄지기 까지 마이클 콜린스를 포함한 많은 수의 공화주의자 지도자들은 만약 전쟁이 더 길어진다면 그것은 곧 IRA 투쟁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투쟁 계획은 "잉글랜드로의 전선 확대"로 변경되었다. 리버풀 부두와 같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 공격했다. IRA는 19곳의 중요한 저장소를 파괴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에서의 IRA 대원들은 영국의 여론이 군법에 대해 반대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쉽게 체포되지 않았다.
이 새로운 투쟁방법은 휴전과 동시에 끝났다.
Michael Collins. (마이클 콜린스)
희생자, 1만 4천명
1919년부터 1921까지 있었던 공화주의자들과 영국군간 사이에 발생한 이 게릴라전으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1,400여명 이상이다. 이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363명의 보안관,262명의 영국군,공식적 사형당한 14명을 포함한 550명의 IRA 대원들 그리고 약 200명은 민간인이 차지하고 있다.(Hopkinson, Irish War of Independence p 201-202)
1920년 ~ 1930년대 활동했던 초기 IRA 대원들에 대한 기록.
다른 문헌들에서는 600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벨파스트에서만 453명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싸움으로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IRA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아일랜드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휴전 조약 (Anglo-Irish treaty, ‘영국 – 아일랜드 조약')
'영국-아일랜드 조약' (Anglo-Irish Treaty)
[출처] 아일랜드의 독립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작성자 햇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