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달숙 시조집, 『두리기둥』, 책펴냄열림사, 2015.
□ 경남 창녕 출생, 수필, 시, 시조 등단
보병 소대장으로 월남전 참전, 육군 중령 예편
<시인의 말>
한 그루 팽나무 같으시던 아버지와 시조창을 즐겨 읊으시던 어머니가 새삼 그림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마음을 달래시듯 읊으셨습니다.
부모님 가시고 내가 아비 되어 읊는 노래는 왜 이렇게 초라한지, 부끄럽습니다.
시보다 시조를 먼저 공부했으나 사정에 의하여 이제야 얼굴을 내밉니다.
두루 이해와 지도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5.12.13.
松韻 차달숙 모심
두리기둥
-폐가에서
격랑이 휩쓸고 간 외딴 마을 너와집
두리기둥 옹이에 기침소리 들린다
매미도
푸른 한나절을
숨죽여 듣다 간다
강영환의 <발문>에서
이 시에는 여유를 넘어 관조를 만날 수 있다. ‘외딴집’, ‘너와집’, ‘두리기둥’, ‘옹이’, ‘기침소리’, ‘매미’, ‘한 나절’, ‘숨죽여 듣다 가’는 제재들이 지극히 객관적인 진술로 나열되어 있다. 욕심을 떨어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관조가 되는 일은 구도자들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시인들 구도자로 분류할 때 시가 닿아야 할 궁극의 세계는 관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 차 시인의 시조가 당도해야 할 곳은 우선 관조가 아닌 생활이어야 할 것 같다. 좀 더 치열하게 시조의 영역을 넓히고 세계를 깊이 있게 천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 모든 일을 겪어본 이후에 초월을 만나야 한다. 어제 첫 시조 작품집으로써 도달행댜 할 세계는 서정이라는 출발점이다. 그에게 남은 건 서정을 바탕으로 그 위에 자신만의 가치관을 세워 집 한 채 견고하게 짓는 일이다. 그의 서정이 닿는 곳마다 통과의레처럼 군림하는 두 여인으로부터 벗어남, 혹은 고향 의식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작품 세계가 그것이다. 어쩌면 낡은 서정일 수 있는 사물들 간의 화해를 넘어 현실 세계에서 자주 만나고 부딪히는 투쟁 양식의 서정에 몰입해 보는 것도 행복한 시 쓰기에 한 걸움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한다.
설니홍조雪泥鴻爪
울엄니, 길을 가며 소리 없이 우신 날
왜 그런지 모르고 나도 따라 울었다
할머니 가시는 길을 그렇게 배웅하고
눈밭에 발자국들 햇살 속에 미련 없다
사랑을 얻기 전에 이별을 앞서 가소
찬물에 손을 담근 듯 시린 이만 남았다.
(설니홍조(雪泥鴻爪) :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지듯, 인생의 자취가 흔적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
반달
-먼저 간 아내에게
하늘 가는 반쪽달이
유리창을 들어선다
내가 보는 반쪽은
그대 역시 볼 수 없다
별리는
온 달을 버리고
숨아가는
반쪽 달
산그림자
온 종일
산을 타던
하산길 계속 물에
씻으려던
두 손을
황급히 둔 것은
겁 없이
품었던 산이
먼저 와서 씻고 있데
나뭇잎이
궁글리던
골바람도 숨을 멎어
하얀 솜털구름
말없이 잠긴 물에
고와라
우주의 자모慈母가
목욕하고 계시네
변산반도 낙조
누구와 이별일까 피 맺히는 격포항
남겨 둔 말 지천으로 꽃 되어 피어나고
가슴에 넘치는 밀물은
어둠길로 떠난다
먹빛된 그리움도 이제는 껴야 하나
오지 말 걸 그랬나 봐서는 안 되는가
수평선 긴 눈썹 아래
눈물만 출렁인다
<발문>
견고한 서정적 자아와 화해
강영환(시인)
눈 시린 벼랑 끝에
동백꽃이 흔들린다
추락은 저런 거다
그림자도 남김없이
흉터만 홀로 자라서
기약하는 눈초리
-「해후」 전문
이 시는 벼랑 끝에 핀 동백꽃이 흔들리면서 지상에 떨어지고 꽃이 떨어진 흉터에서 다시 돋아나는 꽃을 거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금년에 떨어진 꽃은 한 번 헤어지면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는 존재다. 다시 만나는 꽃은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 후 만나는 꽃은 오늘 헤어진 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간직한 꽃이다. 꽃도 새롭고 꽃을 지켜보는 화자도 새롭다. 일 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숱한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그 사실을 ‘추락’과 ‘기약’으로 연결시키면서 흔들리며 피어 있는 동백이 안고 있는 문제에 인간 존재의 근원을 어렵지 않게 연결시킨다. 사물 안에 숨어 있는 서정을 이끌어내 근원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인의 고뇌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사물 속에 이입되는 견고한 서정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이 시조집을 관통하는 정적한 서정이 가닿은 지점은 숱한 사물들 간 혹은 사람들 사이의 화해 방식에 있다.
가슴에 토박이 말 빗장 굳게 닫아걸고
강물 속에 새긴 뜻 풀어 읽는 눈빛이여
기원이 하늘에 닿으면
타는 노을도 꽃이다
동녘에서 몰려오는 어둠을 등에 지고
샐비어 밀밭 가듯 을숙도 가는 길
술 취한 가등 불빛에
수평선이 기운다
-「하단에서-낙동강 ‧ 4」 전문
시는 시 자체일 뿐 다른 그 무엇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속에 스며 있는 의미들은 무엇일까. 오든에 의하면 ‘예술은 인생이 아니며 또한 사회의 산파역도 될 수 없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시는 현실을 반영해 주는 마음 속 거울이기에 시의 이면에 담겨진 내 삶의 무늬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차달숙 시조에는 현란한 수사가 없다. 미래파 자유시에서 횡행하는 이른바 비틀어진 문장을 이용해 교묘한 표현을 이끌어내지도 않는다. 현실 감각을 유지한 채 정직한 표현으로 의미를 드러낸다. 사물들 속에서 자신만의 느낌을 끌어내는데 어쩌면 단단한 서정이 주는 힘을 믿는 것 같다. 시를 여성성이라고 볼 때 서정은 시의 뿌리가 될 것이다. 단단한 서정이 가져다주는 차시인의 시조는 야무지고 속살이 깊다
3. 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은유는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 양색이다.’는 것이다. 은유로 표현되는 시는 리얼리티가 새롭게 인식된 세계다. 생기 있는 실제라고 불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는 이념적 도구로써 보다는 인간의 한 근원적 사고활동의 표상이요, 앤 프라이의 말처럼 ‘투쟁의 형식’이라는데 그 진의가 놓인다는 점을 새삼스럽지만 단호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시인이 표출해낸 이미지들에는 다양한 양식들이 나타난다. 아무렇게나 추출해낸 그의 은유에는 사물과 사물 사이 거리에 놓인 ‘투쟁 양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차 시인이 ‘빈배’와 ‘초승달’을 연결시키는 구도처럼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의 양식에 해당된다.